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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 (백제)

진무(眞武)는 백제 아신왕의 외삼촌이다. 

개요 

백제 393년, 진무(眞武)를 좌장(左將)되고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아신왕의 외삼촌(王之親舅)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었다. 

진무(眞武)는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그는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고, 군량 수송이 부족해 퇴군했다.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2년 8월)

393년 가을, 진무(眞武)는 군사을 거느리고 고구려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담덕(談德) 광개토왕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에서 진을 치고 대응하니 진무는 패배하여 많은 병사을 잃었다.

398년, 진무(眞武)는 병관좌평이 되어, 동료 사두(沙豆)를 좌장(左將)으로 삼았다. 3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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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眞武)

생몰년 미상. 백제 아신왕 때의 귀족. 침착·과감하고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393년(아신왕 2) 1월 좌장(左將)에 임명되어 군사(軍事)를 통할하면서, 그해 8월에는 고구려에 빼앗긴 관미성(關彌城: 위치비정에 대하여서는 臨津江口說·禮成江口說·喬桐島說 등이 있음.)·석현성(石峴城: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등의 탈환을 위하여 관미성을 포위공격하고 분전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과 군량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군하였다.

395년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패하(浿河: 지금의 예성강) 유역에서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아 참패당하였다. 그렇지만 398년에는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승진하였다. 

이렇듯 당시 왕비족으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진씨족(眞氏族)의 한 사람으로서, 백제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대고구려전에 앞장섰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출처 :  http://www.histopia.net/zbxe/?document_srl=10143 

眞武(진무) 
 
생몰년 : ?~? 
활동시기 : 백제 아신왕 
관직 : 王之親舅,左將,兵官佐平 
출전 : 삼국사기 
  • 393년 봄 정월 (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무(武)는 왕의 외삼촌(王之親舅)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2년 1월)
  • 393년 가을 8월에 왕이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寡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2년 8월)
  • 395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眞武)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4년 8월)
  • 398년 봄 2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沙豆)를 좌장(左將)으로 삼았다. 3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7년 2월)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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