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박근혜, 이 점만은 선조에게도 꿀린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징비록>, 첫 번째 이야기
15.02.16 11:49 l 최종 업데이트 15.02.16 11:49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징비록>. ⓒ KBS
박근혜 대통령이 봉착한 최대 문제점 중 하나는 인사관리다. 그가 사람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는 점은, 작년에 정홍원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뒤에 내정한 세 명의 총리 후보자한테서도 잘 드러난다.
안대희 후보자는 전관예우 근절에 관한 사회적 요청에 맞지 않았고, 문창극 후보자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인식을 갖추지 못했으며, 이완구 후보자는 재산 축적이나 병역 문제 등에서 구시대 일부 관료들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어떻게 그렇게 문제적 인물들만 꼭꼭 집어내는지, 특별한 노하우라도 갖추지 않고서는 저렇게 하기도 힘들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박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점차 등을 돌리고 있는 원인 중 하나는 인사관리에서 드러나는 그의 역량 부족 탓일 것이다.
이런 박 대통령과 비교할 때, 대단한 행운을 누린 조선시대 통치자가 있었다. 그는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도망가고, 신하들이 나라를 잘 지켜주면 그것마저 시기하는 군주였다. 심지어, 아들이 나라를 잘 지켜도 질투심을 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훌륭한 인재들의 보좌를 받아 국난을 극복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14일 첫 방송을 탄 KBS1 주말 드라마 <징비록>에 나온 선조 임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선조,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지만...
선조가 박 대통령에 비해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약점을 가려줄 수 있는 훌륭한 참모를 두었기 때문이다. 선조에게 그런 행운을 안긴 참모는 <징비록>의 주인공인 유성룡이다.
아들 광해군에게 전쟁 지휘권을 맡겨놓고도 아들을 시기하고 흔들어댄 사실, 바다의 명장인 이순신을 감옥에 넣다 빼는 바람에 조선 수군을 약화시킨 사실, 전설적 의병장인 김덕령을 뚜렷한 증거도 없이 반역죄로 죽인 사실에서 표출되듯이, 선조는 유능한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관리자였다. 그래서 그는 인재를 잘 판별할 수 없었다. 욕망과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했으니, 인간과 사물을 똑바로 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국난을 맞아, 마치 하늘이 내려준 것 같은 최상의 인재 조합을 앞세워 일본군을 격퇴하고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선의 피해도 막심하기는 했지만, 결국 침략군을 몰아냈으므로 이 점을 놓고 보면 전쟁의 승자는 조선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선조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통치자가 되고 말았다. 조선 역사에서 비전투 요원을 포함한 20만의 외국 군대를 격퇴한 군 통수권자는 선조 외에 없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역사 속의 인물을 평가할 때는 개인적 자질보다는 객관적 업적을 우선시하는 것이 관행이다. 이런 관행에 입각해서 선조를 평가할 때는, 그가 광해군·이순신·김덕령 같은 인재를 시기하고 질투한 측면보다는 그가 그런 인물들을 이용해서 국난을 극복한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선조에게는 분명히 과분한 일이지만,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그런 과분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을 발탁한 유성룡, 그의 눈은 정확했다
▲ <징비록>의 유성룡(김상중 연기)과 선조(김태우 연기). ⓒ KBS
선조가 과분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인물이 바로 유성룡이다. 그는 선조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선조를 보좌했다. 선조는 갖지 못하고 유성룡은 가진 것은 바로 인재를 보는 눈이다.
유성룡이 인재를 얼마나 잘 판별했는가는, 그가 추천한 이순신과 권율이 각각 해상 및 지상에서 핵심적 공로를 세운 사실에서 잘 증명된다. 물론 조선 의병들의 활약이 훨씬 더 컸고 명나라 지원군의 도움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정부군의 양대 산맥이 되어 전란 극복을 주도한 이들은 이순신과 권율이었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추천할 당시, 이순신의 품계는 종6품이었다.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 자리에 있다가 진도군수(종4품)로 발령을 받았지만, 새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유성룡의 추천을 받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임명됐다. 그래서 이순신은 종6품에서 정3품으로 파격 승진하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정3품과 종6품은 7품계 차이다. 지방 현감이던 사람을 7등급을 뛰어넘어 전라좌도 해군 사령관에 추천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유성룡처럼 인재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에 유성룡이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추천하지 않았다면 이순신이 사전에 전쟁을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일본이 전라도 공략 실패로 인해 전반적인 차질을 빚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성룡이 그런 절묘한 일을 해내지 못했다면, 임진왜란의 해상 전쟁은 이순신이 아닌 원균의 지휘 하에서 치러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백 번을 들어도 지겹지 않을 유성룡의 자기자랑
유성룡 본인도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한 일이 무척 대단하고 신기했던 모양이다. 이 점은 훗날 낙향해서 <징비록>이란 회고록을 쓸 때 그가 보여준 집필 방식에서 잘 표출된다.
<징비록>에는 이순신에 관해 상세히 소개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정읍현감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읍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파격적 승진이 유성룡 자신의 천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일부러 이 문장을 가장 앞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은, 이순신에 관해 한마디라도 언급한 뒤에 '내가 이런 사람을 추천했다'고 언급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이순신을 적시에 추천한 사실을 가슴속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천 사실부터 불쑥 언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특성과 경력을 정리한 뒤 유성룡은 다시 '자기 자랑'에 들어갔다. 이순신의 특성과 경력을 소개하면서 이순신이 우수한 인재였음을 강조한 직후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런데 조정에서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도록 승진하지 못하고 있다가 비로소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날로 퍼지자, 임금께서는 비변사(지금의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명령하여 장수의 재목이 될 만한 재주를 갖춘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이순신을 천거함으로써 그가 정읍현감에서 수군절도사로 파격적으로 임명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승진한 것을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앞부분에서 "정읍현감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라는 첫 문장으로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 유성룡은, 이 대목에서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가 이 일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으면 이렇게까지 썼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추천한 덕분에 일본의 침략을 막아냈으니, 유성룡의 자기자랑은 백번 들어도 지겹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선조의 공적이 된 유성룡의 공적
▲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유성룡이 추천한 또 다른 인재, 권율. 그는 한성 서쪽의 강변 요새인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함으로써 일본군의 한양 지배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가 지휘한 행주대첩은 조선을 배제한 명나라-일본의 휴전 협상에 찬물을 끼얹음으로써 조선군이 계속해서 일본군과 싸울 수 있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행주대첩이 없었다면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자기들 마음대로 휴전 협상을 매듭지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조선 팔도의 일부를 일본이 차지하는 선에서 전쟁이 끝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38선'이 1945년의 산물이 아니라 1592년의 산물이 됐을 수도 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막은 주인공이 바로 권율이었다. 그리고 그런 권율을 추천한 장본인이 바로 유성룡이다.
전쟁 기간 동안에 유성룡은 영의정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관직을 맡아 전시 행정을 지휘하는 공로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어떤 공로도 이순신·권율을 추천한 공로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역사에 남을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성룡의 공적은 결과적으로 선조의 공적이 되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선조가 이순신·권율을 잘 기용해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셈이 되었다. 만약에 유성룡이 없었다면, 선조가 그런 인물들을 가려낼 수 있었을까? 유성룡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통치자는 본인이 직접 행정을 하고 군대를 지휘하고 경제를 운용하지 않는다. 행정을 잘하는 사람과 군대를 잘 지휘하는 사람과 경제를 잘 운용하는 사람을 기용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게 통치자한테 잘 어울리는 일이다.
선조는 유성룡이란 참모 덕분에 필요한 인재를 얻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전쟁 중에 이순신을 비롯한 인재들을 질투해서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능력을 유성룡한테서 빌려 썼다는 점에서, 선조처럼 행운이 많은 군주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나라를 건사한 선조의 행운은 로또복권 1등 당첨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선조는 용렬한 인격의 소유자라서 훌륭한 인재를 옆에 둘 자격이 없었지만, 유성룡이라는 특급 참모의 보좌 덕분에 훌륭한 인물들을 기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참모를 옆에 두지 못한 게 확실하다. 안대희·문창극·이완구 같은 문제적 인물들을 연달아 내놓는 것을 보면, 대통령의 문제점을 가려줄 현대판 유성룡이 없는 게 박 정권의 최대 문제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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