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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경복궁은 물바다였다…왜?
이기환ㅣ스포츠경향 편집국장 겸 문화체육에디터 lkh@kyunghyang.com
입력 : 2012-02-08 11:28:43ㅣ수정 : 2012-02-08 14:26:37

“응? 웬 용이냐.” 1997년 11월, 경복궁 내 경회루 연못을 준설하던 이들이 재미있는 유물 하나를 건져냈다.

혀를 쑥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해학적인 형상의 청동용(龍)이었다. 조사단이 급히 <경회루전도>를 꺼내보았다.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는 경복궁이 중건되기 시작한 1865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학순(丁學洵)이라는 인물이 썼다는데 경회루의 건축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

■ 물바다가 된 경복궁 = 이 책을 보면 경회루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따라 (경복궁의) 불을 억제하려고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즉 경회루의 모든 구성은 숫자 6으로 이뤄졌다는 것. 무슨 말이냐. 음양오행으로 보아 음(陰)은 물(水)을 말하는데, 그 음의 대표적인 숫자가 6이라는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발견된 은제 육각판. 모서리마다 물 水자가 새겨져 있다. 경복궁을 화마에서 막아보자는 의미에서 새겨넣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회루 연못 안에 구리로 만든 용 두마리까지 넣었다. 그것이 바로 연못에서 건져낸 청동용이었던 것이다. 용은 ‘물의 신(神)’으로 알려져 있다. 가뭄 때 용에게 기우제를 지내고, 어민들은 풍어를 위해 용왕님께 제사를 지낸다. 또 불을 다스려 화재를 막아주는 신령스런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4년 뒤인 2001년 6월, 근정전 중수공사를 위해 종도리를 살피던 조사단의 눈이 반짝거렸다.

1867년 경복궁 중수가 끝났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梁文)이 발견된 것이다. 공사 담당자 156명의 명단과 흥선대원군의 업적 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조사단의 눈귀가 번쩍 뜬 까닭이 있었다.


龍자 100자를 빼곡히 새겨 물 水자로 만들었다. 용은 ‘물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물(水)과 용(龍)으로 도배한 부적 3점과 육각형판 5점 때문이었다. ‘용’ 부적의 목적은 분명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물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문제는 깨알같은 용(龍)자 1000여 자로 메워 쓴 수(水)자 부적이었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 있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육각형 은판 5점 역시 흥미를 자아냈다. 1점 당 폭 3.6㎝, 두께 0.25㎝의 육각형 은판의 모서리마다 물 수(水)자가 새겨져 있었다. 왜 육각형인가. 앞서 밝혔지만 물은 음양오행상 음(陰)이며, 음의 대표적인 숫자는 6이라니까.

“그런데 육각형 5점을 붙여보면 재미있는 글자가 됩니다. 물 水자가 3개 모여 묘()자가 되는 겁니다. 묘자는 ‘물이 아득하다’, 혹은 ‘수면(水面)이 아득하게 넓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은판을 싼 종이에도 묘()자를 써놓았다. 물 ‘水’자에 한맺힌 것처럼…. 그 뿐이 아니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을 세워놓았다. 해태는 물귀신을 뜻한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발견된 상량문. 물 水 부적 2장과 용이 그려진 부적 1장, 은제 육각형판 5점이 함께 발견됐다.

그러니까 화재를 막으려 경회루와 연못을 만들었고, 청동용에 해태, 그리고 갖가지 물(水)를 상징하는 부적까지…. 한마디로 말하면 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다. 왜일까. 흥선대원군은 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경복궁을 ‘물바다’로 조성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불(火) 때문이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의 관악산 전경. 그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

■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아라! = 1394년(태조 2년) 창건된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었다. 하지만 불에 민감한 팔자를 타고 난 것일까. 차천로(車天路)의 <오산설림(五山說林)>은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벌인 경복궁의 위치논쟁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한양의 진산을 인왕산으로 잡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합니다.”(무학대사)

“아닙니다. 동쪽을 향해 앉으라니요. 자로로 제왕은 남면(南面·남쪽을 향해 앉아 다스려야 한다는 뜻)해야 합니다.”(정도전)

정도전이 난색을 표하자 무학대사가 장탄식했다.

“아아!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은제 육각판을 싼 종이에는 묘()자를 새겨넣었다. 물 水자를 3개를 합친 글자이다.
 
무학대사가 걱정한 까닭이 있었다. 경복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악산 때문이었다. 관악산은 얼핏 보아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상 관악산은 불의 산이다.

그 불의 산으로부터 뻗어나는 화기(火氣)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됐다. 이름도 숭례문(崇禮門)이라 지었다. 예의를 숭상한다는 뜻도 있었지만, ‘례(禮)’자는 오행(五行)으로 치면 ‘화(火)’를 일컬었다. 또 오방(五方)으로는 남쪽을 나타냈다. 이 숭례문의 현판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세운 것도 바로 관악산의 화기 때문이었다.

즉 나무나 종이를 태울 때 잘 타라고 세우는 게 보통이다.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운 까닭이다. 세로로 세워놓음으로써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것을 ‘이화제화(以火制火)’라고 할까. 어쩌면 현판을 세로로 세웠으니 ‘자 관악산이나 활활 타라’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 불바다가 된 경복궁 = 하지만 소용 없었다.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은 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강녕전, 사정전, 흠겸각이 불탔고 각종 금은보화와 왕·왕비의 고명과 의복, 거마가 잿더미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또 한 번 불바다가 된다. 파죽지세로 쳐올라가던 왜군이 평양성 전투 패전 이후 퇴각하면서 벌어진 참화였다. 왜군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운 뒤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다. 무학대사가 예상했다는, 바로 그 200년이 지난 것이다. 경복궁은 그 뒤 270년이 지나도록 중건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급기야 1865년 황폐화 한 경복궁을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무너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첩첩산중이었다. 공사비를 조달하지 못해 200여 일이나 공사가 중단됐다.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고육책을 썼지만 민심을 잃었다.

가뜩이나 힘든 대원군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잇단 화재였다. 화재방지를 위해 갖가지 방책을 세웠지만 화마는 끊이지 않았다. 중건 6년 만인 1873년 12월 자경전·교태전·자미당에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경회루 연못에서 출토된 청동 용(龍). 경회루 자체도 주역(周易)의 원리에 좇아 불을 억제하기 위해 조성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연못에 물을 상징하는 청동용을 넣었다.

■ 중건으로 파탄난 국고 = 이를 다시 고치기 위해서는 무려 30만냥의 비용이 필요했다. 하지만 돈이 부족했다. 급기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最應·1815~1882)이 나섰다. ‘제발 임금이 좀 솔선수범하라’는 요지의 충언을 올린다.

“재정이 고갈됐습니다.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전각(자경전·교태전·자미전)을 중건하는데 경비가 이미 바닥났고, 내탕고(왕실의 곳간)도 텅비었습니다. 전하께서 절제하고 소박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경복궁을 화마로부터 막기 위해 조성한 경회루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공사가 재개됐다. 2차 중건은 15개월이 지난 1875년 3월이 돼서야 끝났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화마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끝까지 괴롭혔다. 17개월 후인 1876년 11월 또디시 대형화재가 경복궁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교태전 등 무려 830여간이 전소됐다. 기사 내용만 봐도 얼마나 큰 화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났다. 830간이 잇달아 불길에 휩싸였다. 화재가 갑자기 일어나 불기운이 매우 빨랐다. 순식간에 여러 전각이 몽땅 재가 됐다. 열조의 어필과 옛 물건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대보와 세자의 옥인 외에 모든 옥새와 부신(符信·신표)이 불탔다.”

그로부터 132년이 지난 2008년 2월 이맘 때, 숭례문이 불탔다. 그나마 경복궁이 불타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둔 덕분일까. 숭례문이 관악산의 화기를 고군분투하면서 막아낸…. 그래서 불행중 다행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풍수학의 개가인가? 모두 아닐 것이다.


근정전에서 발견된 용 부적. 용은 ‘물의 신’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어느 풍수가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풍수요? 그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몫을 할 뿐입니다. 우선 민심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모든 위험을 막아내는 예방조치를 마련해야죠. 풍수만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국고를 탕진해가면서, 민심의 이반을 읽어내지 않고 강행한 경복궁 중건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듯 하다. 그러고 보니 숭례문이 불탄지 4년이 지났다. 너무 오래된, 잊혀진 역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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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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