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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尹斗壽)
최종 확인 버전: 2015-02-15 16:52:30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인이자 성리학자, 작가, 시인이며, 서인의 일원이다. 그리고 원균과 함께 당대 조선의 양대 병신 본관은 해평, 자는 자앙, 호는 오음,[1] 시호는 문정이다. 동생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와는 콤비를 이룬다.
국보급 문화재를 그린 후대의 인물인 윤두서와 헷갈리지 말자. 그 분은 원균을 찬양한 적이 없다. 실례가 되지 않도록 하자.
1. 생애
1.1. 출생부터 임진왜란 전야까지
윤두수는 1533년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육신의 인척으로 고조부 이후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지 못했으나,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가 정1품 벼슬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묵암 성혼을 만나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으며, 이때의 영향으로 후에 붕당이 형성될 때는 서인을 택하게 된다.
그 뒤 이중호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수학하다가 안동 도산의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된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다른 동문인 박승임, 류성룡 등은 동인이 되나 그는 서인을 선택하게 된다.
친척이 되는 원균과도 친밀하였다. 원균은 친척이 되는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하였다.
1555년 3월 생원시에 급제하고, 1559년 5월 정자, 1560년 저작, 1561년 9월 부수찬, 10월 병조 좌랑을 지냈다. 11월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12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62년 4월 다시 사간원 정언, 5월 홍문관부수찬, 7월 다시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562년 10월 이조 좌랑을 거쳐 이후 이조정랑이 되었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이량이 그의 아들 정빈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 기대승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에 그해 8월 대사헌 이감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해 9월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 등의 상계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 수찬에 다시 서용되었다.
그 뒤 사헌부장령을 거쳐 1563년 9월 수찬, 10월 이조정랑, 1564년 7월 의정부 검상, 10월 사헌부 장령, 1565년 1월 이조좌랑, 3월 홍문관 부응교 등을 지냈다. 이후 명종 말엽 윤원형, 심통원 등의 외척들을 탄핵하여 몰락시켰고, 그뒤 사복시정, 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1566년 1월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를 지냈다. 이때 사람을 살해한 종실 경양군 이수환 사건의 위관으로 참여하였다.
1566년 8월 좌부승지, 윤 10월 우승지를 거쳐 1567년(명종 22) 자전이 살아있는데도 경솔하게 상례를 논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그해 3월 형조참의를 거쳐 4월 다시 우승지가 되었다가 명종의 임종을 지켰다. 1567년(선조 즉위년) 11월 대사간, 1568년(선조 1) 8월 우승지 등을 지냈다.
1574년 8월 문과의 고시관의 한명으로 과거 시험 주관에 참여하였고, 9월 대독관에 임명되었다. 9월 병조로부터 함부로 정계 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1575년의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되자 그는 동문인 김효원 등을 따르지 않고 이이, 심의겸, 성혼을 따라 서인에 가담하였다.
1576년(선조 9) 7월 사간원대사간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선발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으나 이후 이종 사촌동생인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1579년 3월 파직당했다.
1579년 복직되고 그해 대사간 김계휘의 주청으로 다시 기용되어 연안부사가 되었다.
1581년 3월 황해감사의 서장에 의하여 재령군수 최립 등과 함께 구황을 잘하였다 천거받고 선조로부터 옷 한벌을 상으로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부 좌윤·오위도총부 부총관·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6월 통정대부 수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그해 7월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우후를 무단으로 잡아들여 벌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당하고 추고받았다. 1588년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589년 호조판서를 거쳐 평안감사가 되고, 1589년 정여립의 대동계 사건이 확대되어 기축옥사가 터지고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고 집권하자 다시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내직에 돌아왔다. 그뒤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홍순언, 황정욱 등과 더불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를 변무하고 돌아왔다.
1590년 종계변무에 성공한 공으로 광국공신 2등관에 서훈되고 해원군에 봉하여졌다. 이후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1591년 1월 사헌부대사헌, 2월 호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 재직 중 왕세자 책봉 문제로 벌어진 동인과 서인 간의 당파싸움인 건저문제로 이산해 등과 함께 신성군을 지지하기로 했으나 광해군을 지지하는 문제로 선조의 진노를 사서 호조판서로 임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윤근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어 회령으로 유배를 갔다.
그뒤 동인계열의 계속된 탄핵으로 배소가 옮겨져 홍원으로 이배되었다. 그해 10월 공이 적지 않다는 왕명으로 근도로 이배되었다가 11월에 방면되었다.
1.2. 임진왜란 때부터 말년까지
이제부터 읽어보면 알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도대체 한 게 없다.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피난가는 선조를 호송하여 어영대장과 5월 우의정, 약방 도제조, 좌의정으로 연달아 승진한다. 이때 그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며 조선만의 힘으로도 능히 일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며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과 개성을 연달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한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평양을 사수하려 했으나 개발살 나고 만다(...).[2]
어가를 따라 피난길에 오르던 중 평양에 있을 때 홍순언 등의 명나라에 대한 구원병 파병요청 주장을 반대하고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 요청을 전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윤두수는 급히 쫓아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으며 부디 망명 요청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3]
이어 함흥피난론이 나왔으나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는데, 과연 함흥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월경을 준비하자 상소를 올리고 직접 막는 등 선조의 랴오둥 피난을 막았다. 월경을 하면 안된다는 건 자체는 당시 조정 신료들의 공통된 의견이였고 여기까지는 그래도 어찌어찌 그냥 넘길 수 있는 수준이지만...
임진왜란 기간 중 그는 원균을 옹호하였다.[4] 1593년(선조 26)에 삼도체찰사를 겸하게 되고, 1595년 해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뒤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임진왜란 중 원균과 이순신이 갈등할 때 원균의 손을 들어주었는데,[5]동생 윤근수와 함께 원균은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뭐하자는 지거리야?!)[6] 다만 윤두수가 강도높게 이순신을 공격하고 모함한건 사실이지만 윤두수가 서인이라 동인의 비호를 받는 이순신을 모함한게 아니라 애초에 선조가 일관되게 원균을 추켜세우고 이순신을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자 다른 신하들과 함께 선조의 뜻에 따른것 뿐으로 윤두수 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의 대부분의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이순신을 모함하고 원균을 옹호했다. 애초에 이순신을 옹호한 인물은 정탁과 이원익 정도가 전부로 심지어 실록의 기록을 보면 류성룡마저 이순신의 모함에 편승하는 듯한 어감도 보인다. [7]사실 윤두수의 이순신 모함은 당쟁적 시각보다는 신하들이 왕의 강경한 원균중심에대한 태도에 부화뇌동했다고 보는것이 옳다. 실제로 윤두수의 정적인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또한 이순신에 대한 태도가 윤두수와 똑같았다.
1594년 9월 윤두수는 자신의 주도 하에 장문포 해전을 기획하고 무리하고 밀고 나가지만, 결과는 누구나 알다시피 망했어요. 이에 윤두수는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적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고 말았다. 후에 1595년초 판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597년 일본이 명나라와의 화의 조약을 깨고 조선을 재침공하였다. 이무렵 선조는 이순신을 불신하고 있었다. 1597년 1월 27일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위급할 때는 장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파직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게 정말 어이 밥말아먹은게 뭐냐 하면 자신이 몸소 조사를 해서 강하게 주장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윤두수는 그런거 없고 그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속아넘어간 김응서의 말만 곧이 곧대로 듣고 저렇게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병신인게 윤두수였다. 강력한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멍청한 아군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정유재란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에 물러났다. 그해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1599년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동인들이 반대하므로 곧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출입하였다 1601년에 병사하였다.
사후 1605년(선조 38) 선조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한 자들을 포상할 때 호성공신 2등관에 추서되었다. 삽질만 한 주제에 과한 대접을 받았다.
2. 평가
파평 윤씨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해평 윤씨다. 해평 윤씨들은 자기들도 헷갈리는지, 윤두수 이야기 나오면 윤씨 까지 말라며 윤봉길이나 윤관 이름을 대는데, 그 위인들은 해평 윤씨가 아니라 파평 윤씨로 엄연히 본 자체가 다르다.
연좌가 없어진 시대에 조상이 누구였냐가 큰 의미를 가지진 않지만(물론 매국유산문제를 청산하지 않은 친일파 후손은 예외다!) 그렇다고 남의 조상을 자기 조상이라며 우기는 동북공정스러운 짓거리는 하지 말도록 하자.
일각에서는 이 사람이 너무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며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지만, 이 사람도 사실 그 친척 뻘 되는 원균과 비교해서 그다지 나을게 없는 간사하고 교활한 조정 관료에 불과했다.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봐도 뇌물 관련 기록부터 각종 병크스런 언행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윤두수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실록은 승자들의 기록 운운하는데[8] 선조 수정 실록은 윤두수 쪽인 서인 측이 기록했다(...).
그 외에 기자지(箕子誌)를 저술하여 조선 소중화주의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다만 목민관 으로서의 능력은 있었는지 평안도 관찰사시절에 송덕비가 백성들에게 세워질 정도로 선정을 베푼적은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의 대표적인 병크(주:병신짓작렬)를 살펴보자. 참고로 밑의 항목의 모든 자료 출처는 실록이다.
1. 윤두수는 어가가 몽진을 하면서 평양에 있을 때 홍순언 등의 명나라에 대한 구원병 파병요청 주장을 반대하고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유군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쳐발렸다. 물론 이 항목은 능력이 안 되고 여건이 안 돼서 그려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2번 항목부터는 도저히 쉴드(주:방어)를 칠 수가 없다.
2. 원균이 제안한 장문포 해전을 자신의 권한으로 입안, 시행시켰다. 결과는,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망했어요. 게다가 이 전투는 훗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상소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3. 평소에도 원균을 단순히 두둔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금에 둘도 없는 명장 이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조정에서 이순신을 못마땅 해하는 선조에게 편승하여, 전시에는 지휘관을 바꾸면 안 되나 이순신은 반드시 체직시켜야 한다는 미친 지X까지 한다. 더군다나 그 근거라고 내밀었다는 게 김응서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에 넘어가서 길길이 날뛰며 말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으며 그 자신이 직접 진상조사조차 하지도 않았다.
4.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자신의 주장대로 이순신이 실각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고, 조선 수군이 싹 증발했다는 기절 초풍할 비보를 접한 상황에서의 어전 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했다. 조선 육군이 개전 초 일본에 탈탈 털린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 사람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이건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한 지휘관을 임관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 수군의 대병력에 각개격파 당하자는 소리나 진배 없다. 그의 주장대로 했다면 하삼도의 백성들은 어육이 되었을 것이고, 제해권을 확보한 왜 수군은 물길을 따라 한양까지 사흘이면 주파가 가능했을 것이다. 거기에 강화협상 중에는 명군의 지원도 받지 않고 왜성을 공략해야 한다고 쌩쑈를 해서 선조가 마지못해 들어주었는데 병력도 부족하고 식량도 없어서 자살에 가까운 작전이었으나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소득없이 끝나는 수준에 그쳤다. 만약 왜군이 강하게 대응했으면 막대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이때 윤두수의 논리가 이기면 좋고 실패해도 조상님들에게 노력은 했다고 큰소리는 칠수 있지 않겠음?이었다. 이 무슨...
5. 종합하자면, 무능력하고[9], 뇌물이나 받아 처먹고[10], 나라와 백성보다는 임금의 눈치나 살살 보며 자기 붕당의 이익부터 꾀한[11]데다가 자신의 직무조차 무성의하게 임했던, 전형적인 정치인이다.
6. 여담으로 그 후손들은 아주 잘도 모시거나 두둔하기 바쁘다. 위키백과에서도 윤보선이 변명한 것이 있다는 대목이 있다. 그래야 자기 집안이 매국노라는 소리도 아까운 막장이란 점을 감추기 그나마 쉬우니 말이다. 또한 윤치호가 민중들이 노예근성에 분노로 바뀌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게 그 당시로부터 300년 앞서 생기면, 자기 가문은 어떻게 되었을지도 상상조차 못 하는 개념에 실소를 금치 못 한다.
3. 현대 창작물에서
현대의 창작물에서는 이순신이나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가끔 등장하지만, 류성룡이나 이항복 등의 유명인물과는 달리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렇지 않겠나? 대통령 1명에다가 서울시장 2명이나 가진 집안에서 말이다. 더욱이 이젠 방송계에서도 활동하는 후손도 있는데 말이다. 자칫 미화하다가는 명성황후 민씨같은 꼬락서니를 드러낼 가능성만 높을 뿐이다. 특이하게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정동환 씨가 연기하였는데, 여기에선 비중이 상당히 높아서 갖은 방법을 다해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끌어내리려 하는 매우 교활한 노대신으로 등장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사극이 역사왜곡으로 논란이라도 없었다면, 이러한 장면들이 나오기라도 했을까? 초반 단순한 검증도 포기한 비난 희석이 주목적이란 점에서 이러한 점을 후에 동일 시대 관련 사극에서 보여줄 가능성은 변화가 없는 한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목사가 된 이후 오랫동안 연기를 쉬던 임동진이 맡는다고 한다. 예고편만 보면 그동안 선역을 주로 맡아온 임동진의 버프 탓인지 강직한 근왕주의자 처럼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당장 드라마상 이 인물의 캐치프레이즈부터가 왕이 곧 나라다 이기도 하고.... 하지만 위 항목만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정말 윤두수를 그런 식으로 그린다면 심각한 미화 논란이 일 것이다. (임동진의 연기력이 쩔어서 강력한 배우보정!) 과연 어떻게 그릴지?
주석
[1] 그래서 이 사람의 후손이 해평 윤씨의 여러 분파 중 하나인 오음공파이다. 즉 오음공파 사람들에게 윤두수는 중시조.
[2] 그나마 여기서 잘한 것이라고는 노약자들을 신속히 대피시킨 정도이다.
[3] 평양성 지킨다고 호언장담하다가 털린게 누군데...
[4]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 어전 회의 관련 기록을 보면 아주 잘 나와 있다.
[5] 원균이 서인이면서, 친척관계였던 윤두수 형제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서인이었던 그는 임진왜란 당시 동인의 지지를 받는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친척인 원균을 비호하며 그를 삼도 통제사에 앉히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상 칠천량 해전의 주역.
[6] 역시 출처는 선조 실록
[7]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자신이 이순신을 추천했기 떄문에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표현때문에 서인이 동인의 보호를 받는 이순신을 공격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당시에는 서인vs 동인의 당쟁이 아닌 서인vs 북인의 당쟁으로 정쟁이 마무리 될즘에는 서인이 몰락하고 북인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북인이 남인인 류성룡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류성룡이 말한 자신을 싫어한 사람들은 서인이 아니라 북인이다.
[8] 환빠나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과 비슷한 패턴이다.
[9] 평양성 전투, 장문포 해전, 칠천량 이후의 대책이랍시고 내놓는 것들
[10] 실록을 참조하시라.
[11] 이순신을 디스하고,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와해되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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