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C%A4%91%EC%83%81
대중상
대중상(大仲象, ? ~ 698년) 혹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고구려의 장수이자 고구려의 부흥을 이끈 지도자이다. 대중상은 고구려의 동화된 속말말갈(粟末靺鞨)인 고구려 장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중상은 발해(渤海)의 시조인 대조영(大祚榮)과 대야발 형제의 부친이다.
그는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유민 및 속말말갈의 지도자였으며, 측천무후로부터 진국공(震国公)에 봉작되었으나 거절했다. 대조영 등과 함께 발해 건국을 주도했으나 발해가 건국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생애
가계 배경
대중상의 출신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고구려의 동화된 속말말갈(粟末靺鞨)인 고구려 장수 이며, 이미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어 스스로 고구려에 대한 귀속의식(歸屬意識)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선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후에 고려로 귀순한 대광현의 후손인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등은 그를 시조로 하여 가계 대수를 계산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이후 당나라(唐)는 거의 매년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는 항상 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666년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간에 큰 권력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고구려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고, 이때 권력 싸움에서 진 연개소문의 장자인 연남생(淵男生)이 당나라에 항복해왔다. 667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이듬해인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유민을 여러 지역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대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여러곳으로 분산하여 끌고 갔는데, 대중상 부자도 요서(遼西)의 영주(営州)로 끌려갔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이를 부인하며 이 시기에 대중상 세력이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696년 거란의 가한 이진충(李尽忠)이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대중상 부자는 이 때를 틈타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이후 대중상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로 이고 만주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활동하였다.
측천무후(側天武后)는 이들을 달래고자 대중상을 진국공(震国公)에 봉하고,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허국공(許国公)에 봉하였으나, 이에 따르지 않자 거란 출신의 이해고(李偕固)를 보내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을 토벌하고, 탈출한 고구려 유민을 추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걸사비우와 함께 전사하였다. 혹은 걸사비우 전사 이후 고구려 유민과 남은 말갈족을 이끌고 저항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망 당시 그의 정확한 연령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7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된다.
발해의 건국
고구려 유민들은 대중상과 걸사비우를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계속 고구려 영토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군대들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당나라 이해고 추격군과 큰 전투를 치른다. (천문령 전투) 대조영은 이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다.
이후, 대조영은 도읍을 동모산(東牟山)으로 정하고 국호도 발해(渤海)로 하였다.[1]
기타
위서라고 알려진 환단고기의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그가 고구려 멸망 후 후고구려를 세우고 대진국이라 했다고 하며 환단고기의 대진국역대제왕연표에서는 그가 죽자 아들 대조영이 아버지인 대중상에게 묘호는 '세조(世祖)', 연호는 중광(重光), 별칭은 진국공(振國公)이라고 하였으며, 시호는 진국왕 또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하나 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진 의견은 아니다. 대중상은 실제 당 고종때 진국공의 작위를 받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다.
가계
부인 : 미상
관련 항목
주석
진국공-걸걸중상 관련글
걸걸중상(乞乞仲象) - 한국역대인물,한국사DB,위키 http://tadream.tistory.com/449
대중상 - 위키 http://tadream.tistory.com/448
발해, 그 이전에 대조영 아버지의 '진국'이 있었다? - 유석재 http://tadream.tistory.com/46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9>후고려기(後高麗記)(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61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0>후고려기(後高麗記)(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639
발해의 왕 목록 http://tadream.tistory.com/450
발해의 건국 http://tadream.tistory.com/64
대중상
대중상(大仲象, ? ~ 698년) 혹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고구려의 장수이자 고구려의 부흥을 이끈 지도자이다. 대중상은 고구려의 동화된 속말말갈(粟末靺鞨)인 고구려 장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중상은 발해(渤海)의 시조인 대조영(大祚榮)과 대야발 형제의 부친이다.
그는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유민 및 속말말갈의 지도자였으며, 측천무후로부터 진국공(震国公)에 봉작되었으나 거절했다. 대조영 등과 함께 발해 건국을 주도했으나 발해가 건국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한편,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관계에 대해서 중국과 한국, 일본의 학자들이 여러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대중상에게 내린 벼슬인 진국공이라는 직임은 곧 발해의 실질적인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해의 시조가 대조영이 아닌 대중상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있다. 대중상은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생애
가계 배경
대중상의 출신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고구려의 동화된 속말말갈(粟末靺鞨)인 고구려 장수 이며, 이미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어 스스로 고구려에 대한 귀속의식(歸屬意識)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선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후에 고려로 귀순한 대광현의 후손인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등은 그를 시조로 하여 가계 대수를 계산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이후 당나라(唐)는 거의 매년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는 항상 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666년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간에 큰 권력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고구려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고, 이때 권력 싸움에서 진 연개소문의 장자인 연남생(淵男生)이 당나라에 항복해왔다. 667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이듬해인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유민을 여러 지역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대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여러곳으로 분산하여 끌고 갔는데, 대중상 부자도 요서(遼西)의 영주(営州)로 끌려갔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이를 부인하며 이 시기에 대중상 세력이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696년 거란의 가한 이진충(李尽忠)이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대중상 부자는 이 때를 틈타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이후 대중상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로 이고 만주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활동하였다.
측천무후(側天武后)는 이들을 달래고자 대중상을 진국공(震国公)에 봉하고,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허국공(許国公)에 봉하였으나, 이에 따르지 않자 거란 출신의 이해고(李偕固)를 보내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을 토벌하고, 탈출한 고구려 유민을 추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걸사비우와 함께 전사하였다. 혹은 걸사비우 전사 이후 고구려 유민과 남은 말갈족을 이끌고 저항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망 당시 그의 정확한 연령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7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된다.
발해의 건국
고구려 유민들은 대중상과 걸사비우를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계속 고구려 영토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군대들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당나라 이해고 추격군과 큰 전투를 치른다. (천문령 전투) 대조영은 이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다.
이후, 대조영은 도읍을 동모산(東牟山)으로 정하고 국호도 발해(渤海)로 하였다.[1]
기타
위서라고 알려진 환단고기의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그가 고구려 멸망 후 후고구려를 세우고 대진국이라 했다고 하며 환단고기의 대진국역대제왕연표에서는 그가 죽자 아들 대조영이 아버지인 대중상에게 묘호는 '세조(世祖)', 연호는 중광(重光), 별칭은 진국공(振國公)이라고 하였으며, 시호는 진국왕 또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하나 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진 의견은 아니다. 대중상은 실제 당 고종때 진국공의 작위를 받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다.
가계
부인 : 미상
관련 항목
전임 고구려 보장왕 (사실상) |
제1대 발해 진국공 668년? - 698년 |
후임 발해 고왕 (발해 건국) |
주석
- ↑ 서병국 (2005년 1월 25일). 《발해제국사 (서해역사책방 11)》. 서해문집, 416쪽. ISBN 8974832429
- ↑ 협계 태씨, 영순 태씨 족보에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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