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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문왕
문왕(文王, ? ~ 793년, 재위: 737년 ~ 793년)는 발해의 제3대 국왕으로, 휘는 대흠무(大欽茂), 연호는 대흥(大興)이다.[1] 왕비는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룽터우산 고분군 M12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2]
생애
737년, 대당(對唐) 강경책을 구사하던 아버지 무왕이 붕어한 뒤 보위를 승계하였다. 문왕은 전반적으로 대당 평화기조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필요이상의 요구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758년 당나라는 발해에 사신을 보내, 755년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 무리의 진압을 위해 기병 4만의 출병을 요청해왔지만 문왕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781년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평로치청 절도사에 오른 이정기(李正己)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부대의 기동력 강화에 필수적인 군마(軍馬)를 이정기에게 수출하였다.
문왕은 재위 내내 발해의 내정에 집중했다. 발해의 중앙 및 지방 제도는 건국 직후부터 마련었지만, 문왕 때에 틀이 대부분 확립되고, 선왕(宣王, ? ~ 830년)때에 완성된다. 그런데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발해가 대개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다고 했다. 예컨대 발해의 정부 조직은 당나라 정부조직을 본받아 3성 6부를 기본으로 구성되었다. 발해가 당시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요즘의 세계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모범이 되는 것이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발해의 3성은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으로 당나라의 관청과 이름부터 달랐고, 6부 또한 당나라의 이, 호, 예, 병, 형, 공이 아니라 충, 인, 의, 지, 예, 신이었다. 당나라는 정책 심의 기관이 문하성과 중서성이 행정을 담당하는 상서성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발해는 행정을 담당하는 정당성의 우두머리인 대내상이 선조성과 중대성의 좌, 우상보다 위에 있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 기구였다. 발해의 실정에 맞게 변형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문왕의 두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을 보면, 그 내용이 중국 고전 문학 작품을 다양하게 인용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두 묘지명의 내용이 거의 똑같아, 정형화된 묘지명 형식이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문왕 시기 발해에 유교 문화가 널리 퍼졌음을 알려준다. 또 정효공주 무덤은 무덤 위에 탑을 세우는 탑장(塔葬) 형식이고, 묘지명에 나타난 문왕의 존호(尊號)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서 <금륜성법>이란 불교적 용어가 나타난 것으로 볼 때, 문왕 당시 발해에 불교가 크게 번성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문왕은 70여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다. 그 탓에 장남인 대굉림(大宏臨)은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문왕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딸인 정혜공주는 문왕이 왕위 되던 해인 737년에 태어나 777년 40세를 일기로 죽었다.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 고분군 안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 안에 묘지(墓誌)가 발견되어 그녀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마저도 먼저 죽은 슬픈 가족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는 757년에 태어났는데, 792년 36세의 일기로 역시 아버지 문왕보다 일찍 죽었다.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묘지와 함께 벽화도 발견되었다. 정효공주 역시 정혜공주처럼 남편과 딸이 먼저 죽은 가족사를 갖고 있다.
정혜, 정효공주 묘지명에는 아버지 문왕을 황상(皇上)으로 표현했다. 황상이란 말은 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다. 문왕은 발해 역대 임금들이 그러했듯이 즉위 당시부터 대흥, 774년부터 보력, 780년대에 다시 대흥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문왕이 외부적으로는 대왕으로 칭하고,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하고 있었다.
문왕은 정효공주가 죽은 다음해인 793년 붕어했다. 그는 57년간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현명한 군주였다.
외교 활동
신라와의 외교
733년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발해의 남부지역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신라와의 긴장관계도 완화되었다. 757년 신라는 발해와의 교섭 창구의 기능을 하는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설치했다. 발해의 5경 가운데 하나인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와의 국경에 이르는 길을 신라도(新羅道)라 부르고, 39개 역을 설치했다. 이는 신라와 지속적인 교역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764년 당나라 사신이 신라도를 통해 발해에서 신라로 간 적도 있다. 이처럼 문왕 시기 발해는 신라와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당나라와의 외교
시조 고왕을 시작으로 무왕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발해와 격전을 치렀다. 당나라는 이에 대한 감정적 보복으로 한 동안 발해의 임금을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낮추어 불렀다. 발해라는 국가가 아닌 한 지방을 통치하는 임금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762년부터는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불렀다. 발해의 국력이 감정적으로 무시하기에는 너무 커져 있었음을 당나라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문왕 시기 발해와 당나라의 외교 구도는 기본적으로 평화적 기조를 바탕에 두고 있었으며, 양측의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일본과의 외교
일본 헤이안시대의 궁성인 헤이조궁(平城宮) 터에서는 두 점의 목간(木簡)이 발견되었다. 시대가 앞선 목간에는 발해사(渤海使)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 758년에 만든 목간에는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씌어있다. 발해는 758년 9월 양승경을 대표로 한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때 국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했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문왕을 고려왕이라고 표현하고 국서를 보내왔다.
일본은 778년에 사신을 보낼 때에도 송(送)고려객사라고 하여, 발해를 고려라고 불렀다. 또 일본의 왕실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된 악구궐실병출납장(樂具闕失幷出納帳)이란 문서에는 762년 일본에 사신을 갔다가 다음에 돌아온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763년 1월 동대사(東大寺)를 방문한 흔적을 보인다. 이 문서에는 고려객인(高麗客人)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문왕은 단순히 나라 이름만 고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고구려 역대 임금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손(天孫)이라고 했다. 771년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천손으로 표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舅甥)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이를 항의하기도 했다. 천손이란 의미는 곧 천하의 주인 즉, 제국의 지배자인 천자(天子)라는 뜻이다. 발해가 일본을 화나게 할 정도로 낮추어 보는 문서를 보낸 것은, 발해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727년부터 759년까지 5차례 일본에 보낸 사신은 모두 무관을 대표로 보냈다. 그런데 762년 이후로는 문관으로 바뀐다. 이것은 일본과의 교섭이 신라를 견제하려는 군사적인 목적보다, 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환했음을 말해준다. 760년을 전후해서 발해와 일본은 연합해서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이 계획에 적극적이었지만, 발해는 이 계획에 최종적으로 반대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의 이동
발해가 처음 건국된 곳은 동모산(東牟山)이었다. 이곳은 구국(舊國)이라 불렸다. 그런데 문왕은 742년 무렵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다. 중경현덕부는 현재 길림성 연변자치주 화룡현 서고성자성이다. 이 주변은 철과 베(布), 쌀 생산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시 755년 무렵 수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이곳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진(東京城鎭) 일대다. 문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문왕은 785년 무렵 또 다시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 이곳은 해양 교통의 요지로 현재 연변자치추 훈춘현 팔련성(八連城)지역으로 추정된다. 문왕은 3차례 수도를 옮김으로써, 발해의 여러 곳을 개발하는 효과를 얻었다. 발해에는 이들 3곳의 수도 외에 남경남해부(함경북도 북청군으로 추정), 서경압록부(길림성 임강시로 추정)가 더 설치되어 5경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 또한 문왕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5경을 통해 문왕은 발해의 넓은 영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균형 발전을 이루려고 했던 듯하다. 5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도는 상경으로, 이곳은 793년 5대 성왕(成王, ?~794)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어 발해 멸망까지 나라의 중심이 되었다.
가계
같이 보기
신라
주석
발해 문왕
문왕(文王, ? ~ 793년, 재위: 737년 ~ 793년)는 발해의 제3대 국왕으로, 휘는 대흠무(大欽茂), 연호는 대흥(大興)이다.[1] 왕비는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룽터우산 고분군 M12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2]
생애
737년, 대당(對唐) 강경책을 구사하던 아버지 무왕이 붕어한 뒤 보위를 승계하였다. 문왕은 전반적으로 대당 평화기조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필요이상의 요구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758년 당나라는 발해에 사신을 보내, 755년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 무리의 진압을 위해 기병 4만의 출병을 요청해왔지만 문왕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781년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평로치청 절도사에 오른 이정기(李正己)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부대의 기동력 강화에 필수적인 군마(軍馬)를 이정기에게 수출하였다.
문왕은 재위 내내 발해의 내정에 집중했다. 발해의 중앙 및 지방 제도는 건국 직후부터 마련었지만, 문왕 때에 틀이 대부분 확립되고, 선왕(宣王, ? ~ 830년)때에 완성된다. 그런데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발해가 대개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다고 했다. 예컨대 발해의 정부 조직은 당나라 정부조직을 본받아 3성 6부를 기본으로 구성되었다. 발해가 당시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요즘의 세계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모범이 되는 것이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해가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발해의 3성은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으로 당나라의 관청과 이름부터 달랐고, 6부 또한 당나라의 이, 호, 예, 병, 형, 공이 아니라 충, 인, 의, 지, 예, 신이었다. 당나라는 정책 심의 기관이 문하성과 중서성이 행정을 담당하는 상서성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발해는 행정을 담당하는 정당성의 우두머리인 대내상이 선조성과 중대성의 좌, 우상보다 위에 있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 기구였다. 발해의 실정에 맞게 변형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문왕의 두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을 보면, 그 내용이 중국 고전 문학 작품을 다양하게 인용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두 묘지명의 내용이 거의 똑같아, 정형화된 묘지명 형식이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문왕 시기 발해에 유교 문화가 널리 퍼졌음을 알려준다. 또 정효공주 무덤은 무덤 위에 탑을 세우는 탑장(塔葬) 형식이고, 묘지명에 나타난 문왕의 존호(尊號)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서 <금륜성법>이란 불교적 용어가 나타난 것으로 볼 때, 문왕 당시 발해에 불교가 크게 번성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문왕은 70여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다. 그 탓에 장남인 대굉림(大宏臨)은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문왕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딸인 정혜공주는 문왕이 왕위 되던 해인 737년에 태어나 777년 40세를 일기로 죽었다.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 고분군 안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 안에 묘지(墓誌)가 발견되어 그녀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마저도 먼저 죽은 슬픈 가족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는 757년에 태어났는데, 792년 36세의 일기로 역시 아버지 문왕보다 일찍 죽었다.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묘지와 함께 벽화도 발견되었다. 정효공주 역시 정혜공주처럼 남편과 딸이 먼저 죽은 가족사를 갖고 있다.
정혜, 정효공주 묘지명에는 아버지 문왕을 황상(皇上)으로 표현했다. 황상이란 말은 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다. 문왕은 발해 역대 임금들이 그러했듯이 즉위 당시부터 대흥, 774년부터 보력, 780년대에 다시 대흥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문왕이 외부적으로는 대왕으로 칭하고,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하고 있었다.
문왕은 정효공주가 죽은 다음해인 793년 붕어했다. 그는 57년간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현명한 군주였다.
외교 활동
신라와의 외교
733년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발해의 남부지역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신라와의 긴장관계도 완화되었다. 757년 신라는 발해와의 교섭 창구의 기능을 하는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설치했다. 발해의 5경 가운데 하나인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와의 국경에 이르는 길을 신라도(新羅道)라 부르고, 39개 역을 설치했다. 이는 신라와 지속적인 교역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764년 당나라 사신이 신라도를 통해 발해에서 신라로 간 적도 있다. 이처럼 문왕 시기 발해는 신라와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당나라와의 외교
시조 고왕을 시작으로 무왕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발해와 격전을 치렀다. 당나라는 이에 대한 감정적 보복으로 한 동안 발해의 임금을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낮추어 불렀다. 발해라는 국가가 아닌 한 지방을 통치하는 임금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762년부터는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불렀다. 발해의 국력이 감정적으로 무시하기에는 너무 커져 있었음을 당나라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문왕 시기 발해와 당나라의 외교 구도는 기본적으로 평화적 기조를 바탕에 두고 있었으며, 양측의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일본과의 외교
일본 헤이안시대의 궁성인 헤이조궁(平城宮) 터에서는 두 점의 목간(木簡)이 발견되었다. 시대가 앞선 목간에는 발해사(渤海使)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 758년에 만든 목간에는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씌어있다. 발해는 758년 9월 양승경을 대표로 한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때 국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했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문왕을 고려왕이라고 표현하고 국서를 보내왔다.
일본은 778년에 사신을 보낼 때에도 송(送)고려객사라고 하여, 발해를 고려라고 불렀다. 또 일본의 왕실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된 악구궐실병출납장(樂具闕失幷出納帳)이란 문서에는 762년 일본에 사신을 갔다가 다음에 돌아온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763년 1월 동대사(東大寺)를 방문한 흔적을 보인다. 이 문서에는 고려객인(高麗客人)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문왕은 단순히 나라 이름만 고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고구려 역대 임금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손(天孫)이라고 했다. 771년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천손으로 표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舅甥)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이를 항의하기도 했다. 천손이란 의미는 곧 천하의 주인 즉, 제국의 지배자인 천자(天子)라는 뜻이다. 발해가 일본을 화나게 할 정도로 낮추어 보는 문서를 보낸 것은, 발해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727년부터 759년까지 5차례 일본에 보낸 사신은 모두 무관을 대표로 보냈다. 그런데 762년 이후로는 문관으로 바뀐다. 이것은 일본과의 교섭이 신라를 견제하려는 군사적인 목적보다, 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환했음을 말해준다. 760년을 전후해서 발해와 일본은 연합해서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이 계획에 적극적이었지만, 발해는 이 계획에 최종적으로 반대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의 이동
발해가 처음 건국된 곳은 동모산(東牟山)이었다. 이곳은 구국(舊國)이라 불렸다. 그런데 문왕은 742년 무렵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다. 중경현덕부는 현재 길림성 연변자치주 화룡현 서고성자성이다. 이 주변은 철과 베(布), 쌀 생산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시 755년 무렵 수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이곳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진(東京城鎭) 일대다. 문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문왕은 785년 무렵 또 다시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 이곳은 해양 교통의 요지로 현재 연변자치추 훈춘현 팔련성(八連城)지역으로 추정된다. 문왕은 3차례 수도를 옮김으로써, 발해의 여러 곳을 개발하는 효과를 얻었다. 발해에는 이들 3곳의 수도 외에 남경남해부(함경북도 북청군으로 추정), 서경압록부(길림성 임강시로 추정)가 더 설치되어 5경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 또한 문왕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5경을 통해 문왕은 발해의 넓은 영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균형 발전을 이루려고 했던 듯하다. 5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도는 상경으로, 이곳은 793년 5대 성왕(成王, ?~794)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어 발해 멸망까지 나라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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