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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大祚榮, ?~719, 재위 698~719)과 발해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혀 있었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그 유민들은 강제로 이주하였고 수도였던 동경성은 불타버려 발해인들의 역사는 후세에 전해지지 못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는 만주∙연해주∙북한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발해, 독립된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국을 칭했던 발해가 분명히 고구려인이 세우고, 고구려인이 이끌고, 고구려를 계승했던 우리의 역사임을 분명히 밝혀나가고 있다. 그런 발해 연구의 맨 앞에 대조영이 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아울러 나라를 세우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무너진 이후 고구려 옛 영토 대부분은 신라와 당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힘의 공백 지역으로 남았다. 신라는 평양 이남을 차지했을 뿐이고 당나라 또한 만주 지역을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나서, 그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켰다. 특히 요하 서쪽의 영주 지방으로 이주한 숫자가 적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거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원주민인 거란족, 그리고 이주해온 고구려 유민, 또 고구려에 예속되었거나 협력해온 말갈족 등이 영주지방에 섞여 살던 중에 696년 당나라에 대한 대규모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영주도독 조문홰가 가혹한 통치를 하자 거란인 이진충, 손만영 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했다. 영주 일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인 걸사비우는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했다. 대조영은 걸걸중상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유민을 이끌었다.

 

당나라는 걸걸중상에게 진국공을, 걸사비우에게 허국공을 책봉하며 회유하려 했으나, 이들은 거부했다. 회유책이 실패하자 당의 측천무후는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 출신 장수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어 토벌하도록 했다. 이해고는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을 먼저 공격했다. 말갈 부대는 힘껏 싸웠으나 당의 대군을 물리치지 못했고, 이 싸움에서 걸사비우가 죽었다.

중국 지린성에서 발굴된 발해 황후의 금제 머리 장식.

대조영은 패전한 말갈족을 흡수하여 대열을 재정비하며 동쪽으로 진군했다. 천문령에 도착한 대조영은 산세가 험하고 매복 습격이 유리한 그곳에서 추격해오는 당나라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곳곳에 고구려 군사와 말갈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날쌘 군사 3천 명을 선발해 당나라 군사를 유인하도록 했다. 말갈군을 격파하고 기세가 오른 당나라 군사들이 유인 부대를 따라 천문령 골짜기로 몰려들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 군사와 말갈 군사들은 당나라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 전투로 당의 군사들은 거의 전멸하고 이해고 혼자 돌아왔다고 당의 기록은 전한다. 또한 이 기록은 고구려군을 지휘한 대조영이 날쌔고 용감하며 용병술에 뛰어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조영이 군사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아 걸걸중상도 당나라와의 전투 중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문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대조영은 자신의 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무리를 이끌고 다시 동쪽으로 향한 대조영이 동모산에 성을 쌓고 터전을 마련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옛 고구려 땅에 흩어져 있던 유민들이 모여들었다. 698년 드디어 대조영은 나라를 세우고 발해라 했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중국 쪽의 기록에 따라, 처음 정한 국호는 진국이며 수십 년 후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봉함으로써 국호가 발해로 바뀌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들은, 진국은 걸걸중상이 세운 나라로 발해 이전의 소국을 말하며, 698년 대조영이 세운 나라의 이름은 처음부터 발해였다고 주장한다.



발해와 대조영, 과연 어느 나라 역사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발해는 현재의 만주 동부 지역에 중심을 두면서, 남쪽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북쪽으로 흑룡 강, 서쪽으로 요동, 동쪽으로는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 그러니까 만주∙연해주∙북한을 아우르는 넓은 땅에 걸쳐 있던 대제국이었다. [신당서]는 발해 전성기의 영토가 사방 5천 리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을 아우르는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보니, 현재까지도 세 나라 모두 발해가 자기들의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말갈 사람이고, 말갈족의 후예가 만주족으로서 현재 중국 민족의 일원이니 발해는 자신들의 역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러시아 역시 대조영은 말갈 사람으로 그 후예가 러시아 민족의 일원이 된 연해주 소수민족이니 발해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말한다. 물론 남한과 북한은, 대조영은 고구려인이고 발해는 우리의 역사라고 믿는다.


뒤늦게나마 우리 역사로 인지한 발해사를널리 알리기 위해, 속초시는 2009년 발해역사관을 개관하였다.
(속초시 노학동 속초시립박물관)

그렇다면 대조영은 고구려인인가 말갈인인가?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는 각기 다른 기록을 전한다.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려별종(高麗別種)’이라 하여 고구려계로 전하지만, [신당서]는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붙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 ‘발해전’에 인용된 ‘신라고기’에서는 ‘고구려의 옛 장수’라 하여 고구려인이라 했다. 사실 현재 우리나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대조영이 말갈 출신인지 고구려 출신인지에 대한 이견이 있을 정도로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고 발해가 한국사에 속하고, 말갈인이라고 중국사나 러시아사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정복전쟁이 활발히 벌어지던 고대사회에서는 종족 간의 이합집산이 수시로 일어났다. 고구려만 해도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이 섞여 있던 나라였다.

 

대조영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발해를 이끌어갔던 집단이 고구려인들이고, 이들이 고구려를 잇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기록에 “그 나라는 말갈이 많고 고구려인이 적지만, 고구려인들이 모두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라고 했고, 최치원도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라고 했다. 또한 758년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하여 전달한 국서에 당시의 왕인 문왕은 자신을 ‘고려국왕’이라고 했다.


한편, 지금까지 발해에서 말갈계가 고구려계보다 훨씬 다수였다는 것이 정설로 인정받아왔으나, 근래의 연구들은 변경지방은 그랬을지 모르나 중앙은 고구려계가 훨씬 많았다고 봄으로써 발해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고구려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든 말갈인이든 고구려 장수 출신이었고, 발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고구려 유민들이었으며,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나라라는 것이다. 


15대왕 230년간 지속된 발해의 역사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던 대조영은 빠른 시간 안에 나라의 기틀을 잡고자 동부 만주 일대에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나라를 세우고서 곧 돌궐과 국교를 맺고 신라에도 사신을 보냈다.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우호를 지켜나갔다.

 

대조영은 719년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고왕(高王)이다. 그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 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가 제3대 문왕이 되었다. 이 무렵 어느 정도 국가기반이 확립되었다고 판단한 문왕은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먼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 6부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대외적으로는 동북 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를 설치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정비를 통하여 국력을 향상시켰다. 한편,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묘비가 1980년 발견되었는데, 그 비문에서 공주의 부왕과 조상을 황제라 칭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발해가 황제국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러시아연해주 중북부의 평지성곽인 콕샤로프카-1성 유적에서 발견된 고구려 양식의 쪽구들 유적. 발해의 유물로 추정된다.

문왕 이후 성왕∙강왕∙정왕∙희왕∙간왕∙선왕∙대이진∙대건황∙대현석∙대위해∙대인선이 차례로 즉위했다. 그 중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 세력을 복속시키고,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이에 맞추어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고, 이 무렵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 지방에 진출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 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925년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공격해 보름만인 이듬해 1월 15일 멸망시켰다. 15대 왕 230년간 지속한 발해의 역사는 이렇게 막이 내렸다. 



 윤희진/역사저술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국사 인물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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