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정복' 꿈꾼 일본장수 물 먹인 남자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징비록> 네 번째 이야기
15.03.24 19:59 l 최종 업데이트 15.03.24 19:59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징비록>. ⓒ KBS

KBS 주말 드라마 <징비록>에서 뾰족한 윗니를 앞세워 난폭한 독재자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풍신수길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김규철 연기). 그는 한국에서는 악당의 이미지로 통하지만, 일본에서는 입지전적 출세 신화의 대명사로 통한다. 일본 역사에서 히데요시만큼 인상적인 출세를 이룩한 인물은 또 없기 때문이다. 

고대 이래로 일본에서는 일왕(이른바 천황)의 혈통이 아니면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하나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편이다. 중국의 주원장처럼 서민의 아들이 혁명을 일으켜 왕조를 수립하는 일이 일본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일왕의 혈통이 아닌 사람이 최고 통치자가 되려면, 임진왜란 이후 막부(무신 정권)를 새로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던 것처럼 혈통이라도 조작해야 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혈통 조작을 할 만한 '건더기'도 없었다. 누가 봐도 가난한 하층민의 자식이라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혈통 조작마저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잠시 뒤 소개된다.  

하층민 히데요시, 일본을 통일하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wikipedia

일본 사회는 조상의 가업을 후손들이 충실히 계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건전한 사회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만큼 신분 상승 내지 신분 이동이 불가능한 사회 풍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신분 이동이 힘든 사회에서, 누가 봐도 하층민인 히데요시는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그는 일본 사회에서 경외심을 자아내는 존재로 통할 수밖에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중종 임금 때인 1536년에 태어났다. 그의 출신과 관련해 '부유한 농민의 아들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다'라는 이야기가 통설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했다. 가난한 사람도 과거 시험만 합격하면 정승·판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불가능했다. 일본에서는 용 나오는 데서만 용이 나왔다. 그런데도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됐으니 일본인들에게는 경이적인 인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경이적인 신분 상승을 이룩한 밑바탕에는 개인적인 불행이 중요한 계기로 작동했다. 그는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그 후 계부 밑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계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열여섯 살 때 집을 떠나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가출한 히데요시는 풀을 베어 팔면서 살았다. 생활이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히데요시가 열아홉 살 때였다. 오와리국 제후인 오다 노부나가가 거리를 행차하게 됐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보다 두 살 위였다. 노부나가의 행렬이 거리에 등장하자, 히데요시는 옷을 벗고 대로에 드러누워 버렸다. 행차를 막은 것이다. 

당황한 노부나가의 부하들이 칼을 뽑아 히데요시를 죽이려 하자,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노부나가가 부하들을 제지했다. 

"뭣 때문에 그러느냐?"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에게 물었다. "너무 가난해서 살 수 없습니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대답했다. 도와달라는 메시지였다. 그러자, 역시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노부나가는 "내 밑에서 일하라"고 말했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수하의 하급 무사가 되었다. 조선으로 치면 권세가의 사병이 된 셈이다. 

히데요시는 수많은 사람이 보는 대로에 드러누워 "너무 가난해서 살 수 없습니다"라며 동정을 구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자신이 하층민이란 사실을 공개했기 때문에 그는 훗날 최고 권력을 잡은 뒤에도 자기 가문을 신성시하는 혈통 조작을 시도할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는 권력을 동원해 자기 가문을 미화했을 것이다. 그는 열아홉 살 때의 그 일이 한편으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후회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부하가 된 16세기 중반, 일본은 오랜 내전 중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전쟁의 시대'라는 의미로 전국(戰國)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인들은 '센고쿠 시대'라고 발음한다. 이 시대는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됐다. 당시에는 중앙 정부가 힘이 없었다. 지방 제후들이 서로 최고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벌였다. 히데요시는 통일을 꿈꾸는 제후의 부하가 된 것이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된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화장실 청소를 맡았다. 그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화장실 청소도 아주 열심히 했다. 화장실이 너무 깨끗해서 냄새는 물론 먼지도 없을 정도였다.  

히데요시가 다음에 맡은 일은 노부나가의 신발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도 열심히 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그는 추운 날씨 때문에 주인의 신발이 차가워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밤새 신발을 품에 꼭 안고 있다가, 새벽에 노부나가가 나오자 얼른 신발을 내놓았다. 차가운 밤 공기를 느끼며 방문을 열었을 노부나가는, 히데요시가 내놓은 신발을 신으며 따스한 온기를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신임을 쌓아갔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발판으로 히데요시는 정보 장교가 되고 야전군 장교가 됐다. 그는 치밀하고 혁신적인 장교가 됐다. 그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교였다. 장수에는 용장·덕장·지장이 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지장이었다. 머리를 써서 승리하는 장수였다. 이 덕분에 그는 노부나가의 부하 중에서 두각을 보이며 급성장하게 됐다. 

노부나가의 진짜 배신자, 히데요시

히데요시가 얼마나 혁신적인 장군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유명한 돗토리 성 전투다. 돗토리 성은 지금의 돗토리 현으로, 울산 앞바다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곳이다. 전투가 벌어진 때는 그가 46세 때인 1581년이다. 임진왜란 11년 전이었다. 

돗토리 성을 공격하기 이전에, 히데요시는 여타 장군보다 훨씬 더 치밀한 모의실험을 실시했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한 것이다. 그는 양쪽 군대의 식량부터 계산했다. 그는 적군의 식량을 줄인 상태에서 전투를 개시하기로 결심했다. 

히데요시는 상인들을 은밀히 보내 돗토리 성 안의 쌀을 사들였다. 돗토리 성 사람들은 상인들이 갑자기 대거 등장한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의심 없이 쌀을 판매했다. 이로 인해 돗토리성 안에는 쌀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히데요시는 병사들을 보내 성 주변의 농민들을 괴롭혔다. 일종의 게릴라 공격으로 성 밖 주민을 들볶은 것이다. 그러자 성 밖 주민은 돗토리 성 안으로 도망갔다. 안 그래도 식량이 부족한 돗토리 성 안에 더 많은 사람이 유입된 것이다. 쌀은 적은 데 쌀을 소비할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이다.  

그제야 히데요시는 돗토리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미 성 안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식인 풍조까지 나타났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었다. 얼마 안 있어 히데요시는 돗토리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렇게 그는 전투에 신개념을 도입해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승리를 거뒀다. 이런 히데요시의 활약으로 노부나가의 세력은 계속 확장됐다. 

그 후 히데요시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건이 이듬해인 1582년에 터졌다. 임진왜란 10년 전의 일이다. 이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틈을 타 노부나가의 또 다른 부하인 아케지 미쓰이데가 반란을 일으켰다. 부하의 기습을 받은 노부나가는 뚫고 나갈 가망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배신자 미쓰이데를 처단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히데요시의 다음 행동이다. 그는 노부나가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미쓰이데를 죽이더니 자신이 직접 권력을 잡았다. 노부나가의 자손들이 정권을 승계하도록 도와주지 않은 것이다. 그는 노부나가의 자손들을 탄압하고 정권을 공고히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쓰이데 못지않게 히데요시도 노부나가를 배신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진행하던 통일 전쟁의 바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때는 노부나가의 권력을 가로챈 지 8년 뒤인 1590년이다. 임진왜란 2년 전이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100년간의 분열을 종식하고 일본 통일의 과업을 달성하게 됐다. 이때 그는 55세였다. 

아시아 정복까지 꿈꾼 히데요시를 좌절하게 한 무명의 장수

▲  한산대첩 상상화.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통일 직전 히데요시는 다음 목표를 세웠다. 일본 통일 4년 전이자 임진왜란 6년 전인 1586년, 그는 포르투갈 선교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다음 목표는 조선과 중국과 동남아를 모두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에 이를 공언한 그는 통일을 성취하자마자 곧바로 조선 침략에 나섰다. 그의 포부는 일본 땅을 조카에게 주고, 조선 땅을 제후에게 주고, 중국 땅을 일본 왕족에게 준 뒤 자기 자신은 인도와 동남아까지 침공하는 것이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초반만 해도 히데요시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조선의 임금(선조)은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미지의 땅인 인도와 동남아를 정복하는 환상에 가슴이 부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순신이라는 무명 장군의 등장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승승장구하던 히데요시의 인생에 복병이 등장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이순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제1차 당항포 해전 직후였다. 전쟁 발발 2개월이 좀 안 됐을 때다.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이 이순신을 당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히데요시가 내린 처방은 자신의 직할 수군이 이순신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의 최정예 부대를 이순신과의 전투에 투입한 것이다. 하지만 직할 수군의 3분의 2는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이순신 군대와의 전투에서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에서 직할 수군의 주력이 와해된 것이다.   

▲  거북선.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믿었던 직할 수군마저 무너지면서 히데요시의 꿈에는 적신호가 켜졌다. 이런 상태에서 조선의 백성들이 의병으로 투쟁하고 조선 관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또 명나라까지 전쟁에 참가했다. 결국 히데요시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순신이라는 무명 장수의 출현으로 히데요시의 아시아 정복 작전이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를 향해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을 누르고 중국·동남아·인도까지 정복할 계획을 품고 대군을 출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중국·동남아·인도는커녕 조선의 벽도 넘지 못했다. 

히데요시가 이처럼 생애 최초의 대형 좌절을 맛본 것은 바로 이순신 때문이었다. 이순신을 알고 난 뒤 히데요시는 '내게도 불가능한 게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이 히데요시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막판인 1598년 9월 18일(음력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이순신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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