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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1>제28대(마지막) 보장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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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의 싸움에서 또다시 패배를 해야 했던 당. 하지만 당과 그렇게나 대규모의 전쟁을 치렀던 고려 역시, 농사 지을 장정들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일손이 없어 여자가 나가서 밭 갈고 농사짓는 판이었다.

 

[六年, 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埸, 使彼疲於奔命, 釋耒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淥之北, 可不戰而取矣." 帝從之.]

6년(647) 태종이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였다.

“고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황제께서 친히 정벌하실 때 그 나라(고려)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이긴 성에서도 실로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지만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 그 강토를 어지럽혀, 그들을 명령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게 해서 피곤하게 하면 쟁기를 놓고 보(堡)로 들어갈 것이며, 수년 동안 천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이 말을 따랐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6년(647) 2월

 

당은 여태까지의 전술을 거두고, 조금 다른 전술을 쓰기로 한다. 이전처럼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서 한번에 고려를 쓸어버리는 것보다는, 소규모 부대로 간간이 기습전을 펼쳐 고려의 변경을 수시로 공격해 고려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 한마디로 쉴틈을 주지 말고 찔금찔금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으로 저들의 국력을 조금씩 소모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려의 중심인 요동과 평양 방면으로 직접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봉황성과 압록강 언저리를 집중 공격목표로 삼았더란다.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孫貳郞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皆選習水善戰者配之.]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 명을 파견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했다. 또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3천 군사를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어서 잘 싸우는 자들을 골라 배치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6년(647) 3월

 

《손자병법》 구변(九變)편.

"적국을 굴복시키려면 계략으로 그 나라가 두려워하는 불리한 약점을 찔러 위협하고, 적국을 괴롭혀 부려먹으려면 그 나라 백성들이 쉴 틈이 없도록 일을 만들어라."

그리고 이 전술은 먹혔다.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南蘇)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6년(647) 5월

 

고려로서는 피곤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간신히 이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군사에 관한 일이었으니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백성들을 좀 쉬게 해줘야 할텐데, 이건 뭐 수시로 쳐들어오니 쉴틈도 없이 항상 전시체제로 들어가 있어야 되지않나. 징병제 국가인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꼬박꼬박 군대에서 시간 허비하느라 다른 일을 못할 테니까. 더구나 병농일치 사회에서 농사 지을 사람이 군대로 끌려가 오랫동안 머무르게 되면...

 

[秋七月, 牛進達·李海岸入我境, 凡百餘戰, 攻石城拔之, 進至積利城下. 我兵萬餘人出戰, 李海岸擊克之, 我軍死者三千人.]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3천 명이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6년(647) 7월

 

안정복 영감은 《성경지(盛京志)》를 인용해서, 봉황성의 산 위에 있는 옛 성터가 석성이라고 했다. 연개소문이 보낸 증원군 1만이 와서 당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변방은 이때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고려의 방어력을 약화시키고자 당이 소수 병력으로 고려 후방을 공격했던 이 싸움은 석성이 당군에게 일시 함락당하고 적리성이 공격당하긴 했지만, 일단은 고려에서 당군을 몰아내는 데는 가까스로 성공했다.

 

[太宗勑宋州刺史王波利等, 發江南十二州工人, 造大舡數百艘, 欲以伐我.]

태종이 송주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해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치려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6년(647) 8월

 

전쟁이라는 것이 사실 머릿수만 갖고 하는 것은 아닌 것이, 군사적으로 우위인 나라 보면 경제적으로도 좀 잘 나간다는 나라들이 꽤 있다(북한만 빼고). 고려와 당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데, 물자가 조금이라도 풍부한 당이 소모전을 택해 고려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고려보다는 당에게 유리한 싸움이 될 것이었다. 당에 비해 고려의 영토와 물자가 그만큼 모자란 것은 틀림없으니까.

 

[冬十二月, 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 入謝罪, 帝許之.]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6년(647)

 

왕의 둘째 아들이었다면 왕자일텐데, 왕자가 막리지를 맡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막리지라는 벼슬을 지닌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의미일까?

 

[七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衛將軍裴行方副之, 將兵三萬餘人及樓舡戰艦, 自萊州, 泛海來擊.]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3만여 군사와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서기 648년. 이 해는 당이 거란의 추장 굴가(窟哥)를 지절(持節)ㆍ십주제군사(十州諸軍事)ㆍ송막도독(松漠都督)을 삼고 영주(營州)에 동이교위(東夷校尉)를 두었던 때였다. 수 말년부터 점차 세가 늘어난 거란족은 북쪽으로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요서 정북쪽 2백 리, 고려와 당 사이의 변경지대에 이르러 시라무렌 강(염난수)을 따라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동서 5백 리에 남북 3백 리, 선비족이 다스리던 옛 땅을 열 개로 나누어서 숫자가 많은 부락은 3천 명까지 되고, 적은 부는 1천여 명이었다. 이들이 당에 가담했다. 

 

이후로도 수시로 당은 고려를 쳤다. 크게 한방 날리는 것이 아니라, 작게작게 수십대, 혹은 수백대. 아니면 그 이상으로 쳤다 빼고 쳤다 빼는 짓을 반복했다.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여름 4월에 오호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서 우리 보기 5천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 군사 만여 명은 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신감의 복병이 나왔으므로 패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7년(648)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 보니까, 기록에서야 당군이 고려의 5천 보기를 깨뜨렸다고 했지만 사실은 고신감이 패해서 고려군을 피해서 배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고려군 1만이 시도한 야습도 일단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뒤 고신감은 곧 철수했다.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或以爲 "大軍東征, 須備經歲之糧, 非畜乘所能載, 宜具舟艦, 爲水轉. 隋末, 劒南獨無寇盜, 屬者遼東之役, 劒南復不預及, 其百姓富庶, 宜使之造舟艦." 帝從之.]

황제는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할 것으로 여기고 다음해에 30만 군사를 발동하여 단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군이 동쪽으로 정벌하려면 반드시 한 해를 지낼 군량을 갖춰야 합니다. 짐승과 수레로 실어 나를 수 없으므로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수 말기에 검남(劍南) 지방만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근자에 있었던 요동 싸움에도 검남은 또 참여하지 않아 그 백성들이 많고 부유하므로,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7년(648) 6월

 

당은 고려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고려의 성 한두 개를 깨뜨리긴 쉬워도 고려의 굳건한 요동방어망을 뚫기는 힘들다는 것을 보장왕 3년의 전투에서 깨달았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고, 요동방어선을 통과하지 않고 바로 황해를 가로질러서 평양을 공격하는 작전, 예전에 수양제가 우중문과 우문술을 시켜 30만 별동대로 수행하려던 그 방법을 모색했다. 647년에 고려를 칠 때 군사들을 모조리 헤엄 잘 치는 사람들로 채운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해군 양성, 당이 고려를 치기 위해서 내놓은 비책이었다. 문제는 군선의 숫자였다.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太宗遣左領左右府長史强偉於劒南道, 伐木造舟艦. 大者或長百尺, 其廣半之. 別遣使行水道, 自巫峽, 抵江楊, 趣萊州.]

가을 7월에 왕도의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다.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巫峽)에서부터 강주(江州) · 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로 가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7년(648)

 

물자가 많고 땅이 넓은 중국이라곤 해도, 태종이 다시 고려를 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산동과 유주, 영주 일대에선 예전 침공 때에 나무를 베어버려 산이 온통 반질반질 대머리. 때문에 배를 만들 큰 나무를 모두 검남과 사천에서 옮겨와야 했다. 수 때에 허리까지 물 차는 곳에서 거의 반강제 노역을 시키느라 배무이하는 장인들이 허리가 썩어서 구더기가 생길 정도였다는데, 당 태종도 결국 고려 하나를 치기 위해 수 양제와 똑같은 짓을 백성들에게 자행한 것. 인생 참, 살면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게 자존심이라는데, 그깟 10원어치도 안 되는 자존심이 뭐라고.

 

실제로 《자치통감》 정관 22년 기사에 보면 함선 건조에 따른 불만이 쌓이고 쌓여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배 한 척당 비단 1천 2백 필을 거두니, 파촉(巴蜀) 지방에서 살던 공주(邛州)ㆍ미주(眉州)ㆍ아주(雅州) 세 주의 만족(蠻族)들이 반란을 일으켜 농서(隴西)와 섬내(陜內)의 2만 군사로 진압해버리고, 그렇게 함선 장인들과 노동자들을 쥐어짜 만든 배가 길이 100척에 높이 50척, 그것도 혹시나 고려 첩자들이 알까봐 양자강 중류의 내륙지방인 검남까지 나무를 옮겨다 몰래몰래 만들었다니 참 그 각고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당의 군선 복원 그림.>

 

당군이 수시로 고려를 가볍게 쿡쿡 찔러대는 데도, 고려가 당의 해안기지나 영주 등지를 공격했는지 하는 것은 기록에 없어서 알 수 없다. 645년 이후 고려는 당에 대한 소극적 방어에만 치중하면서 당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가 아닌 성곽 축조 위주의 방어전술만 구축했다. 요동 북쪽과 압록강 유역 일대에 무수히 많은 성을 쌓아서 당의 공격을 '견디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거대한 물자와 영토를 지닌 당 앞에서 그에 비해 현실적으로 물자가 딸리는 고려가 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九月, 羣獐渡河西走, 羣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淥,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淥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 轉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다. 사흘 동안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했는데,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1만여 보기(步騎)를 거느리고 막았다. 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했지만, 박작성은 산에 의지해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시[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해서 무너졌다. 황제가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하여 군량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갈마두게 하고,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7년(648)

 

오호도는 고려와 가장 가까운 섬이었다. 《사기》에 보면 한 고조에 맞서던 제의 전횡이라는 사람이 5백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간 섬의 이름도 마침 '오호도'였는데, 한 고조가 그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하면 살려주겠지만 저항하면 다 죽이겠다고 했고 전횡은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부하 둘만 데리고 항복하러 한의 수도로 가다가, 코앞에서 마음을 돌려서 '어떻게 내가 어제까지 맞서던 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죄를 할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이러고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단다. 그를 따라간 두 부하와 섬에 남아있던 다른 군사들도 모두 그 소식을 듣고 자결해버렸고, 유방은 전횡을 왕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다는, 누군가에게 굴하지 않는 자존심을 상징하는 영웅의 섬이었다. 예전에 듣고 조금 찡했던 기억이 나서 잠깐 이야기해본 것이고 실제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바다를 가로질러 고려를 경략하려는 태종의 수군양성계획은 오호도를 수군의 거점으로 삼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지금의 산동반도 등주와 요동반도 사이에는 대사도, 귀음도, 말도, 오호도로 연결되는 묘도 열도가 있고, 오호도 북쪽으로는 오호해가 있다. 이곳을 건너면 곧장, 요동 반도 끝자락 고려의 수군기지인 비사성에 이르게 된다.

 

[遣伊湌金春秋及其子文王朝唐. 太宗遣光祿卿柳亨, 郊勞之. 旣至, 見春秋儀表英偉, 厚待之. 春秋請詣國學, 觀釋奠及講論, 太宗許之. 仍賜御製溫湯及晉祠碑幷新撰晉書.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跪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强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翦除凶惡, 則敝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爲左武衛將軍. 還國詔令三品已上燕餞之, 優禮甚備. 春秋奏曰 “臣有七子. 願使不離聖明宿衛.” 乃命其子文王與大監△△.]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에 조공하였다. 태종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다다르니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 참관을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주었다. 어느날 따로 불러 만나서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天朝)를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멋대로 침략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천병(天兵)을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화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 3품 이상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춘추가 아뢰었다.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 △△에게 명하였다.

《삼국사》 권제5, 신라본기5, 진덕여왕 2년(648) 겨울

 

신라는 그런 당 태종의 야심에 부합해서 그들의 '굴욕외교'를 펼쳐갔다. 자신들의 고유한 복장까지 바꿔가면서, 백제에 대한 복수에 눈이 멀어있던 이 사내가 기어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아마 이 자의 저열한 야심도 당 태종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제에 대한 복수심에 눈먼 김춘추와 고려에 대한 복수심에 눈먼 당 태종.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복수심에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복수심은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만든다.

 

[春秋還至海上, 遇高句麗邏兵. 春秋從者溫君解, 高冠大衣 坐於船上 邏兵見以爲春秋 捉殺之 春秋乘小船至國 王聞之嗟痛 追贈君解爲大阿湌 優賞其子孫]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려의 순라병[邏兵]을 만났다. 춘추를 따라갔던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高冠]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大衣]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알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삼국사》 권제5, 신라본기5, 진덕여왕 2년(648) 겨울

 

고려도 신라의 이런 움직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바다 위에서 고려의 순라병이 신라 사신을 습격했는데, 김춘추는 온군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넓은 서해 바다에서 신라의 배가 고려 수군을 만날 정도로 고려 사람들이 수군 방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던 반증이 아닐까. 이 온군해는 오늘날 경주 온씨 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는데, 고려에도 온달이니 온사문이니 해서 온씨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온군해라는 사람은 어떤 일을 계기로 고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온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반역자는 아니었을 거다. 근구수왕 때에 고려에 도망쳤던 백제 사람 사기처럼 뭔가 시시한 죄목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 해, 당 태종은 뜬금없이 장수 설만철과 배행방을 장군직에서 제명시키고 변방 상주 땅으로 유배보내 버린다. 전쟁에서 이긴 장수들을 뭐하러 유배를 보낸 건지 물어볼 수도 없고 참 나 원. 최전방에 있던 오호도를 전진기지로 삼고자, 고려를 치기 위한 군사들을 그곳으로 옮겨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八年, 夏四月, 唐太宗崩. 遺詔罷遼東之役.]

8년(649) 여름 4월에 당 태종이 죽었다. 유조(遺詔)에 요동(고려) 치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뜻밖에도 당태종이 죽는다. 사인은 기록되기로는 고려 원정에서 얻은 병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태종은 황제의 임무조차 자신이 직접 수행하지 못해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기도 할 정도였다니, 고려 원정에서 이 양반이 자기 몸에까지 톡톡히 대가를 받아서 돌아오셨군 하는 생각이 나서 웃음이 절로 난다. 게다가 죽으면서 남긴 명이라는 게 고작 고려를 치는 것을 그만두라는 거였다니, 참 김빠지는 일 아닌가. 그렇게나 고려를 소규모 부대로 수시로 쳐서 승리한 기록만 줄줄이 늘어놓고서, 어째서 갑작스럽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일까.

 

[論曰: 初, 太宗有事於遼東也, 諫者非一. 又自安市旋軍之後, 自以不能成功, 深悔之, 歎曰 "若使魏徵在, 不使我有此行也." 及其將復伐也, 司空房玄齡病中上表, 諫以爲, "老子曰, '知足不辱, 知止不殆'. 陛下威名功德, 旣云足矣, 拓地開疆, 亦可止矣. 且陛下每決一重囚, 必令三復五奏, 進素膳, 止音樂者, 重人命也. 今驅無罪之士卒, 委之鋒刃之下, 使肝腦塗地, 獨不足憫乎? 嚮使高句麗違失臣節, 誅之可也, 侵擾百姓, 滅之可也, 他日能爲中國患, 除之可也. 今無此三條, 而坐煩中國, 內爲前代雪恥, 外爲新羅報讎, 豈非所存者小, 所損者大乎? 願陛下許高句麗自新. 焚凌波之舡, 罷應募之衆. 自然華夷慶賴, 遠肅邇安." 梁公將死之言, 諄諄若此, 而帝不從, 思欲丘墟東域而自快, 死而後已. 史論曰 「好大喜功, 勤兵於遠」者, 非此之謂乎?]

논하노니, 처음에 태종이 요동에서 사고 칠 때 말리는[諫]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 안시성에서 회군한 뒤에는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었다.

“위징(魏徵)이 있었으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가 다시 정벌하려 할 때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병중에서 상소하여 말렸다.

“노자(老子)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했습니다. 폐하는 위명과 공덕이 이미 만족할 만하며, 토지를 개척하고 강토를 넓히셨으니 역시 그칠 만합니다. 또 폐하께서는 매양 한 명의 중죄인을 판결할 때에도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간소한 반찬을 올리게 하시고 음악을 그치게 하셨으니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신 까닭입니다. 이제 죄없는 사졸들을 몰아 칼날 아래 맡겨 비참하게 죽게 하시니, 그들만은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다는 겁니까?

일찌기 고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마땅히 죽여야 하고, 백성을 억압하고 못살게 했다면 멸망시켜야 하며, 훗날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이 세 가지 죄목이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는 전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를 위해 복수한다 하시니, 어찌 '보존한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많은'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고려가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착해지도록[自新] 허락하시고, 파도 가운데의 배는 불사르고 모집에 응한 군사를 돌려보내소서. 그러면 자연스럽게 화이(華夷)가 기뻐해 의지할 것이며, 멀리서는 조심하고 가까이서는 조용할 겁니다.”

양공(梁公)이 죽을 때 했던 말이 이같이 간곡했는데, 황제는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스스로 즐기려다 죽어서야 그만두었다. 사론에서

『뻥치기나 좋아하고 업적 남기기 바빠서 먼데까지 나가 삽질 하는데만 열중했더라[好大喜功, 勤兵於遠].』

는 것이 이것을 말함이 아닐까?

 

간만에 부식이 영감이 제대로 개념 박힌 소리를 했다. 고려를 칠 그럴듯한 이유도, 명분도 실리도 아무 것도 없는데도, 고려를 치는 것은 개죽음밖에 안 된다고. 당 태종의 측근이었던 방현령이 죽기 직전에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그걸 안 듣고 설치다가 결국 죽고. 죽을 때는 고려를 치지 말라는 명령 한 마디 내린채 꼴깍. 그럴 것을 뭐하러 고려와 그렇게 싸우고, 요택의 진흙창 퍽퍽거리고 덜덜 떨어가며 퇴각했던가? 어차피 먹지도 못할 감 차라리 찔러나 보시지 그러셨나 그래.

그런데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우리 나라 전설에서, 당태종이 눈에 화살 맞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고려를 쳤던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고전하다가, 고려군의 화살에 맞아서 한쪽 눈깔이 병신이 되어서 돌아갔고, 이때 얻은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우리 나라에서는 꽤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고려 말(14세기) 3은의 한 사람으로 고려뿐 아니라 조선조까지 대학자로 칭송받았던 목은 이색의 정관음(貞觀音)에,

 

晉陽公子結豪客   진양 공자가 호걸들을 맺어 
風雲壯懷滿八極   풍운의 장한 기개 우주에 가득했네

赫然一起揮天戈   와락 한 번 일어나 천과를 휘두르니 
隋堤楊柳無顔色   수제(隋堤)의 버들도 빛을 잃었더라.
已踵殷周成武功   은ㆍ주를 본받아 무공을 이미 세웠거니
宜追虞夏敷文德   우ㆍ하를 따라 문덕을 폄이 마땅하다
持盈守成貴安靖   채워진 것 지니고 이룬 것 지킴엔 안정함이 귀한 법  
好大喜功多反側   떠벌이기 좋아하고 공을 즐기면 뒤집히기 일쑤라 
三韓箕子不臣地   삼한은 예로부터 신하라 칭하지 않은 기자의 땅 
置之度外疑亦得   치지도외함이 아마도 득책일 것을 
胡爲至動金玉武   어쩌다 군병을 움직여서 
銜枚自將臨東土   재갈 물리고 몸소 동토에 오셨던가?
貔貅夜擁鶴野月   백만 군사가 학야 달밤에 몰려들고
旌旗曉濕鷄林雨   무수한 깃발이 계림(鷄林) 새벽비에 젖었네.
謂是囊中一物耳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여기셨지만
那知玄花落白羽   검은 꽃이 흰 깃에 떨어질 줄은 모르셨겠지.
鄭公已死言路澁   정공이 이미 죽어 언로도 막혔으니

可笑豐碑蹶復立   우스워라 큰 비석이 넘어졌다 되 일어섰네 
回頭三叫貞觀年   내가 고개 돌려 “정관” 세 번을 소리치니 
天末悲風吹颯颯   하늘 끝 슬픈 바람이 와스스 불어 오네

 

이 긴 시 가운데 한 구절,

 

謂是囊中一物耳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여기셨지만

那知玄花落白羽   검은 꽃이 흰 깃에 떨어질 줄은 모르셨겠지.

 

라는 것을 가리켜서 당 태종이 고려에서 화살 맞은 것을 노래한 것이라고.

이 정관음 시는 목은 이색이 원에서 돌아오다가 유림관이라는 곳을 거치면서 읊은 시인데,

그 시 중에서 이 구절이, 당 태종이 눈에 화살 맞아 애꾸가 된 일을 노래한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만들어놓은 당태종의 밀랍인형. 두 눈이 멀쩡하다.>

 

역사학자 이이화라는 분도 중국 현지 답사하다가 현지인한테서 당 태종이 독화살 맞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으니, 꽤나 오래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던 것 같으나, 이걸 문헌으로 기록한 것은 중국의 기록에는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사》나 《삼국유사》에도 이런 이야기가 없으며, 다만 목은 이색이 지은 이 정관음이 가장 오래되었고, 그뒤 조선조의 《필원잡기》나 《연원직지》, 《성호사설》, 《동사강목》, 《오주연문장전산고》, 《몽경당일사》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하며 당태종이 고려에 쳐들어왔다가 화살을 맞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제법 넓게 퍼진 이야기가 되었다.

 

이 목은 이색으로 말하자면 원(元)에 유학해서 과거에 급제해서 관리로서 원에서 살았었고, 그가 이인복 등과 함께 지은 《금경록》이 훗날 《고려사》 편찬 때에 참고사료로 쓰일 정도로 우리나라 학계에 굉장히 많은 공을 세우신 분인지라, 그런 권위있는 양반께서 허투를 말했을리 없다고 조선조 선비들은 믿었던 듯 하다. 깐깐하기 짝이 없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이 일에 대해 열변 토해가며 자세히 설명해 놓으셨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의 정관음(貞觀吟: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에도,

“어찌 현화(玄花)가 백우(白羽)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那知玄花落白羽].”

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新)ㆍ구(舊)《당서(唐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버렸다거나 하면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에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명(明)나라 태종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기어이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

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史)》나 《요사(遼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에 나는 지나 사람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해서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 나의 앞서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나 사람에게 나라의 수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고 해서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ㆍ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貞觀) 19년(645)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계전(劉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계가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
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646)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않자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 23년(649) 5월에 죽었다."

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목(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痛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본 것을 꺼려 숨겨서, 주(周)의 천자가 정후(鄭侯)의 화살에 다친 것과 노(魯)의 은공(隱公), 송공(昭公)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난 것을 《춘추(春秋)》에 쓰지 않았는데, 공구(孔丘)의 이런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 쪼가리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꿔놓았다. 화살 상처가 내종(內腫: 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 때문에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었다고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隨軍)을 물리친 을지문덕이 도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 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린 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ㆍ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ㅡ 진정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痛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 3년(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다치고 도망쳐, 돌아가서 당시 외과의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8년(649)에 죽었다.’라는 것이었다. 이 수십 자를 얻으려고 5, 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해서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 또한 적지 않았다.

 

예전에 인터넷으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구당서》 원문을 구해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한문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단재 선생이 찾은 것을 나는 찾지 못했다. 《구당서》에는 유박전이라는 열전이 없었고, 내종이라는 말도 없었다. 대학교 들어가서 《자치통감》 번역본을 도서관에서 찾을수 있었는데, 내가 본 자치통감 번역본에는 태종이 요동에서부터 병을 얻었다고 하는 말도 실려있지 않았다. 번역본들 중에는 일부러 중요한 내용만 뽑아서 번역하느라, 다른 부분들이 많이 첨삭되는 수도 있다고는 했다.

 

《구당서》에는 유박이라는 인물은 없고 유계(劉)라는 인물의 열전은 있다. 박(泊)하고 계()는 서로 글자가 비슷한 모양이니까 아마 '계'의 오자일 것인데, 태종본기에는 그를 시중(侍中)이자 청원남(淸苑男)이라고 했고, 태종이 고려를 공격하러 떠났을 때 태자 치(훗날의 고종)와 함께 정주(定州)에서 감국(監國)을 맡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감국이란 황제 부재중에 태자가 대신 국정을 맡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유계열전에 실려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十九年, 太宗遼東還, 發定州, 在道不康. 洎與中書令馬周入謁. 洎ㆍ周出, 遂良傳問起居, 洎泣曰 "聖體患癰, 極可憂懼." 遂良誣奏之曰 "洎云 '國家之事不足慮,正當傅少主行伊ㆍ霍故事, 大臣有異志者誅之, 自然定矣.'"太宗疾愈, 詔問其故, 洎以實對, 又引馬周以自明. 太宗問周, 周對與洎所陳不異. 遂良又執證不已, 乃賜洎自盡. 洎臨引決, 請紙筆欲有所奏, 憲司不與. 洎死, 太宗知憲司不與紙筆, 怒之, 並令屬吏.]

19년(645)에 태종이 요동에서 돌아왔는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오는 도중에 병을 얻었다[在道不康]. 계와 중서령(中書令) 마주(馬周)가 들어와 뵈었다. 계와 주가 나가니 수량(遂良)이 기거(起居)를 물어보기에[傳問] 계가 울며 말하였다.

“성체(聖體)가 편찮으시니[患癰] 몹시 걱정스럽고 두렵습니다.”

수량이 이것을 거짓으로 꾸며서[誣奏] 말하였다.

“계가 말하기를 '국가의 일은 걱정할 것이 없다. 마땅히 소주(少主)에게 전하고 이(伊)ㆍ곽(霍)의 고사(故事)를 따르는 것이 옳다. 다른 뜻을 품은 대신들은 모두 잡아들여 벌하면 자연히 진정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태종의 병이 낫자[疾愈] 조하여 그 이유를 묻게 했다. 계는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한 마주를 불러서 스스로 증명하려 하였다. 태종이 주에게 물으니, 주는 계와 함께 대답하여 아뢰는 바가[所陣] 다르지 않았다. 수량 또한 집증(執證)하여 불기(不已)하니, 이에 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自盡] 명하였다. 계는 자결하기에[引決] 이르러 아뢸 것이 있다며 종이와 붓을 달라고 했는데 헌사(憲司)가 주지 않았다. 계가 죽자 태종은 헌사가 지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노하여 담당관리 모두에게 벌을 내렸다[並令屬吏].

 

《구당서》에 실린 유계의 열전에서 정관 19년조 기사만 갖고 왔는데, 여기를 보면 당 태종이 12월에 병이 있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고 그냥 정관 19년에 병이 있었다고만 적고 있다. '기록은폐'라고 하면 우스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구당서》유계열전에서 말한 태종의 병에 대해 《구당서》태종본기는 그 사실을 싣지 않고 있다. 태종은 아무렇지도 않게 겨울 10월 병진일에 임유관에 들어왔고[入臨渝關], 무오일에 한무대(漢武台)에 들러서 공덕을 돌에 새겼고[次漢武台,刻石以紀功德] 11월 신미에 유주(幽州)에 행차한 다음 계유일에 파티 한번 거하게 하고 나서 군사를 돌렸고[大饗還師] 12월 무신에 병주(並州)에 행차했다.

 

유계의 죽음이나, 고려 원정과는 별반 상관이 없어보이는 설연타의 진주비가(眞珠毗伽) 카간의 사망 소식도 이 병주 행차 기록 바로 뒤에 실려있다. 《신당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구당서》보다 쬐끔 달라진게 있다면 임유관에 들어오기 전인 10월 병오일에 영주에 들러 죽은 사람들 제사지내준 거[以太牢祭死事者], 잔치 열어준 다음 경진일에 역주(易州)에 들렀다는 거, 계미일에 평양도행군총관이었던 장문간을 무슨 죄인지는 몰라도 처벌한 것[平壤道行軍總管張文幹有罪伏誅], 정해일에 양사도의 벼슬을 깎아 공부상서로 삼은 것[貶楊師道為工部尙書]이 추가되었고, 정주에 도착한 날짜가 11월 병술일로 정확하게 기입되었다. 설연타에 대해서도 카간이 죽은 걸로 끝나지 않고 12월 기미, 그러니까 유계가 죽기 하루 전날에 하주(夏州)를 약탈한 설연타를 좌령군대장군 집실사력이 맞서 싸웠다고 한 정도로 살이 더 붙었다. 하지만 유계열전에서 말한, 정관 19년(645)경 태종이 정주에서부터 앓았다는 '병'에 대해서는 둘다 눈꼽만큼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있다.

 

《신당서》에서 '병'은 엉뚱하게도 이듬해 정관 20년(646)조부터 튀어나오는데 "3월 기사에 고려에서 돌아왔다. 경오에 불예하여 황태자가 청정하였다[三月己巳,至自高麗. 庚午,不豫,皇太子聽政]"고 적어놨지만 이 병에 대해서는 7월 신해일자로 "병이 나았다[疾愈]"고 적고 있으니 이게 화살맞은 상처인지 뭔지, 정말 화살을 맞아서 그게 당 태종 죽음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뭐 비집고 들어갈 건더기가 없다. 반면 《구당서》정관 20년조는 태종이 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아예 안 적고 있다. 사료 가치에 있어 《신당서》보다 높다고 자부하는 《구당서》이지만, 한 나라 천자의 신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빼먹은' 부분이 많으니 《구당서》를 못 믿겠다고 하는 말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병이 나은 시기에 대해서도 《자치통감》에서는 《신당서》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게 정관 21년(647) 11월 임자일이라고 적고 있다. "임자에 상의 질(疾)이 나았는데 사흘에 한 번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다[壬子,上疾愈,三日一視朝]."고 말이다. 신ㆍ구《당서》 그리고 《자치통감》의 기록을 조합한다면 당 태종은 정주에 도착한 645년 11월 병술일부터 647년 11월 임자일까지 꼭 2년 동안을 그 원인모를 '질(疾)'에 시달렸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2년 뒤 정관 23년(649) 여름 4월 기사일에 함원전(含風殿)에서 죽었다.

 

사마광이 《신당서》를 그대로 보고 쓴 것이 아닌 줄은 알겠는데 그 '질(疾)'이라는 것이 다 나은 뒤에도 《자치통감》에서는 태종이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는게 '사흘에 한 번'이었다는 얘기를 감히 여기 '눈에 화살맞은 이야기'와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 이야기에 대해서 조금 회의스러운 입장이다. 안정복 영감이 《동사강목》에서 이 이야기를 말할 적에는,

 

세상이 전하는 말에, 당 태종이 안시(安市)를 치다가 유시(流矢)에 눈을 맞았다고 하는데, 중국 역사가 이를 숨기고 바로 쓰지 않은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겠으나, 우리 나라 역사에도 보이는 곳이 없다. 이목은(李牧隱)의 정관음(貞觀吟)에,

 

謂見囊中一物耳    주머니 속에 든 한 물건으로 보았는데 
那知玄花落白羽    어찌 화살이 눈에 떨어질 줄 알았으랴

 

하였다. 목은이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그 말이 망령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태종이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와 악성 종기를 앓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유시(流矢)에 상처입은 것을 역사에서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세의 유종이라서 망령된 소리를 하지 않는다ㅡ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 단재 선생을 비난한다던지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정복 영감이 《동사강목》을 지으면서 《구당서》와 《신당서》, 《자치통감》, 《강목》을 여러 차례 읽어봤을 것이고, 그렇다면 단재 선생이 지적한 사실, 그 책들이 전하는 태종의 사망 원인에 대한 내용이 다른 것을 눈으로 보실수 있었을텐데, 왜 《동사강목》에서는 달랑, 《자치통감》에서 태종이 요동에서 악성 종기를 얻었다는 그 하나만 증거라고 언급해놨는지도 나는 되게 의문스럽다.

 

비록 정신나간 소리나 지껄이고 다니지만, 내 근본은 사관이다. 사관으로서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또 있을까. 나는 어떤 것이든 편견을 걷어내고 사실을 보고 싶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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