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870196
반중국 코드뿐 아니라 반일 코드도 갖고 있던 문자
[김종성의 히,스토리] 1894년 고종이 서명한 칙령 제1호
민족·국제 김종성(qqqkim2000) 22.10.09 11:31ㅣ최종 업데이트 22.10.09 11:31
▲ 훈민정음 ⓒ 문화재청
한글이 창제된 것은 1443년이지만,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다. 이 시기에 한글 대중화의 법적 명분이 된 것이 있다. 음력으로 고종 31년 11월 21일(양력 1894년 12월 17일)에 서명된 칙령 제1호가 그것이다. 칙령 제1호의 제14조는 이렇게 선언했다.
"법률과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되, 한문에는 풀이를 붙이거나 또는 국한문을 혼용한다."
'국문'과 별도로 '한문'이 언급됐다. 이 칙령에 적힌 국문은 훈민정음을 지칭한다. 법률과 칙령을 제정할 때는 일차적으로 훈민정음을 사용하라는 왕명이었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법률과 칙령을 훈민정음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으니, 훈민정음 반포를 명한 왕명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주시경의 한글 대중화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이 칙령 이후였다. 그는 한글 철자법 통일을 목적으로 1896년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만들었다. 이 모임은 독립협회가 펴내는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발행을 보조했다. 주시경은 1907년에는 국문연구소가 학부(교육부)에 설치되도록 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칙령 제1호가 한글 대중화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창제 3년 뒤인 1446년에 훈민정음이 반포됐다는 이야기가 부정확하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 7월 <한국민족문화> 82에 실린 서민정 부산대 언어정보학과 교수의 논문 '20세기 초 전후, 훈민정음의 재탄생과 한계'는 세종이 1446년에 반포했다는 이야기가 19세기 후반 이후에 확산된 사실을 거론하면서 이에 관한 근거가 취약하다고 설명한다.
이 논문은 "세종실록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 광포나 반포하였다는 기록은 사실 찾기 어렵다"며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문에서도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하라'는 표현은 있으나, 민간에 광포하라는 것은 무엇을 보고 판단했는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고 말한다.
훈민정음 반포의 근거로 거론되는 세종 28년 9월 29일자(1446년 10월 19일자) <세종실록>에는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쉽게 사용하여 날마다 쓰는 데에 편히 하도록 할 뿐이다" 등의 문장들이 있다. 훈민정음이 이때 반포된 근거로 해석될 여지도 있지만, 아주 명확하지는 않다. 1894년의 칙령 제1호만큼은 선명하지 않은 편이다.
칙령 제1호는 고종의 왕권이 크게 제약된 상태에서 발포됐다. 이 칙령이 서명된 1894년 11월 21일은 친일 정부인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날이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가 확실시된 시점에 칙령 제1호가 나왔다.
한글 대중화를 가로막던 두 요소
일본이 한글 대중화를 위해 고종에게 압력을 넣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1894년 연초에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해 양반 기득권층이 타격을 입은 데 이어,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 밀려 크게 악화된 상태에서 칙령 제1호가 발포됐다. 친중국적 사고방식을 가진 양반들이 타격을 받고 한중동맹이 와해된 가운데서 이 조치가 나온 것이다.
양반 기득권층과 중국이 추락하는 속에서 한글 대중화에 시동이 걸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자 사용을 강제하던 내부적 요소와 외부적 요소가 동반 몰락하는 상황이 이런 변화를 낳았던 것이다.
한족인 명나라에 이어 중국을 지배한 만주족 청나라는 만주문자를 제1문자로 사용했다. 하지만 한자를 매개로 하는 한중관계의 양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청나라가 만주문자만 고집했다면 이 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1644년 이후에 조선인들의 한자 사용 빈도가 떨어졌겠지만, 청나라는 그것을 강요하거나 관철시킬 힘이 없었다.
세종이 우수한 문자를 창제하고도 대중화시키지 못한 것은 당시의 중국인 명나라와 더불어 조선 지배층인 유교 사대부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이 두 요소는 한자 사용을 강제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한자는 중국의 문자인 동시에 조선 양반의 문자였다. 한글은 오랫동안 이 벽을 넘지 못했다.
중국이 건재하고 양반이 건재하는 동안에는 한글이 한자의 권위에 눌렸다. 그랬던 것이 동학혁명으로 양반의 권위가 추락하고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새로운 상황으로 이어졌다. 힘없는 고종이 칙령 제1호를 발포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 대중화를 가로막던 두 요소가 한꺼번에 약화된 데 기인한다.
조선시대에 관공서 민원인들이 주로 사용한 글자는 이두였다. 현존하는 노비 계약서를 한문 문법으로 독해하고자 하면 도저히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이런 계약서에 적힌 것이 우리 어법을 따른 이두였기 때문이다.
구한말 하급 관원들이 작성한 한문 공문서를 보면 '콩클리쉬' 느낌이 든다. 중국인이 쓴 글이나 조선 선비들이 쓴 한문 문장과 확연히 다르다. 민원인들이 이두를 쓴 것이나 하급 관원들이 콩클리쉬 한문을 쓴 것은 한문 문법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중이 문자 생활에서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 칙령 제1호 발포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이 불편해하는데도 양반 사대부들은 한자를 애용했다. 제1문자인 한자에 대한 접근성은 그들의 사회 지배력과도 연결됐다.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도, 한자는 양반의 문자였다.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을 가진 문자
▲ 4일 오후 한 시민이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과거에 중국을 둘러싼 국가들은 다들 고유 문자가 있었다. 티베트문자·몽골문자·만주문자·일본문자 등의 존재가 그것을 보여준다. 조선 정도의 규모를 갖춘 나라가 이민족 문자에 의존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이례적이었다. 다른 민족들은 고유 문자를 쓰는데도 자신들은 불편한 외국 문자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감이 고종의 칙령에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의 한글 사용이 한글 대중화를 촉진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선진 세계로 인식됐던 서양의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것도 한글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한글 대중화를 촉진한 위의 요소들에서 추출되는 공통점은 '반(反)중국'이라는 키워드다. 친중국적 사고방식을 가진 양반 사대부들이 크게 약화되고, 중국을 지배하는 청나라가 신흥강국 일본에 뜻밖의 일격을 당해 위신이 한층 추락하는 상태에서 한글이 대중적 문자로 급부상했다.
선교사들의 활동도 반중국 코드와 닿아 있었다. 서양열강은 조선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래야 조선 이권에 접근하기가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그런 서양을 역이용했다.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명분을 표방함으로써 서양열강의 견제를 피하고 도리어 지원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종교적 열정도 갖고 있었지만, 서양열강의 이해관계도 대변하고 있었다. 조선과 중국이 분리되기를 바라는 서양의 이해관계 역시 그들의 선교 활동에 투영됐다. 그래서 그들의 활동도 반중국 코드와 닿아 있었다.
한글 대중화를 가능케 했던 주요 요인들이 '반중국'과 이어진다는 점은 한자와 대립적인 이 문자가 반중국 코드를 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종의 창제 역시 중국 문자에 대한 거부감에 일정 정도 바탕을 두었다.
그런데 이 문자는 자신이 반중국 코드만 갖고 있는 게 아님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 문자는 일제강점기 들어서는 한국인들을 통합해 항일정신·반일정신을 갖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구한말부터 확산된 한글은 얼마 안 있어 한국 대중의 문자가 되더니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부터 한국인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반중국 코드뿐 아니라 반일 코드도 갖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글은 단순히 한민족의 문자에 그치지 않고 수호신 역할까지 해왔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살려주고 외세로부터 지켜주는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을 가진 문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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