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3746.html

조선은 ‘외교의 힘’으로 왜구 막았지만…
[한겨레] 등록 : 20120106 19:56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⑧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 (Ⅲ)

» 19세기 초에 그려진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일부. 조선후기 조-일 교섭의 창구였던 동래에서 동래부사가 일본 사절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습. 조선은 15세기 초, 왜구들을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담을 안게 되었다. 왕래하던 일본 사절들은 때때로 조선의 접대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왜구 계기로 조·일간 통교 시작
포로송환하면 선물 하사하자
일본 유력자 앞다퉈 왜구 금압

“왜인들이 우리 변경을 침탈했으니 그 죄를 다스려야 마땅한데, 전하께서 아량과 덕을 베풀어 왔습니다. 사신을 통하고 무역을 허락하니 마음으로 기뻐하고 지성으로 복종해 와서 예물 바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익을 탐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어 배에서 내리자마자 물건을 요구하고, 지나는 고을에서 표독한 짓을 자행하여 칼로 백성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약탈하니 부도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인이 왕래하며 죄를 범하면 대명률(大明律)로 다스리소서. 살인한 자는 법에 따라 처단하고, 칼로써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곤장 80대와 유배 2년에 처하고(…) 재물을 빼앗은 자는 곤장 1백대와 유배 3년에 처하소서.” 1414년(태종 14) 9월, 형조에서 올린 보고의 내용이다. 조선이 일본인들의 왜구 행위를 막으려 국교를 열고 무역을 허용했던 사실, 일본인들도 그에 호응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던 사실, 또 왕래하는 왜인들이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사실 등이 생생하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조선왕조 또한 개국 직후부터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심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승려 각추(覺鎚)를 무로마치(室町) 막부에 보내 왜구를 금압해달라고 요청했다.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왜구들에 대한 통제와 잡혀온 조선 포로들의 송환을 약속하고 승려 수윤(壽允)을 조선에 회답사로 파견한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또한 이렇게 왜구 문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또한 큐슈의 실력자인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과도 활발히 접촉했다. 이마가와 료순은 1394년 7월, 조선인 포로 659명을 돌려보내며 왜구를 금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료순은 1395년에도 포로 570여명을 송환했다. 조선은 감사 사절을 보내 그의 공로를 치하하고 토산물과 대장경 등을 선물로 주었다.

왜구 금지를 약속하고 포로들을 돌려보내자 조선 조정이 대장경을 비롯한 선물을 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다른 지역의 유력자들도 자극을 받게 된다. 큐슈는 물론 잇끼(一岐)와 하까다(博多) 방면의 유력자들도 왜구 금압을 내세워 조선과의 통교 교섭에 나서게 된다. 큐슈의 또 다른 유력자였던 오우찌(大內義弘)는 1395년 이후 조선에 사절을 잇따라 보내 토산물을 헌상하고 왜구를 금압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 조정이 반색하자 그 또한 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했다. 왜구 금압과 포로 송환을 내세워 대장경을 비롯한 조선의 하사품을 맞바꾸는 형태로 교섭이 진전되었던 것이다.

1404년(태종 4) 7월,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승려 주당(周棠)을 조선에 보내 빙문(聘問)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국서에서 스스로를 ‘일본 국왕’으로 칭했던 점이다. 과거 천황을 의식하여 고려나 조선에 보내는 국서를, 외교를 담당하는 승려의 명의로 작성해 보냈던 것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이다. 이것은 조선과 막부 사이에 정식으로 국교가 성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은 이후 막부 장군이 보낸 사신을 국왕사(國王使)로 대접했다. 16세기 중엽까지 모두 60여 차례 국왕사가 조선을 찾았고, 조선 또한 1473년까지 통신사(通信使)라는 명목으로 막부에 사절을 파견했다.

일대다 외교·귀순책 성공했으나
사절·향화인 늘자 접대·통제 부담
10곳의 사절만 받는 등 대책 마련

» 해미읍성(海美邑城) 진남문(鎭南門)의 모습. 조선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국의 주요 연안 지역에 성을 쌓았다. 태종 연간에 축성된 해미읍성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소재. 문화재청 누리집

왜구 회유책의 빛과 그림자 

조선왕조가 왜구를 제어하기 위해 주로 사용했던 대책은 회유책이었다. 조선은 막부 장군 이외에도 큐슈를 지배하는 탄다이(探題) 및 대내씨(大內氏), 소이씨(少貳氏) 등 여러 다이묘(大名)들과 통교했다. 또 쓰시마, 잇끼, 마쓰우라 등 변경의 유력자들과 하카다(博多)의 상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들과 교섭하면서 왜구를 통제하고 그들을 평화적인 교섭자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들 일본의 여러 세력들은 대장경이나 불전(佛典)의 획득, 사찰 건립 비용의 청구, 조선으로부터 하사품 수수, 무역 이익 확보 등을 목적으로 활발하게 조선을 왕래했다. 요컨대 하나의 조선 조정이 국왕사부터 상인에 이르는 다수의 일본 세력을 상대하는 ‘일 대(對) 다’의 모습이 조일관계의 특징이었다.

조선은 또한 왜구 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있는 쓰시마 등 변경에 사는 왜인들의 귀순을 장려했다. 그들이 귀순할 경우 남해안 등지에 거주할 수 있는 토지와 가옥을 주고 결혼을 알선해 주었다. 또 식량을 제공하고, 조선인과 자유롭게 무역하거나 어로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하여 생활 대책도 마련해 주었다. 이 같은 우대책에 따라 귀순한 왜인들을 보통 투화왜(投化倭), 향화왜(向化倭)라고 한다. 조선은 또한 표류민을 송환하는 등 공을 세운 왜인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 이들을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부른다.

왜구를 금압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된 조선의 회유책은 분명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과거 같으면 왜구가 되어 조선을 노략질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인들이 사송왜인(使送倭人), 흥리왜인(興利倭人) 등으로 불리는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이 감당해야 할 부담 또한 커질수밖에 없었다. 태종 초년에 이르면 경상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향화인들의 수가 2천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빈번하게 왕래하는 다양한 사절들을 접대하는 데서 비롯된 폐단과 부담 또한 대단히 컸다. 국왕사를 비롯하여 유력자들이 보낸 사절들은 올 때마다 거의 매번 대장경을 비롯한 불구(佛具)의 증여를 요구했다. 뿐 만 아니라 유력자들이 보내는 무역선들을 일일이 접대하고 교역 요구에 응해주는 것도 큰일이었다. 1414년 8월에는 울산에 모여 있던 일본인 사절 105명이 칼을 뽑아 들고 난동을 벌였다. 자신들이 요구한 범종(梵鐘)을 제 때 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같은 달 김해에서는 대내씨가 보낸 사절 30여 명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접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객사에 들이닥쳐 김해부사의 인신을 짓밟고 옷을 벗겨 칼로 찌르려고 시도했다.

접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잇따르자 조선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1414년 태종은 쓰시마의 실력자 소오 사다시게(宗貞茂)에게 조선에 왕래할 수 있는 유력자들의 범위를 제한하겠다고 통보했다. 국왕사와 대내씨, 쓰시마를 비롯하여 10곳의 사절들만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예조판서 황희(黃喜)는 “왜인들은 귀순과 기만을 반복하여 신뢰할 수 없다”며 군사적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태종은 해도찰방(海道察訪)을 각지에 보내 지방의 군사력과 무기 등의 실태를 점검했다. 병선, 성곽 등의 관리와 수리 상황을 감찰하고 군무를 소홀히 한 수령들을 엄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요컨대 조선은 태종대 무렵에 오면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수많은 통교자들을 ‘평화적으로’ 접대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이에 조선이 꺼내든 ‘카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쓰시마를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대일외교의 창구로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자의 카드가 실패했을 때 조선은 쓰시마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하게 된다. 

명지대 사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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