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29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0>후고려기(後高麗記)(3) 


<영순태씨 족보.>
 
유득공이 《발해고》를 지을 때에 참조한 책 중에는 의외로 《영순태씨족보》도 있었다. 족보라는 책은 사실 '계보전승'의 속성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내용에 그닥 신빙성을 두기는 어렵다. 수식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만 봐도 그렇다. 편찬 책임자였던 황족 사인(舍人, 도네리) 친왕을 위시한 편찬당국이 참조한 서적들은 주로 자기네들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각종 공식문서와 구사(舊辭), 그리고 유력 씨족들에게 제출하게 한 '가기(家記)', 즉 각자의 집안내력을 적은 족보 비슷한 것으로 《니혼쇼키》 안에 드문드문 인용되어 있는 소위 '백제삼서'라는 것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왕족과 귀족ㅡ목례씨 일족과 곤지왕 일족, 그리고 백제왕 선광의 후손들이 자신들 집안의 내력을 모아 편찬한, 엄밀한 의미의 '족보'였다고 할 수 있다.
 
 윤색 심하기로는 동양 삼국에서 《니혼쇼키》만한 책도 없다지만, 변명거리를 주자면 저들이 인용한 원사료부터 조금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기초공사 부실하면 집 무너진다고, 실상 족보라는 게 얼마나 자기들 조상들의 좋은 점은 최대한 드러내 칭찬하려고 하고 나쁜 점은 어떻게든 숨기거나 돌려서 말하려고 하는지, 정부가 자기네 정책 선전하는 것만큼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록된 내용 자체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건,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우리 조상님들 옛말씀마따나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해 좋은 모습만 기억하고 좋은 모습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후손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바로 가전(家傳)이라는 놈이다. 아버지가 도둑질을 했어도 아들은 그걸 최대한 감춰주고 덮어주는 것이 참된 인(仁)이라는 것이 공자님 말씀이지만, '객관성'과 '사실성'이 최대한 보증되고 담보되어야 하는 역사서 본연의 목적상 집안에서 전해지는 가전들은 보통 역사책의 몇 배는 더 되는 감정이 필요하다.
 
《삼국사》의 저자인 부식이 영감도 김유신열전을 지으면서 김유신의 후손이 지은 10권짜리 《행록(行錄)》을 참조하는데, 무슨 책에 "꾸미고 지어넣은 말이 수두룩하다"고 말미에 토로하고 있을 정도로 가전에는 실제 사실을 알기 어렵게 만드는 온갖 수식들이 들어가는 법이다.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완전히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내용들도 그 가전 속에서 드문드문 나오곤 한다. 가전의 강점은 적어도 자신들의 가계나 조상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철저할 정도로 세심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파고들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는 유추해낼 수가 있다.
 
지금 남아있는 발해 대씨 일족의 족보인 《영순태씨족보》나 《협계태씨족보》역시 그들 일족의 시조를 대조영이 아닌 걸걸중상으로 잡고, 둘은 부자관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반란이 시작된 바로 그 시점에 걸걸중상이 자신의 일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발했다고 해도 가는데 1년 정도는 넉넉잡아 쳐줘야 할 것이다. 혼자 가는게 아니니까. 발해 건국의 기폭제라 할 수 있는 이진충-손만영의 반란이 일어난 시점과 《류취국사(뤼죠고쿠시)》의 발해건국시점이 차이가 나는 것은 그렇게 아귀를 맞춰보면 된다.
 
아버지와 자식간에 성이 다른 것도 조금 걸린다. 요즘에야 걸걸중상을 대중상이니 대걸걸중상이니 해서 대조영과 같은 성씨로 보고 그렇게 부르고 사극 <대조영>(2007)에서도 걸걸중상의 이름을 '대중상'으로 불렀다지만(무슨 상도 아니고) 지금 남아있는 기록 가운데 그렇게 부른 흔적은 없다. 그는 그냥 걸걸중상일 뿐이다. 걸걸이 갑자기 대(大)로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 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혹자는 대조영과 걸걸중상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없는, 부자지간도 뭣도 아닌 처음부터 남남이었던 사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걸걸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일까? 아니면 말갈말일까? 말갈을 아무리 고려 지방민을 낮춰부르는 비속어로 보려고 해도 둘 사이에 너무 차이가 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에서 사투리 차이가 아무리 나도 결국 뿌리를 찾아보면 같은 말에 어원을 둔 것이 많은데, '걸걸'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에서 '크다'라는 말과 아무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너무도 이질적인 단어가 아닌가.
 
[高王諱祚榮, 震國公子也. 嘗爲高句麗將, 驍勇善騎射. 及震國公卒, 乞四比羽敗死, 祚榮遁.]
고왕(高王)의 휘는 조영(祚榮)으로 진국공의 아들이다. 일찌기 고려의 장수였으며, 날래고 용감한데다 말 타고 활쏘는 것[騎射]이 뛰어났다. 진국공이 죽고 걸사비우가 전쟁에서 죽자, 조영이 뒤를 이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고려와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조영 때부터다.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지만, 그나마도 《구당서》에는 나오지 않고 《신당서》에만 나온다. (서로 연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까지 나왔다.) 《협계태씨족보》에는 대조영의 어머니 성이 시(時)씨였다고만 나온다. 꿈에 북두칠성의 정기를 삼키고 그를 잉태했는데, 태어날 때에 온 방에 상서로운 자줏빛 기운이 가득했고, 태어난 아이의 얼굴이 검게 옻칠한 것마냥 번들거리고, 잔등 왼쪽에는 해, 오른쪽에는 달이 새겨져 있었다나? (있는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재미로 스쳐가는 이야기 정도로나 소개할 뿐이다.) 아버지 대중상이 고려가 망한 뒤에 영주에 와서 '살았다'는 것과 비교하면, 대조영은 고려에서 '장수'까지 지냈다고 했다. 일단 실질적으로 그는 발해의 초대 건국자였다.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본인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대(大)'라는 한문식 외자성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정도일까? 그러고보니 고려에서도 추모왕이 아버지와는 다른 성씨였구나 참.
 
 '고(高)'나 '대(大)' 모두 '크다(Big)', '위대하다(Great)'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요놈, 《삼국유사》. 일연 땡중이 쓴 역사책으로 《삼국사》에 비하면 자주적인 입장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발해를 홀대했다는 점에서는 《삼국사》와 그닥 다를 것도 없다. 일연이라는 중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기보다는 일단 중국의 여러 문헌과 우리나라의 여러 전승들을 뽑아 기록한 것이고, 대체로 《삼국사》에 없는 자료가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
 
[渤海本粟未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로되[粟未靺鞨] 그 추장 조영 때에 나라를 세워 진단(震旦)이라 일컬었다.
 
 《삼국유사》가 《통전》을 인용해서 적은 발해의 계보다. 흔히 《통전》이라고 하면 당조의 재상이었던 두우(杜佑: 735∼812)가 766년부터 30여년에 걸쳐 편찬한 제도사(制度史)를 말한다. 발해가 처음 건국될 때의 국호는 진(震)이라 했지만, 진 말고도 뒤에 '단'자가 하나 더 있어서 '진단'이라고 했다. 일연 땡중은 발해에 대해서 "발해는 곧 말갈 별종인데 그 갈라지고 합친 것이 서로 같지 않을 뿐[勃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이라고 딱 정의를 내려버린다.
 
진단 하면 진단(震檀)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은 진단(震旦)이라는 말은 인도에서 중국을 가리켜 부르던 말이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진단'은 진(震)은 진(秦)의 음이 전와(轉訛)한 것이며 '진토(秦土)', 즉 '진나라 땅'을 의미하는 범어 '치나스타나(Chīnasthāna)'에 중국 사람이 한자를 갖다맞춘 것.('震'자를 쓴 것은 '해가 뜨는 지방'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振旦' '眞旦' 등으로 쓴 걸 보면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나) 그렇다고 해도 뭐하러 굳이 인도에서 중국을 가리키는 단어를 가져다 자국 국호로 삼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치원의 《계원필경집》도 진국(振國)이라고만 했을 뿐 진단이라는 단어는 없다. 《문헌통고》(1319)에서는 진조(震朝)라고 했는데 '조(朝)'와 '단(旦)'이 똑같이 '아침'을 뜻하는 글자라고 해서 혼동한 듯 하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남아있는 기록들이, 발해나 그 지배층인 대씨 일족들을 악착같이 말갈족이라고 몰아붙이는 듯 하면서도 정작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에 대해서만큼은, 말갈이 아닌 고려인이라거나 고려와 관련이 깊다거나 한 점을 강조하는 듯한 기록들이 주류를 이룬다. 당장 《삼국유사》, 정확히는 《삼국유사》가 인용한 《신라고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의 성씨는 대(大)씨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太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勃海)라 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인용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1, 말갈발해
 
 《신당서》에서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존재"라고 말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대조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씨 일족 전체에 대한 것이지만, 대씨 일족 전체가 속말말갈이라고 해서 대조영까지 속말말갈인이 될 수도 없는 것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중간에 대조영의 직계가 끊어져서 양자를 들여 후손을 삼았다는 법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혈연상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선대로부터 이어지는 '계승성'을 말하기 위해서 성씨를 사칭하는 것은 예로부터 흔히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말갈족만 해도 《송막기문》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대다수 피지배층이 자기 주인의 성씨를 따르는 일도 적지 않았는데, 지배층은 소수 고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대다수 말갈족인 상황에서 말갈족들이 대씨 성을 쓴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대조영의 후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조영 자신이 말갈족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渤海本粟末靺鞨也. 唐武后時, 高句麗人大祚榮走保遼東.]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당 무후 때에 고구려 사람[高句麗人] 대조영이 도망쳐서 요동을 차지하였다.
《고려사(高麗史)》권1, 태조 8년 가을 9월
 
발해에 대해 다소 무심했던 사람들이 펴낸 《고려사》만 해도, 발해를 속말말갈이라 부르면서도 정작 건국자 대조영에 대해서는 '고구려 사람[高句麗人]'이라고 적는다. 《고려사》뿐 아니라, 《구당서》와 《신당서》, 《오대회요》나 《입당구법순례행기》, 《삼국유사》및 《계원필경》을 보면 '발해'라는 나라와 '대씨' 일족에 대해서는 말갈족의 나라라느니 고려의 잔당들이라느니 하고 갈팡질팡하면서도, 대조영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일관되게 '고려 사람[高句麗人]'(《고려사》), '고려별종[高麗別種]'(《구당서》) 혹은 '고려의 옛 장수[高麗遺將]'(《신라고기》)라고 하는 식으로 '고려'와의 관계를 빠짐없이 적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최치원이 문집에서 증언한 "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이라는 말도 "그(말갈) 수령인 걸사우와 대조영 두 사람"이 아니라 "그 수령 걸사우와 (고려 장수인) 대조영 두 사람"이라는 말로 해석이 되어야 하지 않을지.
 
요컨대 '대씨'라는 성을 칭하는 일족은 후대에 내려가면서 고려인에서 말갈인으로 그 속성에 변화가 있었지만, 대조영 자신은 적어도 '고려인'이라는 속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조영을 '추장(酋將)'이라고 부른 것도, 지금 들으면 한족에 비해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두목'이나 '우두머리'와 같은 의미로 미개해보이는 원시'부족'들을 이끄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단순히 대조영에게 '추장'이라는 단어를 붙여 썼다고 해서 대조영이 '말갈추장'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進攻白崖城. 負山厓水險甚. 帝壁西北, 虜酋孫伐音, 陰焉降. 然城中不能一. 帝賜幟曰 "若降, 建于堞以信俄." 而擧幟, 城人皆以唐兵登矣乃降.]
나아가 백암성[白崖城]을 공격하였다. 성이 산을 등지고 물가에 닿아있어 매우 험하였다. 황제가 성벽 서북쪽에 있는데, 추장[虜酋] 손대음[孫伐音]이 몰래 항복을 꾀했다. 성안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태종은 깃발을 주며 말했다.
“항복하려거든 이걸 신호로 성가퀴에 세워라.” 
조금 뒤 그 기가 들리니 성 사람 모두가 당병이 온 줄 알고 항복했다.
《신당서》권제220, 동이열전 고려
 
 《신당서》에 실려있는, 백암성 함락 기사다. 여기서 고려의 백암성주로서 당에 항복했던 손대음(손벌음이라고도)의 기사에서 손대음은 여기서는 '노추(虜酋)' 즉 '오랑캐 우두머리'로 묘사된다. 그나마도 《구당서》에 '성주(城主)'라고 적혀있던 것을 고친 것이다.(《삼국사》에서는 《구당서》를 따라 '성주'로 적었음) 당 태종에 의해서 백암성에 설치된 암주도독부의 자사로 임명된 손대음을 고려 사람이라고 보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지만 구태여 '성주'라고 쓴 것을 '오랑캐 우두머리'로 고쳐쓴 점에서 《구당서》와 《신당서》의 대(對)고려 인식차이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항복 순간을 묘사한 장면도 《구당서》가 좀더 자세하다)
 
'추장'이니 '노추'니 하는 단어들은 모두 중국이나 신라의 입장에서는 '넌 나보다 격이 떨어져'하고 상대측 지도자들을 낮춰부르는 멸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고려의 백암성주나 발해의 대조영은 자신들이 '추장'이라 불렸다고 그러면 지하에서 펄펄 뛸 게다. 최치원은 고려 유민과 함께했던 걸사비우를 '수령(首領)'이라고 불렀는데 이 '수령'이라는 말은 고려와 발해 두 왕조에 걸쳐 존재했던 봉호였다. 《삼국사》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천남산에게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갖고 가서 이적에게 항복하게 했다[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詣勣降]"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후 발해의 무왕이 일본에 보낸 사신 중 한 명이었던 고제덕의 직위도 수령이었다. '지도자'라는 뜻은 확실하지만(북한의 그 양반을 말하는 게 아니니 국보법으로 날 고발하거나 처넣는 일만은 제발...) '수령'이 고유명사로 자리잡은 독립된 작위인지 아니면 단순히 특정무리의 '수장(Head)'을 아울러 나타낸 단어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늦어도 발해 초엽에는 제국의 하급관리 내지는 지방에 있는 말갈족 부락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단어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유취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종족들의 경우 그들의 지도자 계급을 나타내는 의미로 쓴 '수령'이라는 단어가 있는지는 아직 찾아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고려나 말갈, 그리고 발해의 경우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단어가 '수령'이라면 이 '수령'이 고려와 발해, 그리고 말갈의 영속성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 열쇠가 되어줄 지도 모르겠다. 발해가 고려의 제도를 일부 이어받았으며 고려가 말갈을 '행정지배'하고 있었던 증거로서 말이다. 고대 국가의 행정지배는 반드시 중앙정부로부터의 '봉작'을 수반했으니까, 고려가 말갈을 행정지배했고 그에 수반해서 준 관직이 '수령'이라면 말갈의 족장으로서 '수령'이었던 걸사비우도 고려 조정으로부터 '수령'이라는 관직을 받았다고 볼 여지도 있다. 보장왕이 연남산과 동행시켜서 보낸 '98인의 수령'이라는 것도 기실은 고려 휘하에 들어가 있던 말갈족의 지도자였는지 모르겠다. 이후 고려부흥운동에서 보장왕이 말갈족에 취한 제스처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믿을만한' 놈들이니까 같이 부흥운동(당조에서 보면 반역)을 같이 하자고 했겠지, 아닌가?
 
[冬, 築松岳, 牛岑二城.]
겨울에 송악(松岳)과 우잠(牛岑)의 두 성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효소왕 3년(694)
 
신라는 신문왕 이래로 한창, 당의 제도를 모방한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마련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귀척들이 지니고 있던 녹읍을 폐지하고 오늘날의 '월급'과 같은 '관료전'을 지급하는가 하면, 각지를 순행하면서 성을 쌓기도 하고 심지어는 수도까지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삼국사》한주지리지에서 송악성과 우잠성의 정보를 찾아봤는데 이곳은 모두 고려령에 속하는 곳이었다. 지금의 개성인 송악은 고려 때에는 부소갑(扶蘇岬)이라 불렸고, 우잠성은 훗날 경덕왕 때에 우봉현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이 이름 그대로 쓰였으며 지금의 황해도 금천의 우봉면이 이곳에 해당한다. 우잠성이라 불리던 시대에는 인근의 3개 현을 우잠성이 모두 감독했는데, 장항(獐項)이라 불렸던 북한 장단의 강상면 임강리와 장천성(長淺城)이라 불렸던 경기도 파주 장남면, 마전천(麻田淺) 혹은 이사파홀(泥沙波忽)이라 불렸던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이 모두 우잠성 관할이었다. 
 
발해와 관련이 없음에도, 고려 옛 땅이라는 연고만으로 실어놓기는 했는데, 훗날 발해와 고려가 서로 같은 동족인 것처럼 하면서도 서로 이질적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단순히 두 나라의 구성 종족이 달랐기 때문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武后萬歲通天元年, 契丹松漠都督李盡忠, 歸誠州刺史孫萬榮, 叛唐陷營州, 殺都督趙文翽.]
무후(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 거란의 송막도독(松漠都督) 이진충과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 손만영이 당에 반기를 들고 영주를 함락시켜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진국공(震國公) 만세통천 병신(696) 5월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 거론되는 저 사람, 이진충과 그의 처남 손만영. 《당서》북적열전 거란조에 보면 나오는 인물들인데, 발해의 건국과 관련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대중상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게 해준 계기이기도 하니까, 일단은 간략하게 소개를 해야 될 것 같다. '송막도독'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진충은 거란 사람이다. 보장왕 3년(645) 당 태종이 고려를 정벌할 때, 그는 거란족과 해족까지 동원해 대고려 전선에 쏟아부었다. 안시성에서 눈 하나 잃고 당 태종이 귀환할 적에 영주를 들렀고, 그때 거란 추장 굴가(窟哥)에게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당은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기미(羈縻) 정책을 썼다. 독립국으로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직할령으로 편입시키자니 부담스러운 것들에게 일단 형식적으로는 당의 군현제에 따라 부(府), 주(州), 현(縣)을 두고, 이민족의 왕이나 추장을 그 책임자인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 같은 것으로 임명해 자치권을 준 다음 일종의 '보호령'으로서 조정 직속의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감독시키는 방식이다. 돌궐, 회골(위구르), 거란, 중앙아시아 여러 오아시스를 비롯해, 토욕혼(티벳)과 먀오족(苗族)의 땅까지 이런 식으로 기미정책에 따라 통치하는데, 당조가 한창 번창할 무렵에는 이런 기미주가 856개나 되었단다.
 
 거란의 대추장이자 돌궐의 욕흘주(辱紇主) 벼슬을 갖고 있던 곡거(曲據)가 당에 투항해 왔을 때도, 당 조정은 그 부족을 현주(玄州)로 삼고 곡거에게 자사를 제수한 뒤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에 예속시켰다. 굴가가 부족을 이끌고 복속해왔을 때에도 마찬가지 기미정책으로 당은 그 땅에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고, 거란의 아홉개 부족을 당의 그것과 같은 주로 편재해서 도독부에 소속시킨다. 그리고 돌궐에서 욕흘주 벼슬을 받았던 추장들을 각 주의 자사로 임명한다. 물론 그들의 자치권은 인정한 채 말이다.(티벳 사람들이 그렇게 소망해도 갖지 못하는 것을 당 조정은 저렇게 쉽게 나눠줬었지) 고려와 백제를 멸한 뒤에도 그 땅에 안동도호부니 웅진도독부니 하는 것을 설치한 것도 기미정책의 일환으로, 신라왕에게는 계림주대도독이라는 지위를 주면서 서라벌을 당의 일개 도독부로 취급했다. 물론 이딴식의 통치방식은 신라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 채 '계림주대도독'이라는 명목상의 관직만 남기고 신라 전역의 지배권은 신라 조정이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때 항복한 거란족 굴가의 후손으로서 좌위장군 탄한주자사 귀순군왕에 책봉된 고막리(枯莫離)와 좌위대장군 이진충, 그리고 그보다 앞서 말갈 추장 돌지계(突地稽)와 함께 당 조정에 사신을 보낸 거란 대추장 손오조의 후손 귀성주자사 손만영. 두 사람 다 당의 이름을 갖고 당의 벼슬을 하고 있긴 했지만 거란족의 일파인 셈이다. 하지만 신라와 마찬가지로 거란족은 당의 기미정책에 순순히 응하지는 않았던 듯, 굴가가 죽은 뒤 곧바로 거란족은 해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행군총관(行軍總管) 아사덕추빈(阿史德樞賓) 등이 송막도독 아복고(阿卜固)를 사로잡아 낙양에 보내버림으로서 반란은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굴가의 후손인 진충은 무사히 선대의 지위를 이어받아 거란족을 다스리는 송막도독이 되었다.
 
《당서》에 전하는 바, 이진충과 손만영 두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당 조정의 차별이었다. 이 무렵 영주를 다스리던 도독은 조문홰(趙文翽)였는데, 거란열전에는 흉년으로 거란족이 굶주리는데도 진휼하기는 커녕, "교만하여 자주 휘하의 거란인 추장들을 모욕하였으므로 이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고 적고 있다.(사실 687년에 돌궐이 부흥하면서 당의 북방 기미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된 것도 한 가지 이유에 속하지만)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 어디 가나. 중화사상에 입각해 여러 이민족들을 모두 오랑캐로 여기고 무시하는 행위는 결국 반발만을 불러올 뿐이다. 티벳이 왜 저렇게 분리독립하려고 애쓰는데.(사실 지금까지 티벳이 많이 참은 거다.) 마침 인질로 당에 입조한 적이 있어 중국의 지세를 자세히 알던 손만영과 짜고서, 이진충은 마침내 거병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들을 모독하던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차지해 반란을 일으켰다. 만세통천 2년 5월의 일이었다.
 
하북 지방을 중심으로 난은 4년 동안 이어졌다. 이진충은 영주에 머무르면서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일컫고서, 손만영을 장수로 삼아 당의 변경을 공격해 들어갔고(2주일도 못 되어 10만에 가까운 무리들이 이진충에게 가담했다니, 당의 기미책이 이민족들에게 얼마나 불만스러웠는지 대충 짐작간다) 이들은 8월에 평주의 협석곡에서 당군을 패배시켰는데, 9월에 청변도행군대총관으로 거란을 토벌하러 나선 건안군왕 무유의의 참모였던 진자앙의 문집에 보면 당군이 이때 두려워한 것은 거란이 서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요동 방향 말이다. 677년 이래로 안동도호부는 신성에 있었는데, 《자치통감》에 보면 이미 9월에 안동도호부가 거란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바가 있었다. 요동이 전란에 휩싸여 있었음은 진자앙의 문서ㅡ697년 3월에 요동주 고(高) 도독에게 보낸 총공세 전략에 대한 관고에서 거란을 합공하자고 한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물론 이들은 평주의 동협석곡에서 거란에게 패했지만) 안동도호부가 요동 지역 기미주를 총괄하는 기구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보고와 중앙의 지시가 안동도호부를 거치지 않고 요동도독과 청변도대총관 사이에 직통으로 오가고 있음은 이미 안동도호부가 기미주 총괄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해 10월에 이진충은 전사했지만, 지금의 북경 근처인 영평에서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군은 당의 왕효걸이 이끄는 17만 당군을 궤멸시킬 정도로 엄청난 군사력을 과시했다. 그렇게 연이은 전승을 기록하면서 해족을 비롯한 인근 유목민들이 거란족에게 가담해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지만, 거란족은 나라를 세운다는 목표까지 세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의 학정과 종족차별에 분개한 것이지, 그들의 최종 목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당 자체의 멸망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전쟁은 군사적인 승리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仲象懼, 與靺鞨酋乞四比羽, 及高句麗破部, 東走度遼水, 保太白山之東北. 阻奧婁河, 樹壁自固.]
중상은 두려워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고려의 남은 무리[破部]와 함께 동쪽으로 도망쳐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에서 보전하였다.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아 스스로 지켰다.
《발해고》 군고(君考), 진국공(震國公)
 
기회였다. 거란족의 반란은 요동 지역의 옛 고려인과 말갈족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방벽을 만들어 주었다. 서기 696년 5월. 영주를 떠난 걸걸중상의 무리는 동쪽으로 180리 연군성, 여라수착을 지나 옛 고려의 요수를 건너, 안동도호부(요양)와 요동도독부(무순)의 북쪽 길을 가로질러 최초로 요동 지역에 정착했다. 대중상이 도망쳤다는 오루하는 대석하, 읍루하(揖婁河)ㆍ홀한하(忽汗河)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송화강 지류의 하나인 목단강(牧丹江)이라고도 한다.
 
거란의 기세에 눌려 요동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당은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사신을 파견해 원병을 청했고, 돌궐이 출현하면서 거란의 휘하로 몰려들었던 해족은 곧바로 거란을 떠나 당-돌궐에게 가서 붙어버린다. 당과 돌궐, 해족에게 공격당하면서 거란은 밀리기 시작했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손만영의 심복 하아소가 사로잡히기에 이르렀다. 손만영은 수십 기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그의 종에게 죽임당하고, 반란은 1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거란의 반란을 진압한 당은 기세를 몰아 요동에 집결해있던 반당 세력ㅡ대부분 고려계로 이루어져 있던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무리를 공격했다.
 
[武后封仲象爲震國公, 比羽爲許國公. 比羽不受命. 武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 中郞將索仇, 擊斬比羽. 是時仲象已卒.]
무후는 중상을 진국공(震國公), 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였다. 비우는 명을 받지 않았다. 무후는 옥금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 중랑장(中郞將) 소구(索仇)에게 명하여 비우를 쳐서 죽였다. 이때 중상은 이미 죽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진국공(震國公)
 
측천무후가 두 사람에게 내려준 진국공이니 허국공이니 하는 것은 사실 채찍으로 때리기 전에 내놓는 당근이었다. 국공(國公)이라는 지위는 왕 아래에 있는 3등 작위인데, 반란자에 불과한 이들에게 이만큼의 작위를 내려준 것은 그들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인정해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만약 받지 않으면 토벌할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걸사비우는 명을 받지 않았다. 마침내 채찍을 꺼내든 측천무후. 거란족의 항복한 장수 이해고와 소구 두 장수를 시켜 그들을 공격하게 했고, 걸사비우는 그 싸움에서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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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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