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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그 이전에 대조영 아버지의 '진국'이 있었다?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유석재 karma@chosun.com 입력 : 2010.02.27 03:11 / 수정 : 2010.02.2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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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속 인물 대중상의 행적
발해 시조의 아버지인 대중상(大仲象)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고도 한다. '걸걸'은 고구려 말로 크다(大)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신라·발해 '남북국시대'의 성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아있다.
한국 학계의 정설은 696년 이전까지 그의 행적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의 송화강인 속말수(粟末水) 출신으로 당나라에 의해 요하 서쪽 영주(營州)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 3만 호(戶)에 섞여 있었다고 여겨진다.
북한 학계의 입장은 다르다. 사회과학원 발해사연구실장을 지낸 장국종은 몇몇 자료를 근거로 대중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골이 장대한 9척 장신으로서 인품이 출중했으며 과묵하고 사려 깊게 일 처리를 잘했으므로 청년 시절에 속말수 유역을 통솔하는 장수가 됐다."
전적으로 믿긴 어렵지만 일단 그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대중상은 지리와 병법에도 능통해 군사들을 잘 조련시켰으며 천리장성 축조(631~647)에도 참여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다른 지역 군대까지 규합해 부흥운동에 뛰어들었다.
677년 당나라가 요동에 파견한 옛 고구려 임금 보장왕이 은밀히 국권 회복을 도모할 때 여기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 무렵 대중상은 백두산과 송화강 유역을 영향력 아래 두고 정치세력을 형성했다는 얘기다. 이것이 왕국보다 낮은 등급의 나라인 진국(振國·震國)이라면서 발해 건국의 전 단계로 설정한다. 정말 그랬을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료는 뜻밖에도 '발해를 다루지 않은 역사책'이라고 알려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다.
삼국사기 최치원(崔致遠) 열전을 보자. 최치원이 당나라 관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의봉(儀鳳) 3년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서로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백두산) 아래 의거해 나라 이름을 발해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 '말갈 발해'조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 최치원 편지의 이 부분이 그대로 등장한다. 당나라의 연호인 '의봉 3년'이란 언제인가? 서기 678년이다.
보장왕이 부흥운동을 벌였던 바로 다음 해였다. 이것은 '구당서(舊唐書)'를 근거로 한 발해의 건국 연대인 698년보다 20년이나 앞선 때가 된다. 그런데 '구당서'가 10세기에 편찬된 기록인 데 비해 최치원은 9세기 사람이다.
그가 편지를 썼을 때 발해는 존재하고 있었다. 신빙성이 높은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678년에 세워진 것은 대조영(大祚榮)의 '발해'가 아니라 그 아버지 대중상의 '진국'이라고 보는 시각도 다소 근거를 지니게 된다.
대중상 부자(父子)가 아무 준비도 기반도 없이 고구려 유민들의 피란 과정에서 황급히 나라를 세웠다고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이후 18년 동안 대중상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사이 신라에서는 신문왕이 대구 천도를 추진하다 실패했고 당나라에선 66세의 황태후가 자기 두 아들인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위시킨 뒤 옥좌에 올랐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다.
사실은 이때 나라 이름을 주(周)나라로 바꿨지만 전통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여자가 잠시나마 왕조를 찬탈한 것을 인정하기 싫은 듯 그냥 당나라라고 칭한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도 당나라라고 부르기로 한다.
측천무후는 반대파를 탄압하는 공포정치를 펼치는 동시에 당 태종의 뒤를 이은 안정적 치세(治世)를 이루려 했다. 한족(漢族)의 자만심이 턱없이 높아졌는데 영주도독 조문홰(趙文 )도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당나라 동북방의 요충지인 이곳에서 조문홰는 이민족을 노골적으로 학대했다. 서기 696년, 마침내 발해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주의 거란족 추장 이진충(李盡忠) 등이 반란를 일으켜 조문홰를 살해했다.
의외로 거란의 기세가 강해 측천무후는 돌궐에까지 병력을 요청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 전화(戰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주에 살고 있던 고구려 유민 3만 호의 운명은? 1호를 5인 가족으로 잡는다면 그 인구는 무려 15만명이 된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대중상이었다. 그가 원래 영주에 있었든(한국) 백두산 근처에서 급하게 군사를 이끌고 영주로 갔든(북한), 이제 그 많은 유민들을 이끌고 대탈출작전을 감행해야 하는 지도자로 떠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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