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8791&PAGE_CD=N0550
일본이 백제 난민 구출 작전 편 이유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계백>, 열한 번째 이야기(최종)
11.11.21 11:37 ㅣ최종 업데이트 11.11.22 10:23 김종성 (qqqkim2000)
▲ 아키히토 일왕. 2010년에 왕궁(황거)에서 찍은 사진. ⓒ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1년 12월 18일. 이날, 제125대 아키히토 일왕(천황)의 발언이 한·일 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다."
기자회견에서 나온 이 발언은, 일본 왕실과 한국의 혈연적 인연을 일왕 스스로 공식 인정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중대 의의를 가진다.
사실, 고대 일본이 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일왕이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비단 왕실의 혈통뿐만 아니라 경제·정치·문화·사회 각 방면에서 한·일 간의 상호작용이 있었고, 그런 속에서 백제 쪽의 작용이 상대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이 점은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에 의해서도 인정됐다. 고고학자인 에가미 나미오는 고대 일본의 시작이 한민족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저서인 <기마민족국가>에서, 만주 및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경유해서 일본열도를 정복한 사실이 고대 일본의 무덤 자료들을 통해 입증된다고 밝혔다.
일본이란 국호의 기원, 한국과 어떤 관계?
고대 일본이 사실상 한국인들의 '뜻대로' 경영되었음을 입증하는 흥미로운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일본'이란 국호의 기원이다. 이 국호의 채택 과정을 관찰하면, 고대 일본의 성립 및 발전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원래 국명은 왜국(倭國)이다. '왜국'이 '일본'으로 바뀐 시점은 흥미롭게도 백제 멸망 직후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편에 국호 변경의 역사적 순간이 기록돼 있다.
"(문무왕 10년) 12월, 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 '해 뜨는 곳과 가까워서 이렇게 이름을 붙인다'고 스스로 말했다(倭國更號日本. 自言, 近日所出以爲名)."
유사한 설명이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 편에도 나온다.
"일본국이란 것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태양 쪽에 있다 하여 일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
국호가 변경된 시점인 문무왕 10년 12월은 양력으로 하면 671년 1월 17일부터 2월 14일 사이다. 이 조치가 일본 율령에 반영된 것은 701년이다. 율령에 반영되기 전에도 새로운 국호가 이미 널리 사용됐다는 점은, 678년에 중국 서안(시안)에서 사망한 백제인 예씨의 묘지명에 일본 국호가 등장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 묘지는 2010년에 서안 근교에서 발견됐으며, 관련 내용이 지난 10월 23일자 <아사히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 일본 시가현 히가시오우미시(市)에 있는 백제사(寺). 일본어로는 햐쿠사이지라 부른다. 일본열도의 중간쯤에 있다. 천태종 계열의 사찰로, 606년 쇼토쿠 태자가 건립했다. 백제 사찰을 본 땄다 하여 백제사라 불렀다. ⓒ 百濟寺 홈페이지
왜국이 671년에 국호를 바꾼 이유는?
왜국이 671년에 국호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백제의 멸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은 그 직전까지 왜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아키히토 일왕도 인정한 것처럼, 왜국 왕실은 경제·정치·문화·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혈통적으로도 백제와 긴밀한 연관을 가졌다. 4세기 때의 오우진(應神) 일왕과 5세기 때의 닌토쿠(仁德) 일왕이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또 친(親)백제파를 타도한 정변인 다이카 개신으로 인해 645~649년에 친신라파가 잠시 정권을 잡은 적은 있지만, 왜국은 기본적으로 친백제의 나라였다. 가야가 있을 때는 가야와도 친했지만, 가야가 없어진 뒤로는 백제와 특히 친했던 것이다. 백제-왜국 동맹은 한미동맹 이상으로 공고한 동맹이었다.
백제-왜국의 공고한 동맹은, 660년에 의자왕이 백기를 듦으로써 백제가 문을 닫은 뒤에도 식지 않았다. 일본 지배층 내에서는 어떻게든 백제를 되살려 보려는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른바 백제부흥운동의 열기가 불처럼 타오른 것이다.
예컨대, <일본서기> 권27에 따르면, 당시 왜국 통치자인 덴지(天智) 일왕은 덴지 1년 1월 27일(662년 2월 20일) 백제부흥운동의 주역인 복신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했고, 덴지 2년 8월 27일(663년 10월 4일)에는 백강(금강)에서 나당연합군에 맞서 투쟁했다.
왜국인들의 동맹정신은 백제 유민들에 대한 따뜻하고 열렬한 환영으로도 표출되었다. 그들은 백제 왕족들을 우대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제인들을 일본열도로 불러들였다.
<일본서기> 권27에 따르면,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자 왜국 지도층 인사들은 "백제란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찌 돌아갈 방법이 있으리요!"라고 한탄하면서 백제 내의 친척들을 구출하기 위한 방법을 군 당국과 긴급히 협의했다. 그 결과, 덴지 2년 9월 24일(663년 10월 30일)에는 일본 수군이 백제 난민 구출작전을 위해 전라도 해안에 상륙했다.
일본, 백제 난민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백제 난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왜국인들은 많은 것들을 양보했다. 그들은 군말 없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새 식구들에게 먹고살 터전부터 마련해 주었다. 예컨대, 덴지 4년 2월(665년 2월 20일~3월 21일)에는 백제난민 4백여 명에게 정착지를 제공했고, 덴지 5년 10월(666년 11월 2일~12월 1일)에는 난민 2천여 명에게 집터를 지원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왜국인들은 관직도 내주었다. 일례로, 국호 개정 직후인 덴지 10년 1월(671년 2월 15일~3월 15일)에는 약 70명의 백제인들에게 관직을 부여했다. 군사학에 조예가 깊은 백제인들을 가장 우대했고, 의학·유교·음양학에 전문성이 있는 백제인들을 그 다음으로 우대했다.
이 같은 백제인 수용 작업은 상당히 체계적인 준비작업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긴박한 와중에도 왜국 정부는 유민 수용을 위한 제도적·정치적 준비를 동시에 진행했던 것이다.
일례로, 덴지 3년 2월(664년 3월 3일~4월 1일)에는 종전의 16관등제를 26관등제로 확대 개편했다. 백제인들에게 관직을 내주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 조치는 지배층 및 일반 백성과 관련된 제도개혁과 함께 이루어졌다. 위의 덴지 10년 1월과 같은 인사조치는 이런 제도개편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이 외에도, 왜국에서는 갖가지 형태의 국가적 개조 작업이 전개됐다. 일례로, 덴지 9년 1월 14일(670년 2월 9일)에는 조정 내에서의 예법을 정비하는 동시에, 귀족과 천민 사이의 예법, 노인과 청년 사이의 예법을 정비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새로운 기운이 불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위와 같이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 국호가 채택되던 시기에 왜국 안에서는 국가적으로 중대 변화가 연이어 발생했다. 새로운 식구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제도를 채택하는 등의 변화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국가 전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시기였던 것이다.
▲ MBC 드라마 <계백>. ⓒ MBC
왜국이란 국호, 상당히 촌스러워...
이 같은 변화상을 관찰하노라면, 우리는 671년에 일본 국호가 탄생한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진문명을 가진 백제 유민들이 왜국에 대거 유입되고 그들이 국정에 참여함에 따라, 종전의 국호로는 백제인과 왜국인을 하나로 통합할 수 없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백제 유민의 대거 유입이 왜국의 사회체제를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그 결과로 새로운 국호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토착민과 도래인이 동참해서 신국(新國)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이란 국호가 창안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사실, 왜국이란 국호는 한자 문화권 안에서는 상당히 촌스러운 편이다.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 편에서는, 국호 개정 당시 일본열도 안에서도 기존 국호를 혐오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는 왜국이란 국호를 촌스럽게 여기는 외부세력이 일본열도에 대거 유입되었고 그들의 발언권이 국가경영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일본이란 국호는 백제인과 왜국인의 공동작품이지만, 그것의 채택과정에서 백제인들의 입장이 좀 더 강하게 반영됐으리라고 추론할 만한 근거가 있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삼국사기>에서는 '해 뜨는 곳과 가까워서' 일본이란 국호를 채택했다고 했고, <구당서>에서는 '태양 쪽에 있다고 해서' 일본이란 국호를 채택했다고 했다.
왜국인들의 눈에는 자기 나라가 '해 뜨는 곳'일 수가 없다. 왜국을 '해 뜨는 곳'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왜국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이란 국호 속에는 왜국에 대한 백제 유민들의 관점과 철학이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국호 변경과정에서 백제인들의 입김이 훨씬 더 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신국의 건설과정에서 백제인들의 영향력이 매우 막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 국호의 탄생과정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 유민들은 그들의 관점과 철학에 입각하여 일본열도를 새로 개척해나갔다. 그들의 조국인 백제는 비록 멸망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멸망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김소월의 '개여울')라는 시구처럼, 일본열도에서 '백제 II'를 개척한 유민들의 노력 덕분에, 백제란 나라는 '가도 아주 가지는 않은 나라'가 됐다.
우리는 흔히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탄생했다'고들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탄생했고, 백제가 망하고 일본이 탄생했다'고.
황산벌 전투가 백제의 패배로 확정되기 직전. 백제가 백기를 들고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 계백 장군의 눈에 비친, 또 의자왕의 눈에 비친 백제의 산천은 결코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백제'의 산천이 그들의 사후에 신천지 일본열도에서 활짝 열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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