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3>제28대(마지막) 보장왕(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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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당과 한참 전쟁을 벌일 7세기 중반 무렵. 당에서는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 이치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역사책 읽다 보면 참 웃긴 것이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이 '고종'이라는 묘호 붙은 왕 치고, 정치 순탄하게 제대로 해먹은 왕이 없는지라, 이유를 말하자면 이들이 개념이 없다거나 왕으로서 소질이 없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주변 상황이 문제였다. 그들 스스로 정치할수 있게 해줄 신하보다는 그를 깔고 억눌러서 자기 세력을 펼쳐보려 하는 세력이 더 강한 것이 사실. 당 고종만 해도, 그의 후궁으로서 출세한 무미랑 즉 측천무후가 세력을 틀어쥐고 있어서, 뭔가를 하려고 해도 측천무후가 보고 아니라고 하면 고종도 줏대없이 아니라고 해버리는 그런 형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훗날 고려가 무너지고 발해의 대조영이 고려 부흥운동을 주도할 때, 당에서는 모든 국정을 측천무후가 맡아 다스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661년부터 이미 그런 조짐은 보이고 있었다.
[二十年, 春正月, 唐募河南 · 北 · 淮南六十七州兵, 得四萬四千餘人. 詣平壤 · 鏤方行營, 又以鴻臚卿蕭嗣業, 爲扶餘道行軍摠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20년(661) 봄 정월 (을묘에), 당은 하남 · 북과 회남(淮南)의 67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었다. 평양 · 누방 군영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무오에) 또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위구르[回紇]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펴라[平壤]로 나아가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당이 고려를 치기 위해 보낸 군사들은 예전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파병했던 13만 대군의 세 배 이상이었다. 더구나 홍려경 소사업에게 맡긴 직책은 '부여도행군총관'. '부여도'는 곧 고려의 부여성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은 주변에 40개나 되는 성을 거느린 큰 성이자, 고려인들에게는 '시조의 고향'이며 '고려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 그런 곳을 당이 공략함으로써 고려와 북방 여러 종족과의 유대관계를 아주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夏四月, 以任雅相, 爲浿江道行軍摠管, 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摠管, 蘇定方, 爲平壤道行軍摠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並進. 帝欲自將大軍, 蔚州刺史李君球立言 "高句麗小國, 何至傾中國事之有? 如高句麗旣滅, 必發兵以守, 小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 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諫帝, 乃止.]
여름 4월,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행군총관(浿江道行軍摠管)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摠管)으로 삼았다. 소사업 및 여러 호병(胡兵)이 무릇 35군이었다.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으나 울주자사(蔚州刺使)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였다.
“고려는 작은 나라인데, 뭐하러 중국의 모든 힘을 기울이겠습니까? 고려가 망하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하는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니, 이는 천하 백성들이 옮겨다니며 수자리 사는 일로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또한 마침 무후(武后)도 간하였으므로 황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0년(661) 4월 경진
울주자사 이군구의 상소란 말을 좀 돌려서 그렇지 고려를 치지 말자는 것이었다. 당 태종의 독화살 상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당 안에서도 고려를 치는 것에 대해서 무척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권자'나 다름없던 측천무후도 마찬가지였던지, 그녀가 간하는 말을 듣고서야 고종은 비로소 직접 군사를 지휘할 생각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고려를 정벌하는 군사들을 완전히 돌린 것은 아니었지만. 《자치통감》에는 이 해에 연호를 고쳐 용삭(龍朔)으로 선포한 다음 달인 3월 병신일(1일)에 천자와 여러 군신, 외이(外夷)가 낙성문(洛城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군영에서 새로 '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이라는 무곡을 바쳤고 그것을 모두 관람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고종이 고려를 직접 정벌하고자 하면서 용무지세(用武之勢), 즉 온 나라와 외부에 전시 분위기를 조성하여 전투 참여를 고취시키려 한 것이었다고 했다. 예술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한 셈이다.
여기 나오는 당군들은 대부분 의문스러운 행보로 의심을 받았다. 간 기록은 있는데 돌아온 기록이 없는 것이다. 누방도행군을 지휘한 총관 정명진은 고려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지만, 정작 누방도행군이 고려군과 어떻게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만 쏙 빠져있다. 4만 4천의 군사를 누방도행군과 평양도행군에 증파했다니 분명 요동으로 출병한 건 맞는데. 게다가 누방도행군총관이라는 직책이, 정명진이라는 자가 살아서 맡은 마지막 관직이었다. 662년에 그는 죽었다. 고려에서.
[夏五月, 王遣將軍惱音信, 領靺鞨衆, 圍新羅北漢山城, 浹旬不解, 新羅餉道絶, 城中危懼.]
여름 5월에 왕은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열흘이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다.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안이 두려워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0년(661)
이 무렵 사비성이 함락당하기는 했지만, 백제 부흥군 세력은 여전히 신라에 항거하고 있었고, 이에 신라왕 법민은 이찬 김품일과 소판 김문왕, 대아찬 김양도 등을 장군으로 삼은 토벌군을 보내 백제 부흥세력을 진압하게 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김유신의 아우인 이찬 김흠순, 진흠(眞欽), 각간 김천존, 소판 죽지(竹旨) 등을 보내 이들을 토벌하게 한다. 고려는 이 점을 노렸다. 신라의 정예병들은 모두 백제 부흥세력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고, 그 틈에 신라를 공격하면 이길수 있을 것이라고. 혹자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삼국사》 신라본기에 보면 이는 무열왕 8년의 일이다. 고려장군 뇌음신과 함께 말갈장군 생해(生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했다가 못 이기자 군사를 돌려 북한산성(서울)을 포위했다고 한다. 뇌음신의 고려군은 북한산성 서쪽에, 생해의 말갈병은 동쪽에 진을 치고서 수십 일에 걸쳐 포차로 돌을 날리며 성을 공격했다. 기록은 이게 5월 9일이라고도 하고 11일이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어느쪽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뇌음신이 북한산성 공격을 시작한 시점과 생해가 공격을 시작한 시점이 각각 9일과 11일일 수도 있고, 술천성을 공격한 것이 9일이고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이 11일일 수도 있다. 후인의 추가를 기다린다.
[忽有大星落於我營, 又雷雨震擊, 惱音信等, 疑駭引退.]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졌다. 또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 뇌음신 등은 의심하고 놀라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0년(661) 여름 5월
《삼국사》고구려본기의 기록대로 고려군이 갑자기 떨어진 유성과 뇌성폭우 때문에 겁을 먹고 퇴각했다고 하면 이건 진짜 웃긴 소리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사》신라본기에서는 싱겁게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기록을 부기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 북한산성의 성주였던 신라의 대사 동타천을 띄워주기 위한 것이지만, 그래도 고구려본기가 성의없이 적어준 것보다는 훨씬 낫다.
[城主大舍冬陁川, 使人擲鐵蒺藜於城外, 人馬不能行, 又破安養寺廩廥, 輸其材, 隨城壞處, 卽構爲樓櫓, 結絙網, 懸牛馬皮綿衣, 內設弩砲以守. 時城內只有男女二千八百人, 城主冬陁川, 能激勵少弱, 以敵强大之賊, 凡二十餘日. 然糧盡力疲, 至誠告天,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以震, 賊疑懼解圍而去.]
성주대사(城主大舍) 동타천(冬陁川)이, 사람을 시켜 마름쇠[鐵蒺藜]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서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 말과 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쳐다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해서 막았다. 이때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천 8백 명밖에 없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잘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20여 일 동안 맞서 싸웠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삼국사》 권제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8년(661) 5월
안시성이 당군과 맞서 60일을 버틴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전공이라고 인정해 줘야 할까? 백제의 부흥 세력은 아직도 신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고, 고려로서도 당의 국경에만 군사를 배치해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로부터 그토록 찾고 싶어 안달인 '서쪽 땅 5백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당의 위협을 없애고 신라로 가야 할텐데, 당은 여전히 고려를 칠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고, 후방에서 신라를 견제해줄 동맹세력이나 마찬가지였던 백제도 중앙정부가 와해되어 훗날의 상황을 기약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후가 위협당할 필요가 없었으니 신라로서는 부담없이 당에 대한 공격을 지원할 수 있었고, 이런 신라를 적으로 돌려버린 이상, 이제 고려는 혼자서 2중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 부흥군의 세력이 언제까지 버텨줄수 있을까?
[秋八月, 蘇定方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
가을 8월에 소정방이 우리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려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펴라골[平壤城]을 포위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0년(661)
소정방이 언제 평양을 포위했는가 하는 것은 《자치통감》하고 비교해보면 한 달 정도 차이가 있다. 《자치통감》은 7월 갑술의 일이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 덴치키)와도 일치한다. 천지기(덴치키)는 "이 달(7월), 소 장군과 돌궐왕자 계필하력 등이 수륙 두 길로 고려성 아래에 이르렀다[是月, 蘇將軍與突厥王子契苾加力等, 水陸二路至于高麗城下]."고 적고 있다. 왜왕 제명(사이메이)가 죽은 뒤 왜왕 천지(덴치)로 즉위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칭제(稱制)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즉위도 6년을 미뤄가면서 백제 흥복 지원에 열을 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흥복군을 돕는 것이 왜에게 손익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도 타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제란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왜의 국력을 무한히 능가하는 '세계제국' 대당의 군대와 겨루어야 하는데 그건 왜로서는 도박 이상의 문제였다. 자칫하면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그 와중에 신라에서는 춘추왕이 죽고, 태자 법민이 새로운 신라왕으로 즉위했다.
[九月, 蓋蘇文遣其子男生, 以精兵數萬守鴨淥,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氷大合, 何力引衆乘氷度水, 鼓噪而進, 我軍潰奔. 何力追數十里, 殺三萬人, 餘衆悉降, 男生僅以身免.]
9월에 개소문은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군 수만 명으로 압록을 지키게 하였다.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계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아군이 무너져 달아났다. 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다.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0년(661)
고려 최고의 용장이라 불리던 연개소문의 아들이란 이름값이 있었지만, 남생은 아버지만큼의 능력은 없었다.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ㅡ돌궐 기병에 밀려 3만 명이나 되는 군사만 개죽음하게 만들고 자기는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갔다. 평양성이 당군에게 포위당한 것은 고려로서는 그야말로 충격이 아니었을까. 요동 지역으로 군사를 집중시켜 놓느라 정작 수도 방어에 소홀했던 탓에, 수도 평양성은 위기를 겪었다. 요동을 돌아 압록강 쪽으로 바로 진격해 들어오는 것은 옛날 수 양제가 별동대 보내서 시도했던 방법인데, 이번엔 의외로 그게 먹혔다. 소정방과 방효태, 그리고 임아상의 3군이 평양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집중공세에 들어갔다.
[會, 有詔班師, 乃還.]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이리하여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0년(661)
하지만 여기서도, 당은 고려를 완전히 멸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린다. 철륵족이 당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열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투르크계 종족인 철륵은 646년에 당이 설연타(연개소문이 연합하려 했던 몽골고원 부족)를 멸할 때 당측에 서서 도운 이래, 당에 복종하며 여러 정벌에 참가했고, 계필하력 자신도 철륵 사람으로서 당의 고려정벌사업을 도왔다.
하지만 660년을 기점으로 과도한 군수물자 차출과 장정 징집이 철륵 제족의 반발을 샀고, 그 해에 거란족과 해족의 뒤를 이어, 8월에는 철륵 사결부와 발야고부, 복골부, 동나부 등이 일어나 당에 대한 대규모 항전 사태를 벌인다. 계필하력이 고려에 있던 661년 10월에는 회흘부 추장 비속독이라는 자가 철륵 부족을 이끌고 대규모로 봉기해 당에 저항했는데, 이 철륵을 진압하기 위해 당 조정은 철륵 별부 추장 출신이었던 계필하력을 비롯한 고려 원정군 일부를 빼서 철륵으로 투입했다. 같은 철륵족인 계필하력에게 철륵안무대사로서 철륵을 달래게 했던 것이다. 부여도행군총관 소사업도 이때 돌아와 선악도행군총관(仙萼道行軍總管)으로서 철륵을 진압하는 데에 동원되었고, 연개소문의 라이벌(?)로 유명한 설인귀와, 훗날 백강구 전투에서 당의 수군을 이끌고 백제ㆍ왜 연합군을 궤멸시키는 손인사도 함께 갔다. 《자치통감》의 얘기다.
[冬十月二十九日, 大王聞唐皇帝使者至, 遂還京. 唐使弔慰, 兼勅祭前王, 贈雜彩五百段. 庾信等休兵, 待後命, 含資道摠管劉德敏至, 傳勅旨, 輸平壤軍粮.]
겨울 10월 29일에 대왕이 당 황제의 사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당의 사신이 조문하고 아울러 칙명으로 앞 임금(무열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가지 채색 비단 5백 단(段)을 주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의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황제의 명을 전하여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원년(661)
이 무렵 당군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니혼쇼키》에 실려 있는데,
[十二月, 高麗言 "惟十二月, 於高麗國寒極泪凍. 故唐軍雲車衝■, 鼓鉦吼然. 高麗士率膽勇雄壯, 故更取唐二壘. 唯有二塞, 亦備夜取之計. 唐兵抱膝而哭, 銳鈍力竭而不能拔." 噬臍之耻非此而何?]
12월에 고려가 말하였다.
"이 12월에 고려국이 몹시 추워서 패강[泪]이 얼었습니다. 당군은 운차, 충붕이 있어 북과 징을 울려 진격했습니다. 고려의 사졸들은 용감하고 웅장하게 다시 당의 두 보루를 빼앗았습니다. 두 진터만이 남았고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당의 군사가 쪼그려앉아 울었는데, 날카로움이 둔해지고 힘이 빠져서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제지치(噬臍之耻)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7, 천지기(天智紀, 덴치키) 즉위전기, 제명(사이메이) 7년(661)
《일본서기》가 인용한 문헌 중에는 도현(道顯)이라는 승려가 지은 《일본세기(日本世記)》도 있었는데, 도현에 대해서 '고려사문(高麗沙門)'이라고 했으니 고려인임에 분명하다. 도현은 일본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중요하다'고 할 만한 기록을 남겼다. 그것이 《일본서기》에 드문드문 인용되어 있는 것인데, 이 기록 뒤에도 도현의 말이 적혀 있다. 도현에 따르면신라가 먼저 백제를 친 것은 고려를 멸망시키기 위한 것으로 원래부터 춘추(무열왕)는 고려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에 인용된 《고기》를 보면 김춘추는 백제에게 복수하려고 고려에 군사 빌리러 갔다가 허탕 치고 왔는데, 도현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삼국사》김인문열전에 보면 패강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포위한 당군은 고려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이때 "군사와 말이 많이 죽거나 다쳤으며 군량을 조달받을 길도 끊어졌다[士馬多死傷, 糧道不繼]."고 애써 그들의 괴로웠던 기억들을 뭉뚱그려 적고 있다. 최악이었다.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고려군의 전략에 걸려들어, 소정방의 당군은 패전보다 끔찍하다는 '전투 전 사망'의 지경까지 이르고 있었는데, 신라에 당의 군량 요청이 떨어진 것은 그 해 겨울 10월의 일이었다. 무열왕의 죽음으로 온 나라가 국상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신라왕 법민은 갑옷을 입고 다시 전쟁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당군에게 (처)먹일 곡식을 운반하는 임무가 노장 김유신에게 맡겨졌다. '국경을 벗어난 뒤에는 상벌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신라왕의 특별허가증까지 받고 김유신이 고려 국경 안으로 들어간 것은 12월 10일이었다.
[二十一年, 春正月, 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 擧軍沒, 與其子十三人, 皆戰死.]
21년(662) 봄 정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백주자사(白州刺史) 옥저도총관(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개소문과 싸웠다. 전군이 몰살당하고 그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1년(662)
태세 임술(662) 2월 무인, 사수(蛇水)의 싸움. 《삼국사》에 정월이라 기록된 것은 부식이 영감이 사료를 제대로 확인도 안 한 엉터리 기록이고, 정작 《자치통감》에는 2월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라는 남자가 직접 참가했던 전투 가운데서도 그의 무공이 가장 돋보이는 전투였다. 방효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사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백영과 조계숙이 지휘하는 패강도행군이 있었지만 패강도행군 역시 상황이 어려운 처지였다. 《자치통감》에 기록된바, 나흘 전인 갑술일에 패강도대총관이었던 임아상이 군중에서 죽었는데, 임아상이라는 자는 당의 병부상서(국방장관)라는 벼슬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당서》에 열전이 없다. 앞서서 패강도행군을 지휘했던 유백영 역시 그러하다.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 보니까, 임아상의 돌연한 죽음과 방효태의 전사는 모두 고려군과 상관이 있으며, 방효태와 싸우기 전에 이미 임아상은 고려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패강도행군 역시 궤멸된 것이라고. 연개소문은 방효태를 치기 전에 임아상을 먼저 친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사면에서 포위해 전멸시킨 것이 바로 사수 싸움이다.
오늘날 사수라는 강이 정확히 어디였는가 하는 것은 밝혀진 바가 없다. 《해동역사》에서는 사수의 다른 이름이 다하(茶河)ㆍ타하(陀河)라는 것만 밝히고, 《자치통감》이나 《요사》고려열전에 "개태(開泰) 7년(1018)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소배압(蕭排押)이 고려와 다(茶)와 타(陀) 두 하천 사이에서 싸웠다.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익사한 자가 많았다."라는 기록, 그리고 청 시대의 문헌인 《대청일통지》의 "사수는 평양의 서쪽 경계에 있다. 당 용삭 초에 방효태 등이 고구려를 칠 때 영남(嶺南)의 군사로 사수에서 벽을 쌓았다. 송 천희(天禧) 2년(1018)에 거란이 고려를 정벌할 때 사(蛇)와 타(陀) 두 물에서 싸워 패하고서 돌아왔다. 구지(舊志)를 보면, 두 물은 모두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라는 기록을 언급하면서, 사수는 평안도 자산의 웅초덕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대동강과 합류하는 강일 거라고만 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서는 평양 근교의 청천강이 바로 사수라고 비정해놓았다.
다하를 《대청일통지》에서는 사수라고 했는데 이는 음이 비슷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며(고려령이었던 평안도 지역에서는 'ㄷ' 발음이 'ㅅ'으로 바뀌는 구개음화가 그닥 진행되지 않았음) 타하 역시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는 모른다고 했다.(다만 고려와 요가 싸운 다하와 타하는 고려 기록에 나오는 석천 즉 지금의 황화천을 가리키며, 다하와 타하 두 강을 서로 다른 강으로 보는 것은 《요사》 원문에 나오는 '다타이茶陀二'의 '이二'를 숫자로 본 데서 나온 착오라는 주장이 있음)
사수 싸움은 단 한번으로 끝난 게 아니라, 먼저 연개소문이 사수에서 진을 친 방효태의 옥저도행군과 싸워서 수만 명을 몰살시키고,2차로 그들을 활잡이로 포위해 '화살비' 공격을 날림으로서 적을 전멸시켜버린 것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들 중에서는 이 사수 싸움이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한 마지막 싸움이자, 당의 전군 궤멸ㅡ당의 비참한 패배였다. 옥저도행군이라는 한 부대를 이끌던 장수 방효태, 그리고 그의 아들 열세 명까지 모두 연개소문의 손에 죽었다.(방효태 본인은 온몸에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맞고 전사했음)옥저도행군 장병은 모두 10만. 모두 시체가 되어 다 풀리지도 않은 강위에 피를 뿌렸다.
수의 30만 별동대를 살수(청천강)에서 궤멸시킨 을지문덕도 조금 못 미쳐서 2,700명은 '아깝게도' 살려 보냈는데, 다른 평가들은 접어두고서라도 연개소문의 무력에 대해서는 당대의 '으뜸'이었다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하긴 고려인으로서 활쏘기와 말타기는 어려서부터 필수교양과목으로 몸에 익히고 살았겠고, 위협용이든 실전용이든 온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니는 양반이니 검술도 보통은 아니었겠지. 중국 사람들이 연개소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괜히 공포를 느끼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고려 멸망의 책임이 있든 없든, 이 자가 살아있는 동안만은 당이 한번도 고려를 멸망시키지 못했던 사실 하나만은 인정해도 될 듯 싶다. 부식이 영감도 《삼국사》 헌성열전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宋神宗, 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 非常人也.” 然則蘇文, 亦才士也.]
송의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 왕안석)와 일을 논할 때 말했다.
“태종은 어째서 고려를 정벌하고도 이기지 못했는가?”
개보가 말하였다.
“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문 역시 재사(才士)였음이 틀림없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부(附) 헌성
하지만 부식이 영감은 여기서 다시 한 마디 덧붙인다.
[而不能以直道奉國, 殘暴自肆, 以至大逆. 春秋 『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 而蘇文保腰領, 以死於家, 可謂幸而免者.]
하지만 직도(直道)로 나라를 받들지는 못하고 잔폭함을 제멋대로 하여 대역(大逆)이 되었다. 《춘추》에
『왕이 시해당했는데도 그 반역한 자를 토벌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에는 인재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소문이 몸을 보전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용케 벌을 면한 것이다.
《삼국사》 권제49, 열전제9, 개소문, 부(附) 헌성
《삼국사》가 편찬될 무렵, 그러니까 12세기 후기 고려는 한참,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라는 초유의 반란사태를 진압한 뒤의 상황이었다. 왕에 도전하는 자를 누구보다도 기피하면서,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차지한 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레르기를 넘어선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 더구나 김부식은 묘청의 난 때에 황제의 편에 서서 서경 세력을 '반란 진압'이라는 이름으로 쳤던 관군측 수장이었으니, 황제에게 도전하는 자를 옳게 보지 않고 죽인 자는 거의 대역죄인이나 다름없다고 욕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삼국사》에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 정권을 쥔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그 이전에 이미 봉상왕을 폐위시켜 죽게 하고(정작 봉상왕은 스스로 자결했지만) 미천왕을 즉위시킨 국상 창조리를 다함께 '반신(叛臣)' 즉 반역한 신하의 열전에 넣어서 분류하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하지만 신대왕 때의 명림답부는 어디 안 그랬던가? 모본왕 때에도 두로라는 소심한 양반이 왕을 죽이는 바람에 왕족 태조왕이 태자를 제치고 즉위했으니, 왜 그들은 반신이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진대도 부식이 영감이 뭐라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연개소문과 창조리는 반역한 신하가 되고, 명림답부와 두로는 그러지 않았는지. 이것도 부식이 영감이 일부러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을 깎아내리려 했던 흔적일까? 아니면 그가 죽고 얼마 안 가서 나라가 망했기에, 고려를 망하게 만든 책임이 모두 연개소문에게 있다고부식이 영감은 생각했던 것일까?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아참, 이 해 3월에 10만의 무리로 당에 맞섰던 철륵족은 마침내 계필하력의 5백 기병에게 항복했다.
[十八日, 宿風樹村. 氷滑道險, 車不得行, 並載以牛馬. 二十三日, 渡七重河, 至蒜壤. 貴幢弟監星川, 軍師述川等, 遇賊兵於梨峴, 擊殺之.]
18일에 풍수촌(風樹村)에서 묵었다. 얼음이 얼어 미끄럽고 또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으므로 모두 소와 말의 등에 실었다. 23일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蒜壤)에 이르렀다.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군을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2년(662) 1월
고려의 청야수성을 깨버린 것은, 당에 대한 신라의 후방지원이었다. 평양을 포위하고도, 성밖의 물자보급로를 끊고 성에 들어가서 저항하는, 고려의 전통적인 청야수성전술에 걸려서 고전하던 당군을, 신라에서 군량을 지원하며 후방지원을 해주었으니, 이젠 적어도 물자보급이 끊어져서 고려를 멸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할 걱정은 덜게 되었음이라. 하지만 군량을 받자마자 곧장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간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고려군이 각지에서 언제 반격해올지 모르는 위협이 있었던 반증이 아닐까 싶다. 물론 고려군이 신라군에게 격파당하기도 했지만.
[蘇定方圍平壤, 會大雪, 解而退.]
소정방이 펴라[平壤]를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1년(662)
방효태의 후방 지원군이 연개소문에게 궤멸당한 뒤, 소정방은 신라의 군량만 받고 그대로 평양에서 철수해버린다. 《당서》나 《자치통감》에서는 큰눈 때문에 물러났다고 했지만, 신라로부터 군량을 받은 것은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
[二月一日, 庾信等至獐塞, 距平壤三萬六千步. 先遣步騎監裂起等十五人, 赴唐營. 是日, 風雪寒沍, 人馬多凍死. 六日, 至楊隩, 庾信遣阿湌良圖, 大監仁仙等致軍粮, 贈定方以銀五千七百分, 細布三十匹, 頭髮三十兩, 牛黃十九兩. 定方得軍粮, 便罷還.]
2월 1일에 유신 등은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펴라[平壤]에서 3만 6천 보(步) 떨어진 곳이다. 먼저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 등 15명을 당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 날 눈보라가 치고 몹시 추워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양오(楊隩)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良圖)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군량을 가져다 주었는데, 소정방에게는 은 5천 7백 푼[分],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두발(頭髮) 30량(兩)과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2년(662)
물론 그 고려의 추격군도 신라군과 겨루어 크게 패했지만, 당군은 더했다. 《삼국사》김유신열전에는 군량을 배달받은 소정방은 바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는 지쳐서 힘껏 싸울 수가 없었기에[以食盡兵疲, 不能力戰]."그것이 퇴각명령을 내린 이유였다. 당군에게 직접 군량을 가져간 김인문과 김양도ㆍ김군승 부자, 대감 인선은 8백 명의 군사와 함께 뱃길로 신라로 귀국했다. 《삼국유사》에 보면 이때 군량을 받은 소정방은 퇴각하면서 김유신에게 대답 대신 난새와 송아지의 그림을 그려 보냈는데, 그것은 일종의 '암호'였다. '화란화독(畵鸞畵犢)'. 한자음에서 '鸞犢'을 반절로 읽으면 '速還'이 된다고 한다. "빨리 돌아가라."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너희도 고려군 손에 개박살 난다고 말이다.
[時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그때 고려인이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우리 군대를 돌아오는 길에서 공격하고자 하였다.
《삼국사》 권제42, 열전2, 김유신 중(中)
당군은 군량을 받고 돌아갔지만, 스스로 죽을 길로 들어온 신라군에게는 고려의 반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김유신의 신라군은 고려군과 전투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군량보급을 위한 비전투원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맞붙을 때처럼 말이다. 전투병력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여기는 사지(死地)다. 적진 깊숙하게 들어온 사지. 《삼국사》에서는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북과 북채를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했고, 땔나무를 쌓아 태워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했다[以鼓及桴, 繫羣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고 적고 있는데, 고려군에게 신라군 병력이 많아보이게 하기 위한 트릭이었다. 그리고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표하(瓢河)까지 이르렀다. '호로하'라고도 불리며 《삼국사》본기에는 '과천'이라고 되어 있는, 지금의 임진강을 건너서야 신라군은 휴식할 수 있었다.
[麗人知之來追, 庾信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分發, 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고려인이 이를 알고 추격해오자, 유신은 수많은 쇠뇌[萬弩]를 일제히 쏘게 하였다. 고려군이 물러나므로, 여러 부대[幢]의 장병을 독려하여 나누어 출발하게 하고 역습하여 패퇴시켰다.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았고, 1만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 권제42, 열전2, 김유신 중(中)
고려의 기병을 격파한 것은 신라의 쇠뇌 부대였는데, '수많은 쇠뇌를 일제히 쏘게 했다'는 기록에서 볼수 있듯, 신라에는 쇠뇌로 구성된 특수 부대가 있었다. '노당(弩幢)'이라 불리는 이 부대는 '사설당'이라는 네 개의 특수 부대 가운데 하나인데, 이름에서도 볼수 있듯 쇠뇌를 주로 다루는 부대다. 이밖에 성벽을 부수는 충차만 전문분야로 다루는 '충당(衝幢)'도 있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사다리인 운제(雲梯)를 맡은 운제당(雲梯幢)과, 투석기를 다루는 석투당(石投幢)까지 네 개의 특수부대를 묶어서 사설당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공성전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군사조직으로 당시의 첨단무기라 할수 있었던 군사기계, 쇠뇌와 충차와 운제와 포차(抛車) 네 가지 무기를 잘 다루는 군사들만 뽑아 하나의 조직으로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밖에 장창을 다루는 장창당(長槍幢)이란 것도 있는데 장창은 '방진'을 치고 싸우는 것으로 대(對)기병 전술로는 무척 유용하다.
중세 서양에서 프랑스 기병과 프로방스(벨기에 지방) 장창보병이 서로 맞붙었던 '구드레 전투'란 게 있었는데, 여기서 프랑스 기병은 천 명이 전사했지만, 프로방스 장창보병은 겨우 백 명만이 전사했을 뿐이라니까. 장창을 한데 모아서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창날을 세워 겨누고 있으면, 말의 속도에 의지해 무턱대고 달려나갔다가는 그야말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고 말 것이다.
기병의 최고 무기인 '속도'를 봉쇄하는 것이 이 전술의 목적이다. 이건 나중에 신라왕 직속의 중앙군사조직인 9서당의 하나인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편재되었으니까 차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김유신 부대에 사로잡힌 고려의 장군이 소형(小兄) 벼슬의 아달혜(阿達兮)라는 것만 부기한다. 만 명의 목과 함께 만 개의 병장기까지 신라군에 뺏겼다.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1년(662)
고려로서는 씁쓸한 승리였다. 당에서도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함선 만들고 수십만 대군 동원해놓고도 끝내 고려를 무너뜨리지 못했고(이후 4년 동안 당은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주력군이었던 여섯 부대 가운데 옥저도행군은 사령관 방효태와 함께 '전멸', 누방도행군과 패강도행군은 각기 그 사령관이 죽었고, 이세적의 요동도행군과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죽었으니 당으로서는 패배도 이런 패배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때나마 펴라가 포위되어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했던 것이나, 신라군이 쉽게 고려 안에까지 들어올만큼 고려 남쪽의 방어망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는 말이니까. 더구나 주변에 구원을 청할 이민족들은 모두 당의 권속에 들어가버렸으니 이미 정세는 당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당과 신라 사이에서 고려는 힘겹게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마침내 서기 663년 가을 9월, 신라·당의 연합군과 백제·왜의 연합군이 백강 하구에서 벌인 국제해전, 이른바 '백강의 싸움'에서 백제·왜의 연합 함대는 신라·당의 연합군이 이끄는 함대에 무참히 격침되고, 백제는 완벽한 멸망을 고한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바닷물마저 붉게 변했다'고 평할 정도로 처참했던 전투, 나아가 고려의 멸망이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후 고려와 당은 4년 동안 조용했다.
[蘇文至乾封元年死.]
소문이 건봉(乾封) 원년(보장왕 25: 666)에 죽었다.
《삼국사》 권제49, 열전9, 개소문
연개소문의 업적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적 증거가 있지만, 정작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데 단재는 당 사람 장열(張悅)의 《규염객전》을 소개하면서 규염객이 곧 연개소문이라고 주장했었다. 그 내용이란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수(隋) 말엽 장중견(張仲堅)의 수염이 규룡(虯龍)의 수염같다 해서 규염객이라 했다. 규염객은 웅재와 대략(大畧)이 있었는데, 바야흐로 혼란한 때를 당하여 천하를 다투는 일을 벌이려 하였다. 그때 마침 홍불(紅拂)이란 기생을 이끌고 영석(靈石) 지방을 지나는 이정(李靖)을 만나, 이정과 함께 태원(太原)에 가서 당 태종 이세민을 만나보고 영주(英主)가 될 것을 알고 자기의 집과 재산을 이정에게 주고 떠나며, “앞으로 10년 뒤 동남 수천 리 밖에서 이상한 일이 생길 것이니, 이는 바로 내가 뜻을 이루는[得意] 때다.” 하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 뒤 정관(貞觀) 연간에 부여에서 왕을 죽이고 자립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정은 규염객임을 알고 홍불과 함께 동남방을 향하여 술을 뿌리며[酹酒] 축하하였다.
여기서 규염객의 이름을 장중견이라고 했지만, 단재 선생은 실은 장중견이 아니라 연개소문이고 고려인이었으며, 부여국도 결국 고구려를 바꿔 적은 것으로 당 태종의 기운에 눌려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했다는 말은 중국 사람들이 자주 쓰는 권징적 필법일 뿐이라 했다. 하긴 양소가 막 죽었을 때 규염객이 이정을 통해 태종을 만났다는 606년이면 당 태종 나이가 겨우 여서일곱살밖에 안 된 꼬마였는데 꼬마를 두고 뭘 영웅 자질이 있네마네 한단 말인가.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재미삼아 할만한 이야기긴 하다.
여담이지만 조선조의 성호 이익 선생은 단재와는 달리, 《규염객전》에서 말한 규염은 연개소문이 아니라 발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을 가리킨 것이라 했다. 발해의 땅은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고, 그 땅은 부여 옛 땅으로 요해(遼海)에 가까워 해적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규염은 걸걸중상 즉 대중상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정은 물론 실존인물이고, 《이위공병서》라는 병서를 지은 전략전술의 달인이기도 하다. 《이위공병서》 즉 《이위공문대》는 《손자병법》이나 《오자병법》, 《육도》, 《삼략》, 그리고 《사마병법》과 《울요자》 등 여섯 책과 함께 당 시대에는 병경(兵經)이라 불렸다. 송 시대에 이르러서 무경(武經)으로 고쳤는데, 그 '무경 7서' 가운데 하나인 《이위공문대》의 첫장에는 당 태종이 고려를 정벌할 방법을 이정에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이정은 '고려의 연개소문은 자기 스스로 군사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믿고 당은 저들을 칠 능력이 없다 생각하여 당의 명을 받들지 않는다'라고 대답하는데, 단재 선생은 이 《이위공문대》는 이정이 연개소문에게서 배운 병법을 토대로 쓴 것이라고 주장하셨다(본인도 서울의 어떤 노인한테서 들은 이야기란다). 연개소문이 직접 저술한 병법이라 단재 선생이 말하신 《김해병서》는 고려 때까지도 전해져 여러 장수들에게 한 권씩 나눠주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망할)
또한 단재는 연개소문의 탄생 및 성장과 관련해 《갓쉰동전》이라는 소설을 소개했다. 갓쉰동이라는 이름은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를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으며, 중국 발음으로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을 '카이쑤원'이라 읽는 것이 '갓쉰'과 통한다는 점을 들어, 갓쉰동전은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가지고 쓴 소설이라고 단재는 주장한다. 《조선상고사》에서는 그 소설의 일부분만 소개해놨다.
연국혜라는 재상이 나이 쉰에 아들 하나를 얻어 이름을 '갓쉰동'이라 지었는데, 애가 나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15년 동안 얘를 부모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해야 오래 산다는 말을 (주워)듣고 하인을 시켜서 원주의 학성동이라는 곳에다 갖다 내버렸다. 갓쉰동은 그곳에서 유씨 성 가진 장자의 노비가 되어,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어떤 퉁소 부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에게서 검술과 병서, 천문, 지리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장자댁 셋째 딸 영희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달아난 뒤, 당시 적국이던 달딸국을 치기 위해서 그 나라로 들어가 이름을 '돌쇠'라 바꾸고 그 나라 왕의 가노가 되어 그 나라 말과 풍속을 배우며 내정을 염탐했다. 그 왕의 '둘째' 아들이 그를 철책 안에 잡아가두고 음식을 끊어 굶겨 죽이려 했지만, 그 나라 공주의 도움으로 철책에서 풀려나 무사히 귀국해서 책문(策文)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고,
영희와 혼인하여 달딸국을 쳐서 평정한다....
는 이야기가 되겠다. 단재 선생의 해석을 따른다면
연국혜: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 그의 이름이던지 자(字)이던지, 그렇지 않으면 혹 소설의 작자가 지어낸 이름일 것이라고.
달딸국왕: 당 고조 이연
둘째 왕자: 당 고조의 둘째 아들 태종 이세민
이고, 이 갓쉰동의 행보는 곧 연개소문의 젊은 시절 중원염탐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 고조와 태종을 달딸왕이니 달딸왕자니 한 것은 사대주의 경향이 강하던 시대 중국 황제를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못하게 한 바람에, 당(唐)을 '달딸'로 바꾸고 당 고조는 달딸국왕으로, 태종은 달딸국 둘째 왕자로 고쳤다는 거다. 연개소문이 군사를 일으켜 영류왕과 대신, 그들의 가족까지 수백 명을 죽인 사실은 왜 갓쉰동전에 빠졌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우리 나라 고소설의 권선징악 원칙에 위배된다며 고친 것이라 단재 선생은 말하고 있다.
연개소문 당시에는 아직 우리 나라에 과거가 없었는데 그가 과거에 응시해서 급제했다는 내용도, 조선조에 이르러 과거 급제자를 천선(天仙)같이 여기던 풍속에 따라 덧붙여진 것으로(우리나라 고소설에서 홍길동같은 애들 빼고 나면 영웅이란 것들은 다 과거급제하고서 날기 시작하더라), 이처럼 옛날부터 내려오던 전설을 고치고 새로운 관념을 첨삭하여 지은 소설의 원전신용가치 여부를 말할 수 없는 것이 아깝긴 하지만, 아무래도 《규염객전》보다는 《갓쉰동전》이 더 사실과 가깝다며 단재는 《갓쉰동전》 편을 들어주고 있다.
《규염객전》과 《갓쉰동전》 두 책의 기록이 좀 다른데, 이제 두 책의 기록의 진위(眞僞)를 추론하건대, 이때에 고구려가 새로 수양제(隋煬帝)의 수백만 군사를 대파하여 전 지나가 크게 놀라 떨고, 당 고조의 부자는 수 양제 치하에 있는 태원(太原)의 소공국(小公國)이요, 이정(李靖)은 태원의 한 작은 벼슬아치였다. 태원이 옛날부터 많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던 지방이므로 더욱 고구려 사람을 경계하였을 것이며, 당태종은 안으로 전 지나를 평정하고 밖으로 고구려를 토멸할 야심을 가져 늘 고구려나 고구려 사람들의 행동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여러 노복들 중에서 변장한 고구려 사람 연개소문을 발견한 것이니 얼마나 놀랐으랴? 하물며 《당서(唐書)》에도 연개소문은 모습이 괴이하고, 의기가 호매(豪邁)하다고 하였으니, 당태종이 이를 발견하자 곧 자기네 장래의 강적이 자기네 수중에 잡혔음을 알고 비상한 요행으로 여겼을 것이고, 또한 얼마나 좋아하였으랴?
그 놀라움, 그 좋아함 끝에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을 것도 불을 보는 것과 같이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이치로 미루어보아 갓쉰동전은 믿을 만한 점이 많고, 신 · 구 두 《당서》에 당태종의 말을 기록하여
“개소문은 방자하다.”
“개소문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개소문은 이리 같은 야심....”
이라고 한 말들이 비록 개소문을 미워한 말이지마는, 반면에 개소문을 꺼렸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위공병서(李衛公兵書)》에
“막리지 개소문은 스스로 군사병법을 안다고 하였다.”
고 한 문구가, 또한 개소문을 모멸하였다느니보다 두려워서 공경한 뜻이 엿보인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만나보고 영기(英氣)에 눌려 동으로 나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두 기록을 대조해 봄에 있어 규염객전은 의심할 만한 점이 많으므로, 본서에는 《규염객전》을 버리고 《갓쉰동전》을 취하였다.
뭐 복잡한 사설은 차치하고, 단재 선생께서 《규염객전》과 《갓쉰동전》 두 소설을 들어가면서 말하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1)연개소문은 어려서 고구려를 떠나 중국 대륙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2)연개소문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무예를 지닌 무장이었다.
3)연개소문의 군대는 중국 대륙 북부를 휩쓸어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로 줄여 이야기할수 있을 것이고, 중국 사람들도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포악하다', '잔인하다'고 굉장히 꺼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용맹한 무장'이란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중국 사람들의 인식을 말해주는 것이, 지금 중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보는 중국의 3대 국수(國粹) 가운데 하나, 경극(京劇)이다.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으로 알려진 것만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泥河)》의 네 가지 경극 대목이 있는데, 북한에서 '자신들의 민족영웅을 왜곡한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항의를 해서 빼버렸다던가, 하지만 그 전까지는 경극 무대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있는 경극이었다고 한다.
얼굴뿐 아니라 옷에서도 인물의 성격이나 출신, 신분을 알수 있는 것이 경극이란 것인데, 연개소문의 의상은 푸른색이고, 등에는 이민족의 표식인 깃발 모양의 장식인 '고기'를 달고, 옷에는 '동방', 즉 고려인이라는 것과 함께 '제왕'의 상징인 청룡 무늬를 금실로 수놓았으며, 수염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푸른색 얼굴 분장은 '위엄이 있지만 잔악하고 사나운 성격'을 상징한다고 한다. 연개소문과 맞서는 무장은 당의 장수 설인귀인데, 그는 청룡과 대비되는 '백호'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고, 흰옷을 입으며, '신전(神箭)'이라는 활을 다룬다. 연개소문이 다루는 것은 날아다니는 칼 '비도(飛刀)'이다.
예전에 스펀지에도 경극 '어니하'가 간략하게 소개됐었는데 그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우선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했고, 고려의 장수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군대를 물리치고 당 태종을 어니하라는 강까지 추격해 그에게 항복문서를 쓰도록 종용하지만, 당의 장수 설인귀가 나타나 연개소문과 싸워서 그를 죽이고 당 태종을 구해 당으로 돌아간다는 내용ㅡ스펀지 122회에서 봤던, 경극 《어니하》에 나오는 대체 줄거리다. 《독목관》이라는 경극의 내용에선,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 와서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의 군사들이 고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공포,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외의 마음이, 어쩌면 중국인들이 고려를 자기네들 역사로 삼고 싶어하는 마음이 꼭 이해못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왜 드라마에서도 간혹 나오잖아. 연약하고 힘없는 여자애(대체로 예쁨)가 학교 짱(마찬가지로 대체로 잘 생겼고 싸움 잘 하고 얼굴에 잔상 한두 개는 옵션으로 달고 사는)에게 항상 괴롭힘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끌리고 결국에는 서로 잘 되는 스토리.... 가 아니고, 이러다가 고구려사 왜곡 옹호하는 놈으로 보이는거 아냐?(어디 만화로도 못 그릴 재미없는 설정을 갖다가;;;)
어쨌거나 그렇게, 중국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하고, 고려뿐 아니라 중국 대륙까지 아우른 그의 무용담과 함께 신비로운 이야기만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진 고려의 무장 연개소문. 그가 젊은 시절 드넓은 중원을 여행하며 강자들과 교유하고 당의 정세를 염탐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는, 중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공포'와 '동경'의 이미지가 뒤엉킨 경극 속 '카이쑤원(蓋蘇文)'이 되어 그들의 침공에 맞서 동방의 고려를 수호하는 용맹한 장수의 모습으로 남았고, 뒷날 박성우 작가의 만화 <천랑열전>의 모티브가 됐다.(거기서 '규염'이니 '대막리지'니 하는 단어들이 나오긴 하지만 내 말에 공감하거나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더라.)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해서 《삼국사》는 《당서》를 인용해 당 고종 건봉 원년, 고려 보장왕 25년인 서기 666년에 죽었다고 했지만, 《일본서기》는 664년에 죽었다고 해서, 오늘날까지도 연개소문의 죽음이 정확히 언제였는가는 이설이 있다.(특히나 단재 선생께서 연개소문의 죽음이 원래보다 그 시간이 많이 늦춰졌다고 주장하신 이래로)
[是月, 高麗大臣蓋金終於其國. 遺言於兒等曰, "汝等兄弟, 和如魚水, 勿爭爵位. 若不如是, 必爲隣○."]
이 달에 고려의 대신 개금(蓋金)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아들들에게 유언하였다.
"너희 형제는 물고기와 물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작위를 다퉈선 안 된다. 안 그랬다간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7, 천지기(天智紀, 덴치키) 3년(664) 겨울 10월
연개소문이라는 무장의 죽음을 양자의 기록이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에 대해,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이미 657년에 연개소문이 죽었고 그것을 단지 고려 내부에서 얼마 동안 숨긴 것이라 주장하셨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들도 663년이니 666년이니 하고 서로 말이 안 맞고 있으니, 연개소문의 사망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음은 짐작할 수 있겠지. 그가 고려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생각하면, 그의 죽음이 고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는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독재자가 될 수도 있다.
우선 단재 선생이 말씀하신 657년설은 오늘날에는 다 죽은 설이 됐다. 『천남생묘지명』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이 막리지가 된 해가 657년이고 연개소문이 그 해에 죽었다는 것이 그 근거라고 주장을 하셨지만, 사실 단재 선생은 이 글 쓰실 때 『천남생묘지명』 원문을 제대로 구해보지 못하셨거든. 연남생의 관직승진에 대한 대목은 묘지명 원문에 이렇게 적혀있다.
[年始九歲, 卽授先人. 父任爲郎, 正吐入榛之辯. 天工其代, 方昇結艾之榮. 年十五, 授中裏小兄, 十八授中裏大兄, 年廿三改任中裏位頭大兄, 廿四兼授將軍, 餘官如故, 廿八任莫離支兼授三軍大將軍, 卅二加太莫離支, 摠錄軍國阿衡元首. 紹先疇之業, 士識歸心, 執危邦之權, 人無駮議.]
나이 아홉 살에 선인(先人)의 지위를 주었다. 아버지가 낭(郞)으로 임용하여 바로 입진지변(入榛之辯)을 토하였고(?), 하늘의 교묘함을 대신하여 바야흐로 결애지영(結艾之榮)을 올렸다(?). 열다섯 살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주었고 열여덟 살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을 주었으며, 스물 세 살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고쳐 임용하였고 스물 네 살에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하면서 장군을 겸하게 하였다. 스물 여덟 살에 막리지(莫離支)로 임용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해주더니, 서른 두 살 때 태막리지(太莫離支)를 더하여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가 되었다. 선조의 남기신 업적[先疇之業]을 이으니 선비들의 마음(?)이 열복(悅服)하였으며, 위태로운 나라의 권력을 잡아 사람들의 논란이 없었다(?).
『천남생묘지명』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28세, 그 해는 서기 661년이지 657년은 아니다. 더구나 막리지라는 벼슬은 관직이 아니라 관등이다. 관직은 하나밖에 없을지 몰라도 관등은 여러 명이 동시에 임명될 수가 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657년에 죽었다면, 662년에 사수에 나타나 방효태의 10만 당군을 '전멸'시킨 연개소문은 누구야. 귀신인가?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었던 무전신현(武田信玄, 다케다 신겐). 죽기 전 3년간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전쟁을 피해 국력을 회복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사후 무전(다케다) 집안은 몰락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연남생이 당에 투항할 것을 청한 것이 당 고종 건봉 원년으로 보장왕 25년, 서기 666년 6월 임인일, 이 날은 연개소문이 죽은 시점이 아니라 당 고종이 연남생의 항복을 받아들인 날이다. 적어도 666년 이전에는 살아있으되, 사수에서 당군과 싸웠던 662년 이후에 사망했다고 봐야 한다.
지금은 대체로, 묘지명에서 말한 연남생의 태막리지 취임 때(665)가 연개소문의 사망 연대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중국 기록보다 더 자세하게 연개소문의 최후, 그의 마지막 유언까지도 적고 있는 《일본서기》의 연개소문 사망연대는 천지(덴지) 3년(664) 10월의 일로 적혀있고, 남생이 두 아우와 불화한 이야기는 연개소문 사망 이후 3년이나 지난 천지(덴지) 6년(667)의 일로 적혀 있다. 642년에 일어난 연개소문의 쿠테타를 641년의 기록에 실어놓은 것만 갖고 보더라도 《일본서기》는 실제 시점과 기록된 역사가 1년 정도 어긋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의 사망도 1년을 앞당겨 663년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더구나 연개소문이 죽고 연남생이 곧장 아버지 직위를 계승했을 턱이 없다.(고려의 귀척들 사이에서는 이미 4,5세기부터 유교 예법이 하나의 '귀척 에티켓'으로서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었다.)중국에서도 고려 풍속을 말할 때 '부모와 남편의 상과 사망 뒤 장례까지 3년 걸린다'고 했잖은가. 이건 공자가 말한 3년상이다. 광개토태왕도 412년에 붕어했는데 무덤이 만들어진 것은 태왕이 죽고 3년 가까이 지난 414년 9월 29일. 그때 무덤을 만들고 비로소 『광개토태왕릉비』를 세웠다.
자기 아버지가 한 나라의 대막리지였고 나름 전쟁영웅이었는데, 그런 아버지를 장사지내는데 아무런 의식도 갖추지 않았을 턱이 없지. 장례가 모두 끝났고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예우는 있는대로 다 갖춰서 했으니까 다소 마음놓고 평양을 떠나 국경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는 일단 663년으로 보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단재는 연개소문이 죽은 해의 비정이 틀렸을 뿐이지, 연개소문의 사망시점이 기록된 것보다 이르다고 본 단재의 시각까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의 죽음을 《당서》에서 다소 늘린 것은 사실이니까.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3>제28대(마지막) 보장왕(9)|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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