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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사명대사는 왜 "조선의 보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목"이라 했을까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10.17 13:16 수정 : 2019.10.17 16:24
사명대사 유정의 초상화. 화면 왼쪽 위에 ‘널리 세상을 구하는 스님’이라는 뜻의 사명대사의 시호인 ‘자통홍제존자’에서 나왔다. ‘송운’은 사명대사의 별호이다. |동국대박물관 소장
“승장 유정의 정예병이 왜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여러번 세웠다. 그렇지만 속세를 떠난 유정이 군직(軍職)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파격적인 상을 내려 훗날의 공효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정에게는 당상관(堂上官·정 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 1593년(선조 26년) 4월 12일 선조가 승병장인 사명대사 유정(1544~1610)에게 “당상관(정 3품 이상)의 상급을 내리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내용의 <선조실록> 기사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사관이 붙인 평가가 폐부를 찌른다.
“전란을 당해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
<실록>의 사가는 쉰살이 된 사명대사의 분전을 인용하면서 임진왜란 때 도망가기 바빴고, 두려움에 떨기에 급급했던 무사는 물론 조정대신들까지 싸잡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은 사명대사가 ‘중생을 구하라’는 스승 서산대사(1520~1604)가 남긴 뜻에 따라 일본에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행(使行)의 목적이 포로송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고쇼지 소장
■‘당상관으로 예우하라.’
대체 사명대사의 공훈이 얼마나 컸기에 임금이 나서 당상관의 예우로 대접했을까. 졲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1598) 때 의승군(義僧軍)을 이끈 승병장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물론이고 조정의 명망대신들까지 줄행랑 쳤다. 그럼에도 초야에 묻힌 선비와 백성들은 물론이고, 속세를 떠난 스님들까지 분연히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의 사명대사 행적은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진다.
먼저 유몽인(1559~1623)의 야담집인 <어우야담>을 보자.
임진왜란 때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었다. 그런데 왜병들이 금강산에 들이닥치자 사명대사는 다른 스님들과 함께 깊은 골짜기로 피난했다. 이때 왜적들이 유점사를 약탈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스님 10여명을 묶어두고 금은보화를 뒤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자 왜적들은 스님들을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명대사는 다른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점사로 달려가 왜병들이 총칼을 들고 도열해있는 길을 유유히 통과했다.
단숨에 법당까지 올라간 사명대사가 왜장들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기웃거렸다. 어이가 없어진 왜장들이 “뭐하는 거냐. 빨리 이 절에 있는 금은보화를 내놓아라”고 윽박질렀다.
사명대사는 이때 “불법은 살생을 하지않고 자비를 전부로 하고 있는데 죽인다는게 말이 되냐”면서 “마을을 돌며 걸식하고 사는 스님들이 무슨 금은보화가 있겠냐”고 오히려 큰소리 쳤다. 대사의 언성에 기가 죽은 왜장이 묶여있던 스님 20여명을 풀어주었다. 스님들을 구해낸 사명대사는 소매를 떨치고 지팡이를 끌며 절을 나섰는데, 이때 왜장들은 “이 절에는 도를 아는 고승이 있으니 모든 장병은 다시는 절에 들어가지 말라”고 명했다.
<어우야담>의 작자인 유몽인은 사명대사와 동시대인이다. 당대 민간에서 사명대사가 신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의 <서애집>은 약간 버전이 다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들이 난입했는데도 금강산에 있던 사명대사가 꿈쩍도 않고 홀로 가부좌하고 앉아있었다. 이를 본 왜병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빙 둘러서서 합장을 하고 존경에 마지 않으며 철수했다. 이후 왜병들은 유점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사명대사의 유묵.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는 임진왜란부터 10년간 사명대사의 감회가 담긴 시다. 일본에서의 사명을 잘 마무리 지은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간다는 사명대사의 의지가 드러난다.|일본 교토 고쇼지 소장
■“선승의 참뜻은 백성 구제에 있다”
사명대사는 스님 몇 명을 구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가만히 금강산에 앉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사는 “나라와 백성을 등지고 세상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불자의 도리는 아니며, 산중에서 세속 티끌을 떠나 마음을 닦는 선승의 참뜻은 세상의 뭇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것”이라 믿었다.
선조 임금의 피란소식을 들은 사명대사가 통곡하며 남겼다는 글이 있다.
“국왕의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궁성이 텅 비고,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길 가운데서 헤맨다. 해는 저물고 요동은 멀어 어느 곳인고. 초의(승려 자신)가 머리를 돌이키니 눈물이 그지 없다.”(<사명대사전집>)
그러나 마냥 통곡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명대사는 “혈기있는 자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거늘 비록 이 몸은 산승이지만 조금은 지각있는 자인데 어찌 보고만 있느냐”(<분충서란록>)고 다짐했다. 대사는 여러 스님들에게 “지금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울 때를 만나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고 설득하며 승병을 모았다. 사명대사가 모은 승병은 처음엔 210여 명 정도였지만 류성룡(1542~1607)의 <서애별집>을 보면 1000명 정도로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못난 임금을 ‘미인’이라 칭하고…
1592년(선조 25년) 10월 승병을 이끌고 순안(평안도 평원)으로 달려간 사명대사가 남긴 다짐을 보라.
“왜적이 잇달아 덤벼 백성들을 어육으로 만들고 길가에 송장이 서로 베고 있네. 통곡하고 다시 통곡하니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다. 미인(국왕)을 하늘 한 끝에 바라보네.”(<사명당대사집>)
대단하지 않은가. 전쟁이 나자 맨 먼저 줄행랑쳤던 임금을 ‘미인’이라고 일컬으면서 충성을 다짐하는 모습이…. 비단 사명대사 뿐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도 의병의 기치 아래 모였으니 이런 착한 백성들이 어디 있는가.
사명대사는 다음과 같은 시도 남긴다.
“10월에 상남(湘南)을 의병이 건너가니 나팔소리 기(旗)의 그림자 강성을 진동한다, 칼집 속 보검은 밤중에도 울부짖네. 원컨대 요사(왜병)를 베어 성명에 보답코자….”(<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는 순안에서 스승인 서산대사(1520~1604)의 부장이 되어 군량을 마련하고 제반 병기를 손질한 뒤 전장에 나가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조정은 사명대사에게 절충장군과 함께 팔도의승군 부총섭의 직함을 내렸다. 그 이야기가 맨처음 인용한 1593년 4월12일 <선조실록> 기사이다.
사명대사는 승병 2000여 명을 거느리고 대동강 남쪽으로 건너가 왜적의 통로를 차단한 뒤 1593년(선조 26년) 1월 벌어진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명나라 군과 함께 모란봉의 적진을 향해 진격하여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적병 2000여명을 죽였다.(<건봉사 사적비문>)
사명대사가 일본 승려 엔니에게 ‘허응’이라는 도호를 지어주고 써준 글씨. |고쇼지 소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사명대사의 또다른 공적은 적진에 뛰어들어 왜장하고 담판을 지은 것이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1594년(선조 27년) 왜군은 서생포(울산)과 거제도. 웅천(창원) 사이 여러 곳에 왜성을 쌓고 지구전에 대비했다, 전쟁은 바야흐로 소강상태에 빠진 것이다. 사명대사는 당시 세수 51세였는데, 군량미 충당을 위해 승병을 동원해서 땅을 갈고 보리를 심었다.
그 사이 명나라와 왜 사이에 강화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강화협상은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 사이에 진행됐다.
이무렵 사명대사는 도원수 권율(1537~1599)과 명군도독 유정(?~1619)의 지시에 따라 서생포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진영에 4차례나 들어가 회담했다.
이 때 왜군진영에서는 명나라와 왜 사이에 추진되던 강화조약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사명대사는 그 내용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다. 그 조건이란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과 예전처럼 교린할 것, 조선 땅을 떼어줄 것과 조선의 왕자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이었다.
■사명대사에게 글을 받아간 가토
이런 조건을 들은 사명대사는 불가한 이유를 조목조목 대며 “말도 안되는 조건”이라고 비판했다.
“…조선땅을 떼어 일본에 준다고? 일본이 명분없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조선의 땅을 짓밟고 생령을 도탄의 지경에 빠뜨려서 중국 황제까지 지원군을 보내 3년간이나 싸웠다. 그런 마당에 땅을 떼어줄 리가 있는가…또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낸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에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서는 “명나라와 일본의 조약이 깨지면 일본군사는 다시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직행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조선백성들은 한꺼번에 굶어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렇지만 사명대사는 “우리 조선은 예와 의에 죽고사는 나라다.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와 일본의 화약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사명대사가 그렇게 굴하지 않고 할말을 다 하자 가토 기요마사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토는 “내가 함경도에 있을 때 ‘강원도 금강산에 귀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대사가 바로 그 분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만나주니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했다.
사실 가토 기요마사는 ‘악귀’라는 별명에 맞게 흉악무도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자가 종이와 부채를 여럿 가지고 와서 사명대사의 글씨를 받아갔다. 이에 사명대사는 가토에게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으니,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正其誼而 不謀其利 明有日月 暗有鬼神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고 써주었다.
한마디로 “남의 땅을 탐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럼에도 왜병들은 사명대사의 글을 받아가느라 줄을 섰다. 사명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으로 일어난 나라는 멸망하는데, 일본은 스스로 그 멸망을 취하고 있다”면서 “조선과 명나라군이 합세했으니 너희 군사들쯤이야 담소하면서 막아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사명대사의 친필. 신라말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시 중 두 구절이다. |고쇼지 소장
■“그대가 환속하면 지방장관 시키겠다”
사명대사는 1594년(선조 27년) 9월 선조에게 ‘적을 치고 백성을 보전하기 위한 글’을 올렸다.
대사는 이 상소문에서 적진의 상황 등 보고한 뒤에 “허락하신다면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달려나가 왜적을 몰아낼 것이고, 혹시 사절단을 따라 강화회담에 나서라고 하면 반드시 그 일을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대사의 충정에 감읍한 선조는 “유정은 다른 중과 다르다, 유정을 차비문(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편전의 앞문)에 불려들여 모든 것을 묻겠노라”는 특명을 내렸다.
“유정은 스님인데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하는데 공을 세웠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과 담판을 짓고 있다. 이야말로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땅히 후한 상급을 내려라.”(<분충서란록>)
실제로 선조는 사명대사를 ‘차비문’으로 불러 시시콜콜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그대는 선비 가문인가. 송운(사명대사의 호)의 이름은 별호인가. 왜란전에는 어느 절에 있었는가. 묘향산의 휴정(서산대사)과는 벗인가 혹은 사사하는가…지금 국세가 급급한데 어떻게 흉적을 소탕하겠는가. 그대가 거느린 군사의 군량과 무기는 어디서 구하는가….”
선조는 그러면서 “형세가 어려운 지금 그대가 환속한다면 지방장관의 중임을 맡겨 장수로 삼을텐데 어떠냐”고 물었다. 사명대사 같은 고승에게 환속 운운했으니 참 딱한 임금이다. 하기야 얼마나 인재가 없으면 그랬겠는가.
선조의 폭포수 같은 질문에 사명대사가 대답을 했을 터인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와 관련 사명대사의 사적을 기록한 <분충서란록>의 편찬자인 신유한(1681~?)은 “왕이 이토록 대사를 융숭하게 여겼는데 사명대사의 대답이 볼 만 했을 텐데 병란 중에 이런저런 문서가 소실되어 버렸으니 알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목‘
이밖에도 선조가 “유정(사명대사)이 어디 있느냐”고 다급하게 찾는 기사도 등장한다.
“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 사람은 비록 중이기는 하나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다. 유정은 영남 사람이니 영남으로 내려 보내어 원수(元帥)의 결제를 받게 하는 한편,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한쪽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국사에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후하게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1596년 12월5일)
아무튼 가토 기요마사의 담판 중 마지막 4차의 일화가 엄청 유명하다.
가토 기요마사를 사명대사에게 “그대 나라의 보배는 무엇이냐”고 묻자 사명대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나라엔 보배가 없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머리니까….”
가토가 그 무슨 이야기냐고 묻자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했다.
“난리가 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우리나라 형편에 보배가 어디 있는가, 오직 그대의 목이 하나 있으면 조선은 전쟁없이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문>)
다른 버전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대의 목에 천근의 금과 만가구의 읍을 상으로 걸어놓았으니 어찌 보배가 아니겠느냐“고 했다고도 전해진다.(<지봉유설> ‘송운사적’)
“자순불법록”은 고쇼지를 창건한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이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고쇼지 소장
■‘설보대사가 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명대사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선조는 1604년(선조 37년) 스승 서산대사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던 길에 “일본에 가서 그 나라 실정을 상세히 탐지하고 그들의 강화 속셈을 알아보라”는 선조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실록을 쓴 사관은 “조정에 얼마나 자모가 없기에 왜적의 사신 하나를 감당못해서 어쩔 줄 몰라하느냐”면서 “사명대사가 아니고는 국가의 긴급대사를 맡을 사람이 그렇게 없느냐”고 한탄했다.(<선조실록> 1604년 2월24일)
일리 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특별히 사명대사를 사신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유정은 왕년에 여러번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출입해서도 대언(大言·큰소리)으로 굽히지 않아 가토 기요마사가 매우 존경했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기요마사는 사명대사의 사람됨을 칭송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왔다가 도망쳐온 조선사람들까지 ‘송운(사명대사의 호)의 이름이 일본인들 사이에 자자하다’고 했다. 그래서….”(<선조실록> 1604년 6월 8일)
또다른 이유도 있었다. 조선 조정은 사실 일본의 속셈을 몰랐다. 일본이 재침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유정(사명대사)이 대마도로 가면 일본 본토로 가자고 협박할 것인데…만약 그들이 협박하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명대사라면 ‘대마도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것이고 그 외에는 산승(사명대사)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사명대사라면 협박당해도 다만 죽을 각오로 완강히 거절하여 국가에 치욕을 남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선조실록>)
무슨 뜻인가. 조선정부를 대표하는 관리를 공식 사절로 보냈다가 일본 외교의 농간에 놀아날 경우를 대비해서 ‘산승’, 즉 사명대사를 보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명대사는 이런저런 이유로 전후처리를 위해 대마도로 향했다. 그런다음 약 3~4개월 후인 그해(1604년) 12월27일 도쿄에 닿았다. 대마도에서는 전후처리를, 일본 본토에서는 끌려간 포로의 송환문제를 매듭짓는 중차대한 길이었다.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보자 “설보(說寶)화상이다. 저 스님이 설보화상이다”라고 환영하며 존경했다. ‘설보화상’이란 지난날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서 기요마사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라고 한 것에서 비롯됐다. 일본인들은 ‘보배를 그렇게 멋지게 설명한 스님이 어디있냐’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것이다.
결국 사명대사는 1605년(선조 38년) 3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성립시켜 조선 조야의 근심을 없앴다. 특히 일본에 잡혀갔던 3000여 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사실 조선 조정은 1605년(선조 38년) 5월4일까지만 해도 “일본에 간지 10개월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망연하다”(<선조실록>)고 초조하게 사명대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과 8일 뒤인 12일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쇼 요시토시)가 “화해를 허락해 주셔서 그 감격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답서를 조선에 보냄으로써 보냄으로써 조선-일본간 화의가 이뤄졌음을 알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선보이는 사명대사 유묵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15일부터 11월17일까지 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 일본 교토(京都)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 6점을 400년 만에 국내 최초로 특별공개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 유묵은 ‘벽란도…’외에도 한시 2점(‘최치원의 시구’)과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 ‘승려 엔니에게 지어준 도호’,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등이다. 모두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후 처리와 포로협상 등을 위해 1604~05년 일본에 갔을 때 교토에서 남긴 유묵들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전시회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백성을 구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한 사명대사의 뜻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참고자료>
채상식, ‘사명대사의 일본행과 이에 대한 양국의 태도’, <한국민족문화> 27, 부산대 한국민족연구소, 2006
김영태, ‘사명대사의 생애’, <불교학보> 8,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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