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엄친딸'도 직접 헌팅에 나섰다 - 김종성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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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엄친딸'도 직접 헌팅에 나섰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 여섯 번째 이야기

11.10.06 15:58 ㅣ최종 업데이트 11.10.06 15:58 김종성 (qqqkim2000)

▲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이세령과 김승유. ⓒ KBS

KBS 수목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자유로운 연애 풍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경혜공주(홍수현 분)는 세대차 나는 개인교사들을 쫓아낼 목적으로 성희롱을 했고, 김승유(박시후 분)는 경혜공주를 가장한 이세령(문채원 분)에게 상당히 '진하게' 말을 걸었고, 마포 건달은 길에서 만난 이세령에게 아주 노골적으로 접근했다. 또 김승유는 이세령을 자기 말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표현이 웅변하듯이, 조선시대 연애풍속은 드라마처럼 자유롭지는 않았다. 요즘 TV 사극들에 나오는 시대 분위기는 다분히 현대인들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도 어떤 경우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펼쳤다. 그들의 적극성은 대담한 헌팅 문화에서 잘 드러난다.

 

김종서 손자도 '헌팅'을 해 결혼에 성공했다

 

조선 후기 서유영이 정리한 민담집인 <금계필담>은 선조·광해군 때의 정승인 심희수(1548~1622년)가 결혼에 골인한 과정을 전하고 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심희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고, 종전 후에 좌의정에 올랐다가 광해군 정권에 참여해서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심희수는 스물다섯 살 때 과거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그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필운대(바위 명칭) 근처에 한 여성이 살았다. 그는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전직 재상의 양녀인 그는 전형적인 '엄친딸'이었다.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바느질과 음식 솜씨마저 좋았다. '내 남자는 내 손으로'란 신념을 갖고 있는 그는 남편을 골라주겠다는 아버지를 만류하고, 필운대 근처의 작은 집에서 행인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러던 중, 스무 살 전후의 심희수가 그곳을 지나가자 얼른 집 밖으로 나가 말을 걸었다. "마침내 그를 불러들여 정을 통했다"고 <금계필담>은 말하고 있다. 한동안 열애하던 두 남녀는 심희수의 수험생활을 위해 몇 년간 헤어졌다가 그가 합격한 뒤에야 결혼에 골인했다.

 

참고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헌팅으로 만났을지라도 결혼할 때만큼은 반드시 중매를 거쳐야 했다. 산속에 숨어 살거나 세상과 담 쌓고 살지 않는 한, 중매 없이 결혼한 사람들은 지역 사회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필운대.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공주의 남자>의 실제 주인공인 김종서의 손자 역시 헌팅을 통해 결혼에 성공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김승유의 조카인 그는 충청도 보은군의 산길에서 수양대군(세조)의 딸을 우연히 만났다. 수양대군의 딸은 아버지의 잔혹한 살상에 환멸을 느끼고 유모와 함께 궁을 떠난 뒤 정처 없이 유랑하던 차였다.

 

쌀을 짊어지고 산길을 가던 김종서의 손자는 젊은 여성이 나이 많은 여성과 함께 길가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곧장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용기를 냈다.

 

"시골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시죠?"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낀 수양대군의 딸은 자연스레 남자의 처소를 따라갔다.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는데다가 상대방이 보통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에 그렇게 한 것이다. 1년 뒤에 그들은 결혼했고 그때서야 서로의 정체를 알고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금계필담>은 전하고 있다.

 

충주목사서 해임된 김예종이 절세미인 거절한 사연

 

헌팅은 성공 확률보다 실패 확률이 더 높다. 따라서 실패 사례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중기 유몽인이 정리한 민담집인 <어우야담>에는 선조 때 충주목사(충주시장)를 지낸 김예종의 경험이 소개되어 있다. '그릇이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충주목사에서 해임됐다고 선조 21년 7월 12일자(1588.9.2)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김예종이 수험생 시절에 겪은 이야기다.

 

김예종는 1552년에 소과(小科)인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564년에 대과인 문과시험에 합격했다. 이 시기에 한성 최고의 기생은 경상도 상주 출신의 성산월이었다. 그는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도도한 기생으로 유명했다.

 

어느 날, 성산월은 고위층 인사들과 함께 한강변에서 술을 마시다가 남자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소매가 반쯤 젖은 상태에서 숭례문(남대문) 앞에 당도했지만, 성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밤 10시가 지났던 모양이다.

 

성산월은 급한 김에 불 켜진 창문에 다가섰다. 창 안쪽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도 가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방 안의 남자에게 하룻밤을 부탁하기로, 아니 허락하기로 작정했다. 절반은 헌팅, 절반은 긴급피난이었던 셈이다. 그는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가볍게 노크를 했다.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젊은 선비가 바로 김예종이었다.

 

성산월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김예종은 '이런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비 내리는 한밤중에 웬 미인이 창문을 열고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헷갈렸던 모양이다. 자기한테는 이런 '행운'이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어떤 괴물 도깨비가 감히 사람을 현혹하는가?"라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성산월은 "왜 이리 풍류가 부족하십니까?"라며 밤새 간청했지만, 귀신이 자기를 유혹한다고 생각한 김예종은 문을 꼭 잠그고 밤새도록 벌벌 떨었다. 성문 열릴 시각(새벽 4시)이 되자, 성산월은 "넌 정말 복이 없는 남자!"라며 한바탕 욕을 퍼붓고 떠났다. 성산월도 김예종이 '그릇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유혹의 주체가 기생이고 상황이 급박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례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이성에게 접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예종이 성산월을 거부한 것은 그가 헌팅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남대문 밖의 빈촌에서 책 속에 파묻혀 지낸 김예종으로서는 비 내리는 밤중에 절세미인이 창문을 노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 남자방으로 직행한 처녀

 

▲ 1900년대 당시의 숭례문(남대문).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16세기 조선이 낳은 불세출의 개혁가인 조광조를 죽이는 데 가담한 심정이란 인물이 있다. 그의 손자이자 선조 때 좌의정인 심수경이 수험생 시절에 겪은 이야기가 <금계필담>에 소개되어 있다.

 

훗날 문과시험에 장원급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심수경은 머리가 매우 좋은 인물이었다. 거기에다가 외모까지 상당히 수려했다. 그런 그를 흠모한 처녀가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 처녀는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심수경의 글 읽는 소리를 경청하곤 했다.

 

어느 날 밤, 처녀는 남몰래 심수경의 집에 들어가 그의 방으로 직행했다. 인기척도 없이 방문을 열고는, 대담하게도 심수경의 책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낯선 처녀의 등장에 내심 놀랐겠지만, 처녀가 말없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심수경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책을 마저 읽었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야 누구냐고 물어보니, 처녀는 옆집에 사는 이웃이라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고관대작의 딸이었다. 처녀는 "도련님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왔을 따름"이라고 말했지만, 심수경은 재상집 처녀가 어찌 이리 부끄러운 짓을 하느냐며 한바탕 호통을 쳐서 처녀를 내쫓았다. 심수경이 화를 버럭 낸 것은 처녀의 행동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헌팅 자체에 격분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위의 사례들을 포함해서 조선시대 헌팅문화에 관한 각종 기록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헌팅을 시도하는 쪽이 상당히 직접적이라는 점이다. 오늘날처럼 길을 물어본다든가 물건을 떨어뜨린다든가 차 한 잔을 제의한다든가 하는 식이 아니라, 이성에게 곧바로 다가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또 하나는, 민담 속의 인물들이나 민담의 편찬자들이 헌팅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헌팅에 대해 유교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 헌팅이 아주 흔했던 것은 아니다. 유교적 가치관에 기초한 사회였기 때문에, 연애문화 역시 오늘날에 비해 경직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경직성의 정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그들도 어떤 경우에는 헌팅 같은 방식을 통해 이성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곤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였던 것이다.

 

고위층 자녀들 사이에서도 노골적으로 이뤄진 헌팅

 

조선시대 지배층은 성(性)을 철저히 구별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위의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심지어 고위층 자녀들 사이에서도 헌팅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 <공주의 남자>에서처럼 자유분방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도 어떤 경우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아주 솔직히 표현했다.

 

사실, 조선시대 문헌에서 남녀유별이 유별나게 강조된 것은 그만큼 그것의 실현이 쉽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불조심 표어가 많은 시대라고 해서 화재가 적은 시대라고 판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지배층이 남녀유별을 유난히 강조한 것은 그들이 '남녀무별'을 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사회체제는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사회체제가 본성을 지나치게 억압하면, 본성이 도리어 사회체제를 억누르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본성을 적절히 제어하면서도 적절히 살려줄 수 있는 체제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사회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맹자> '진심장' 편에서는 "요·순은 본성대로 하셨다"(堯舜性之也)고 했다.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군주인 요임금과 순임금은 인간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했다는 뜻이다. 통치자든 백성이든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체제가 가장 훌륭하고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이 문제는 인터넷을 통한 인간 본성의 분출 앞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 사회가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