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cmuseum.busan.go.kr/uploadfiles/seminar/bcmuseum/강인욱.pdf 
복천박물관 제5기 고고학 시민강좌, 발해의 유적과 유물 45~48 (부경대 강인욱)

발해의 유적과 유물
Ⅲ. 바닷가의 크라스키노 성터
 
발해가 있었던 지역은 현재 중국의 길림성과 흑룡강 일대가 중심이고 연해주 및 한반도 북부 일대도 포함된다.  중국은 동북공정이 끝나고 발해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관광지로  개발중이다.  중국은  이미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로  이를  세계적으로  공인받겠다고  하는  상황이다.  한국학자의  접근이  불가함은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유일한 통로는 연해주 지역인 셈이다. 실제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는 수백개의 발해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그중  백미라  한다면  당연히  한-러  국경지역의  북쪽에  있는  크라스키노 성지를  들  수  있다.  이  성지는  러시아에  분포한  유적중  가장  대형이며  발해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염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규모는  구글  어스로  검색을  해도  보일  정도로 큰 편이다.  

이  성지가  위치한  크라스키노  마을은  안중근의사가  단지동맹하고  독립운동을  결의한 곳으로  유명하다.  1860년대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극동지역을  접수하고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끄라스낀이라는 사람이 이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끄라스끼노라고  했었던  모양이다.  그  전에는  고려인들이  대규모  거주하면서  이 지역은  연추마을이라고  불리웠다.  연추(煙秋)마을이라면  염주(鹽州)하고  아주  발음이  비슷하니 혹시 발해 때의 지명이 구전되어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그런데  발해사람들  참  신기하게도  바닷가의  갯펄  근처에  성지를  지었다.  지금도  크라스키노  성지는  조금  땅을  파도  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발굴이  이만저만  힘든게  아니다. 게다가 저지대인 탓에 엄청난 모기떼의 공격도 피할 수 없다. 하물며 여름에 조금 큰 태풍이라도 몰아치면 전 성지가  침수되는 건 시간문제다. 실제로 발굴을  하다보면 엄청난 물이 끄라스끼노 성지를 덮은 흔적이 자주 발견된다. 크라스키노 성지가 바닷가에 있는 이유는 발해의  수도(상경)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뱃길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배를  댈려면  갯펄보다는  뽀시에트항과  같은  정박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실제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탈려면 아마도 크라스키노 성지에서 작은 배로 건너편의 뽀시에트 쪽에서 큰 배로 갈아타고 갔을 것이다. 

여러 불편을 감수하고 여기에 성지를 쌓은 이유에 대해서 ‘소금’이 답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염주라는  명칭도  소금  鹽자를  쓰는  데,  이것을  소금  생산과  관련시키는  견해이다. 크라스키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카파로프라는  신부는  19세기에  북경의  러시아정교회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가는  길에  이  성을  발견했다.  그는  노트에  특이하게도  크라스키노 성을 ‘소금가마터’라고 기록했다. 혹시 이 성터가 채염하기 적당한 조건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인지도  모른다.  발해나  고구려같이  내륙에  위치한  국가들에게  소금의  확보는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먹는 것 뿐 아니라 물론 목축하기 위해서는 가축들이 지속적으로  소금을  섭취해야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동해에  접해서  살던  옥저나  동예를 복속시켜서  소금을  얻었고  말갈족의  경우  나무를  태워서  소금을  얻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반해서  발해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은  없다.  발해와  같은  거대한  제국이  동해바다로  진출했다는  것은  소금을  지속적으로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크라스키노의 염주성은 바로 그런 소금공급원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까지는 가설일 뿐이다.

또한 소금크라스키노 성은 일본으로 가는 항구의 역할도 했었다. 서기  727년에 시작된 발해와 일본의 공식적인 사절단은 발해 사신이  34회, 일본 사절이  13회나 파견되었다. 당시 일본에  왔었던 발해  사절단들은  최고의 학식을  갖춘  사람들로서 구성되었고,  평성경(平城京)에  거주하던  일왕과  일본  내  지식인들로부터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발해는 일본에 귀한 모피를 주었고, 일본 지식인들과 수준 높은 한시를 주고받았다고 되어  있다.  일본의  답례품도  만만치  않았으니  누구나  발해의  사절단에  들어가길  바랐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리 녹녹치 않았다. 동해를 가로질러 연해주 남부에서 일본으로 간다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727년에 파견된 발해사신 고인의(高仁義)  일행은  당시  일본의  적국이었던  도호쿠  지방으로  표류된  바람에  에조(蝦夷)에게  몰살당하고  8명  만  간신히  살아  돌아갔다.  두  번째  사절인  긍요덕(肯要德) 일행은  대사가  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40여  명이  수장되고  말았다.  계속  사신이  파견되면서 해로가 개발된 후에도 표류나 조난이 심심치 않았으니,  776년 한 해에만도  120명이 희생되었다.

바로  일본과의  그  통로였던  크라스키노  성터는  동해와  맞닿았다.  러시아가  2012년에 개최하는  APEC은  블라디보스톡으로  역시  동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크라스키노는 발해의 동아시아로 통하는 창구였다. 

그림 2. 위성으로 바라본 크라스키노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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