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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왜 동해에 무덤을 썼을까?
13.02.12 17:58 l 최종 업데이트 13.02.12 17:58 l 하주성(tradition)
▲ 금구도 화진포 모래사장에서 바라다 본 금구도. 광개토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져 있다 ⓒ 하주성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時祥)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시인 묵객들이 찬한 화진포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 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 파도 2월 2일 찾아간 화진포 앞 바다의 파도 ⓒ 하주성
고성은 호수와 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전까지만 해도 현 속초시에 있는 영랑호가 간성군에 속해있는 호수였다. 조선시대 남인학자 이만부의<지행부록(地行附錄)>동계조에 보면 간성(수성)의 대표적인 3대 호수는 화진포(花津浦), 광호(廣湖 여은포라고도 불렀으며 현 봉포리와 용촌리 사이에 있는 석호이다), 영랑호(永郞湖)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화진포 앞쪽 동해바다를 보면 500m 정도 앞 해상에 1000여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능파'라고 하여서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해당한다.
금구도는 광개토왕의 무덤일까?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왕은, 이름은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 금구도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금구도라도 부른다고 한다 ⓒ 하주성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곳은 신라시대 수군 기지로 해안을 지키던 흔적인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는 섬의 중심부에서, 1997년 4월 와편과 주춧돌이 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반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후 2008년 10월에는 현장조사와 함께 2달간의 조사에서는, 건물지 및 우물지 고려시대 청자 유물 등이 발견이 되었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왕 3년인 304년 8월 경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년 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년(장수왕 2년) 9월 29일, 광개토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한다.
▲ 금구능파 금구도 주변의 파도가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속해있다 ⓒ 하주성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다만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들은, 왜 광개토왕이 사망을 한 지 2년이 지난 후에 이곳에 안장을 했을까? 초도(草島)라는 명칭이 갖는 의미가 혹 초분(草墳)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금구도라는 명칭도 왕(=今上)의 시신을 안장했다고 하는 금구(金丘), 금구(金柩)는 아니었을까? 등 많은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화진포에 세운 안내판을 보니, 고성군에서는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확인될 경우 원형복원을 하겠다고 적고 있다.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민족의 웅지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e수원뉴스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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