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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
위만 조선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임둔, 진번 같은 주변 족속을 정복하고 관료 제도를 정비해 국가는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북방에 사는 흉노족과 손을 잡고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128년 예의 통치자 남려가 28만 명의 주민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서 한에 복속되기를 청하였다. 한나라는 이곳에 창해군을 두고 통치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저항으로 곧 폐지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주민 200여 명을 이끌고 진국 땅으로 망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처럼 고조선의 지배층이 분열하고 세력이 약해지자, 한나라는 숙적인 흉노와 위만 조선의 연결을 끊고 동북 아시아 지역을 석권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쳐들어 왔다.
먼저 한나라의 지배자인 무제는 흉노와 손을 끊도록 고조선을 회유하기 위해 섭하를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조선은 한나라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성과 없이 귀국 길에 오른 섭하는 배웅 나온 고조선 장수 장을 살해하고 패수(고조선과 한의 경계를 이루었다는 강으로 청천강이 유력)를 넘어 도망쳤다. 그러자 한 무제는 섭하에게 ‘요동군 동부도위’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고조선을 마주 보는 요동 땅의 군사 책임자 자리였다. 이에 분노한 고조선의 왕 우거는 군사를 보내 섭하를 단칼에 죽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조선과 한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다. 한 무제는 정벌군을 조직해서 기원전 109년 가을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고조선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왔다. 한나라의 누선 장군 양복은 7000명에 이르는 수군 병력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으로 향했고, 흉노를 정벌한 공이 있는 좌장군 순체는 육군 5만 명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고조선은 험한 곳에 군사를 배치하여 첫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한 문제는 위산을 사자로 보내 협상을 하려했다. 이에 우거왕은 잠시 여유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위산에게 항복하는 척하고, 태자에게 말 5000필과 양식을 내주며 한나라 진영으로 가서 사죄하게 했다. 그러나 군량미와 무기를 가지고 막 패수를 건너려던 태자는 한나라 사신과 순체가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결국 패수를 건너지 않고 고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 후 간신히 왕검성 부근까지 도착한 순체의 육군과 양복의 수군은 왕검성을 포위했으나 고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지휘관인 순체와 양복 사이가 나빠졌다. 좌장군 순체는 조정에서 다시 파견한 사신 공손수와 상의하여 누선장군 양복을 잡아 가두고 두 장수의 군대를 합쳐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전선이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빠지자, 한나라는 한편으로는 정면 대결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조선의 지배층을 매수. 분열시키는 방법을 썼다. 왕검성 안에서도 포위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자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과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세력이 팽팽하게 맞섰다. 조선상 노인과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겹은 도망하여 한나라 군대에 항복했다. 그 가운데 노인은 항복하러 가는 도중에 죽었으나 니계상 참은 사람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고 결국 한나라에 투항했다.
왕자인 장까지 투항했으나 왕검성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고조선의 대신 성기가 백성들을 지휘하여 끝까지 항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장과 노인의 아들 최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성기를 살해하였다.
이리하여 왕검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기원전 108년 여름의 일이었다.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국가 고조선은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신과 전통은 훗날 고구려로 이어지게 된다.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군’이라는 식민지, 즉 한군현을 만들었다. 군 밑에는 현을 두어 한인 군 태수와 현령을 보내 식민 통치를 하였다.
이제 고조선 사회의 기본 조직은 위로부터 해체되고 고조선 주민들은 읍락 단위로 한의 군현 조직에 예속되었다. 또한 고조선 사회의 전통적 사회 질서와 문화에 큰 혼란이 일어나 8조법금이 60여 조로 늘어났다. 한인들의 통치는 주로 낙랑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관리들은 물론 상인들까지 진출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다. 낙랑군은 이후에도 한나라와 한반도 사이에 무역 중계 기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개 군 중 3개 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고, 낙랑군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존속하다가 313년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아틀라스 한국사-사계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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