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4>제28대(마지막) 보장왕(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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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죽은 뒤에도 고려는 잘 갈 것처럼 보였다.
........는 아니지?
[二十五年, 王遣太子福男<新唐書云男福>, 入唐, 侍祠泰山.]
24년(665) 왕은 태자 복남(福男)<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고 하였다.>을 보내 당에 들어가 태산(泰山)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삼국사》에는 정확한 날짜를 표시해놓지 않았지만 《구당서》에는 이것이 인덕 2년, 그러니까 서기 665년 겨울 10월 계해일에 있었던 일이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보장왕 25년이 아니라 24년의 일로 끌어올려서 봐야 한다.
[蓋蘇文死, 長子男生代爲莫離支.]
개소문이 죽자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4년(665) 겨울 10월
여기서 잠시, 연개소문의 가계도를 소개한다.
그림판으로 대충 그려본 연개소문 집안의 가계도다. 묘지명의 기록대로라면 연개소문의 아들은 모두 세 명. 그 중 남생과 남산 두 아들의 묘지명이 남아있고, 남생의 아들인 헌성과 손자 비도 그 묘지명이 남아있어 부계나마 이만큼 그릴수 있다.(문제는 그게 당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 연개소문이 죽은 뒤, '장자상속'이라는 동서고금의 보편적(?) 상속관습에 따라, 연개소문이 갖고 있던 대막리지의 지위는 장남 남생에게 넘어갔다. 이미 나이 아홉 살 때, 남생은 고려의 하급 무관직 선인(先人)이었고, 열다섯 살에는 8위 중리소형(中裏小兄)으로 승진했으며, 열여덟 살에 이르러 6위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었다가 5년만에 다시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의 관직을 받고 이듬해에는 1개 부대를 통솔하는 장군(대모달)직에 오른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 때(661)에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겸 '막리지'의 벼슬을 얻었는데, 단재 선생은 연개소문의 사망 연대가 조작된 근거를 여기 두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죽은 해에 태막리지(太莫離支)로서 군사와 국정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가 되었다. 이때 나이가 서른 두 살.(숫제 다 아버지 빽이었지) 연개소문의 다른 아들인 연남산은 어땠을까. 묘지명에 보면 남산은 남생과는 다섯 살 터울(우리 형제하고 똑같네)인데 형보다는 훨씬 늦은 열여덟 살 때(656)에 형과 같은 중리대형의 관직을 얻었고, 3년 뒤에는 중리소활(??)이라는 관직을 얻었으며, 형이 막리지가 되던 해에는 위두대형을 맡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기록은 없지만 남건도 비슷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初知國政, 出巡諸城, 使其弟男建 · 男産, 留知後事.]
처음 국정을 맡고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그 아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4년(665) 겨울 10월
남생이 평양을 떠나 전국시찰에 나선 시점은 일단 겨울 10월이 분명하다.
[冬十月, 高麗大兄男生, 出城巡國. 於是, 城內二弟, 聞側助士大夫之惡言, 拒而勿入. 由是, 男生奔入大唐, 謀滅其國.]
겨울 10월, 고려의 대형(大兄) 남생(男生)이 성을 나가 나라 안을 돌아보았다. 이때, 성안의 두 아우가 측근의 사대부들의 꾀임을 듣고서, 남생을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문에 남생은 대당(大唐)으로 가서 그 나라(고려)를 멸망시킬 것을 꾀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7, 천지기(天智紀, 덴치키) 6년(667)
《일본서기》에도 겨울 10월이라고 했는데, 그 해를 천지(덴치) 6년(667)이라 적어 《구당서》나 《신당서》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삼국사》에서 말한 고려 왕자 고복남의 봉선식 참가 시점이 겨울 10월이라는 걸 앞서 확인할 수 있었고, 기록이 10월조 뒤에 등장하고 있는데, 《일본서기》도 공교롭게 '겨울 10월'이 고려에서 남생이 지방순시를 시작한 때라고 말한 것과 맞춰보면 남생이 평양을 떠난 것은 10월이 분명하다. 더구나 《일본서기》에서는 연남생이 펴라를 떠나고 정계에서 축출되고 당에 귀부하기까지의 과정들이 겨울 10월 한 달 동안 모두 벌어진 일들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 연남생이 당에 귀부한 것은 《구당서》나 《신당서》, 그리고 그걸 인용한 《삼국사》 모두가 건봉 원년(666) 6월의 일이라고 적고 있는 만큼, 이것은 겨울 10월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여름 6월에 끝난 일들을 두서없이 '겨울 10월' 한 시점 안에 모두 뭉뚱그려 적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문 문장의 특성상 이런 일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난 일을 마치 한 해, 한 달이라는 '짧은'시간 동안에 벌어진 일인양 뭉뚱그려서 적다보니 이런 착각이 난 것이다. 두 《당서》가 모두 연남생의 내부를 666년의 일이라 지목했는데도 《니혼쇼키》가 667년의 일로 적은 것은 명백하게 틀린 것이다. 서기 667년 겨울 10월에 평양을 떠난 연남생이 여름 6월에 당에 붙었다는 말은 겨울이 끝나더니 바로 여름이 왔다는 식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는 《일본서기》가 실제 일어난 시점에서 1년, 아니 2년을 더 끌어내려서 이 사건을 서술했다고 판단하고 667년이 아닌 665년의 기사로 끌어올려 적는다. 원래 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2년씩이나 나는 것은 사건의 '결과'를 놓고 저술했기 때문일까. 665년에 평양을 떠나기는 했지만 정작 당에 내부한 것은 666년. 《일본서기》는 연남생이 당에 내부한 시점(666년)을 중심에 놓고 적으면서 666년을 667년으로 착각해 적어버린 것이리라.
[或謂二弟曰 "男生惡二弟之逼, 意欲除之. 不如先爲計." 二弟初未之信, 又有告男生者曰 "二弟恐兄還奪其權, 欲拒兄不納." 男生潛遣所親, 往平壤伺之, 二弟收掩得之. 乃以王命召男生, 男生不敢歸.]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였다.
“남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먼저 계략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
두 아우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였다.
“두 아우는 형이 그 권력을 도로 빼앗을까 두려워, 형에게 거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 그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그를 덮쳐 붙잡았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4년(665) 겨울 10월
아버지 빽으로 관직에 오른 남생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적잖이 부담이었다. 아버지는 당의 옥저도행군 10만 명을 사수에서 전멸시킨 강한 무용을 지닌 무인이었지만, 정작 아들인 자신은 압록강에서 3만 군사 개죽음만 시키고 목숨만 건져 도망쳤던 전력도 있다. 두고두고 트라우마가 되었겠지. 일종의 자격지심. 설상가상 남생과 남건, 남산 세 형제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했다.
ㅡ형제가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우애하여 지위를 다투지 마라.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그런 유언을 했다는 것은,연개소문 자신도 그의 사후 자식들간에 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로 평소에도 그닥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는 의미로 볼수 있을까? 《니혼쇼키》의 찬자들도 아마 고려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걸 보면 연개소문의 유언 이야기를 전해준 고려 사람들의 연개소문에 대한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짚어볼수 있을 것 같다. 거기서 연개소문은 자신이 죽은 뒤의 나라를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아울러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의 아들들이 서로 다툴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고려가 분열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그의 우려는 죽은 뒤 현실로 드러났다. 차마 기록에 남지 못했던 형제다툼. 국내성을 거점으로 하는 연남생과 평양성을 거점으로 하는 연남건ㆍ연남산 형제 사이에 고려의 권력을 잡기 위한 대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五年春正月戊辰朔戊寅, 高麗遣前部能累等進調.]
5년(666) 봄 정월 무진 초하루 무인(11일)에 고려가 전부능루(前部能累) 등을 보내어 조를 올렸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7, 천지기(天智紀, 덴치키) 5년(666)
전부능루는 대략 다섯 달을 왜국에서 머무르다 6월 을미 초하루 무술(4일)에 돌아왔다.(고려의 땅에 세워진 후신 발해와 왜국의 유난히 잦았던 외교관계는 이미 발해의 전조(前朝) 고려 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찬성씨록》에서 복당련(福當連, 후타기노무라치)의 선조라고 적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다.
[男建自爲莫離支, 發兵討之.]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그를 토벌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5년(666)
《삼국사》에 입전된 세 형제의 열전을 참조하면, 형의 반란을 토벌한다며 스스로 막리지가 된 연남건은 형이 왕명이라고 불렀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형이 정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해 '제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선 평양성에 남아있던 연남생의 아들(남건에게는 조카) 연헌충을 죽였다[男建殺其子獻忠]. 권력 앞에서는 피붙이도 이리 비정하게 베어버릴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男生走據國內城, 使其子獻誠, 詣唐求哀.]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을 시켜 당에 가서 애걸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5년(666)
국내성은 평양성에 대한 불만세력들의 결집소나 다름없던 곳(남생의 처가일 수도 있다네요). 《삼국사》열전에 기록된 바 그가 당에 귀부하기로 했을 때 그의 옆에는 따르는 고려 관료들 말고도 거란과 말갈의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무리와 거란ㆍ말갈의 병사를 이끌고 당에 붙었다[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고 한 기록이 그것이다. 결국 고려 멸망의 1등공신이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은 연남생이지만, 처음부터 당에 가서 붙을 생각은 아니었음이 오늘날에는 확인되고 있다. 국내성에서 당에 붙을 생각을 처음 했을 때 국내성 귀척들이 전부 그에게 따라붙은 것이 아니란 얘기다. 처음 국내성 귀척들은 연남생을 돕기는 했지만 당조에 가서 붙는 것이 아니라, 서차를 어기고 연남생을 밀어낸 연남건과 연남산을 토벌하기 위해 거병에 동참했을 뿐이다.
[公以共氣星分旣, 飮淚而飛檄, 同盟雨集, 遂銜膽而提戈. 將屠平壤, 用擒元惡. 始達烏骨之郊, 且破瑟堅之壘, 明其爲賊, 鼓行而進. 仍遣大兄弗德等, 奉表入朝陳其事, 迹屬有離叛, 德遂稽留. 公乃反旆遼東, 移軍海北, 馳心丹鳳之闕, 飭躬玄菟之城, 更遣大兄冉有, 重申誠効.]
공은 형제간의 관계[星分]가 소원해지자 눈물을 머금고 격문(檄文)을 사방으로 보내니 동맹이 많이 모여들었다[雨集]. 마침내 단단한 각오로 창을 들었다. 장차 평양을 함락시켜 악의 근원을 사로잡으려 했다. 먼저 오골(烏骨)의 교외에 이르러 곧 슬견(瑟堅)의 누(壘)를 깨뜨리고자, 그 도둑질을 밝히며 북을 울리면서 나아갔다. 이에 대형(大兄) 불덕(弗德) 등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입조하여 그 일들을 알리려 했는데, 마침 이반(離反)이 있어 불덕은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공은 이로 인하여 요동으로 깃발을 돌려 군사를 해북(海北?)으로 옮기고, 그 마음을 천자의 궁궐로 달려 현도성에서 수신(修身)하면서, 다시 대형 염유(冉有)를 보내 정성스러운 효명(效命)을 거듭 알렸다.
『천남생묘지명』
남생은 고려 안에 격문을 뿌리고서 국내성과 오골성을 거점으로 평양과 싸웠지만, 남건 형제와의 싸움에서 점차 불리하게 몰리게 되자 마침내 당에까지 손을 뻗치기에 이르렀다. 역사가 참 이렇게 얄궃게 반복되는 수도 있구나 싶다. 고국천왕 사후에도 발기와 연우 두 왕제가 왕위를 놓고 서로 다투었던 역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또다시 이런 곳에서 재현될 줄이야.(게다가 지금은 당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전시 상황 아니던가.) 여기서 연남생과 함께 부각되는 인물이 바로 연남생의 적자 헌성. 계보상 연개소문의 손자에 해당하며, 묘지명에 기록된 바 연남생에게 당에 원병을 청할 것을 진언한 자이기도 하다. 그는 아홉 살에 이미 선인이 되어 있었는데, 연남생이 전국을 시찰할 때 함께 동행한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時禍起倉卒, 議者猶豫, 或勸以出鬪, 謀無的從. 公屈指料敵, 必將不可, 乃勸襄公, 投國內故都城, 安輯酋庶. 謂襄公曰 "今發使朝, 漢具陳誠, 款國家聞大人之來, 必欣然啓納. 因請兵馬合, 而討之, 此萬全決勝計也." 襄公然之, 謂諸夷長曰 "獻誠之言, 甚可擇." 卽日, 遣首領冉有等, 入朝. 唐高宗手勅慰喩, 便以襄公爲東道主人, 兼授大摠管.]
재난이 갑자기 일어나자 의논하는 자들은 머뭇거리거나 혹은 나아가 싸울 것을 권하였지만 계책 중에 바로 따를 만한 것이 없었다. 공은 손가락을 꼽아 적을 헤아리고서 결국 불가능하다고 여겨 양공에게 국내의 옛 도성에 머물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권하였다.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에 입조하게 하되 정성과 성심을 다하면 중국에서는 대인(大人)이 왔음을 듣고 반드시 흔연히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서 병력을 청하고 연합하여 토벌을 하게 되면 이것은 안전하고 반드시 승리를 하게 되는 계책입니다.”
양공은 그렇다고 여겨 여러 추장들에게 말하였다.
“헌성의 말은 심히 택할 만하다.”
그날로 수령(首領) 염유(冉有) 등을 파견하여 당에 입조하게 하였다. 고종은 친히 조칙을 내려 위무하고 또한 양공을 동도주인(東道主人) 겸 대총관(大摠管)으로 하였다.
『천헌성묘지명』
이반이 있었다느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머뭇거리거나 싸우는 쪽으로 의견이 분분했다느니 하는 것은 당시 국내성의 귀척들 중에도 연남생이 당에 붙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음을 뜻한다. 아니면 당시의 대세에 따라 연남건과 연남산의 뜻에 따라 연남생을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첫 번째로 당에 원병을 청하러 입조하라 보낸 대형 불덕이 당에 못 가고 남았겠나. 하지만 헌성의 제의에 따라 다시 대형 벼슬의 수령 염유를 아들 헌성과 함께 당에 보냈고, 당 고종은 그에게 원병 파견(그리고 고려 멸망)을 약속한 것이지.
연씨 형제의 대립은 고려의 귀척들을 양분시켜 고려의 힘을 반감해버렸다. 저들끼리야 치고 받고 싸우든 말든 상관없는데, 문제는 이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남생은 평양에서 쫓겨나자마자 곧바로 평양성과 경쟁하던 가장 강력한 거점이었던 국내성으로 도망쳤고, 하필 엉뚱하게도 남생에게 국내성파가, 남건과 남산에게 평양성파가 모이면서 잠잠하다 싶었던 국내성파와 평양성파의 대립이 다시 표면에 떠오르고 말았던 것이다. 즉 한 집안의 형제 싸움으로 끝났을 조그마한 눈뭉치가, 고려 양대 세력의 대립이라는 커다란 눈덩이로 변해버렸다 이 말이다.
[六月, 高宗命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帥兵應接之, 男生脫身奔唐.]
6월에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에 응하여 맞이하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으로 달아났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5년(666)
양《당서》에 기록된 바 이것은 당 고종 건봉 원년(666) 6월 임인. 하다하다 못한 남생이 해서는 안 될 선택으로 당에 손을 뻗으려고 할 때에, 그의 주변에도 당에 손을 뻗는 것만은 안 된다며 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때 연남생은 이미 권력을 되찾는 데에 몰두해 다른 것은 뒷전이었다. 아들 연헌성과 대형 염유가 당조에 내부(內附)를 청했을 때, 당 고종은 연헌성에게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이라는 벼슬과 함께 수레와 말, 좋은 비단과 보석이 박힌 칼을 하사한 뒤,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을 요동안무대사(遼東安撫大使)로서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가서 연남생을 구해주라고 명했다. 형제싸움은 이제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秋八月, 王以男建爲莫離支兼知內外兵馬事.]
가을 8월에 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5년(666)
그렇게 형을 내쫓고, 연남건은 형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느 쪽에게도 명분은 없었다. 남생은 일단 연개소문의 장남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외세인 당에 손을 뻗은 사실로 해서 실추되고 말았고, 그 반작용으로 남건과 남산이 남생보다는 좀더 유리한 입장에 서긴 했지만, 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아우들에게 형만큼의 정통성이 있을 리가 없다. 정치인으로서 한 나라의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만큼 저열한 짓은 없다. 잘 걷던 사람도 아차하는 순간에 발목 삐기 쉽고 잘 나가던 나라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 막리지로서 군사와 국정을 모두 쥐고 중요한 군사기밀이며 취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가 당에 가서 붙어버린 고려로서는 약점을 노출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되어버렸다.
[九月, 帝詔男生, 授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 封玄菟郡公.]
9월에 황제가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도독(遼東都督) 겸 평양도안무대사(平壤道安撫大使)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5년(666)
《삼국사》에 이들의 열전이 실려있는데, 처음 당에 이르렀을 때에 "斧鑕에 엎드려 죄를 기다렸는데 세상에서 이를 칭송하였다[其初至, 伏斧鑕待罪. 世以此稱焉]."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 코웃음을 쳤다. 하도 같잖고 한심스러워서.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알았던 모양이지? 나라가 어려운 판국에, 그것도 조정의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아버지가 그토록 유언한 말도 지키지 못하고 서로 형제싸움 벌인 것도 우스워 죽을 지경인데, 그래 하필이면 왜 외세에 도움을 청했단 말이냐. 그것도 하필이면 적국인 당에.
[冬十月甲午朔己未, 高麗遣臣乙相奄鄒等進調.<大使臣乙相奄鄒, 副使達相遁, 二位玄武若光等.>]
겨울 10월 갑오 초하루 기미(26일)에 고려가 신하 을상(乙相) 엄추(奄鄒) 등을 보내어 조를 올렸다.<대사신(大使臣)은 을상 엄추, 부사(副使) 달상(達相) 둔(遁), 2위 현무약광(玄武若光) 등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7, 천지기(天智紀, 덴치키) 5년(666)
현무약광이 바로 일본에서 부르는 약광(쟈코오)으로 고려왕(高麗王, 고마노고니키시) 성씨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며, 오늘날 고려(高麗, 고마) 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족보에 보면 고려의 왕족이었다고 전하는데, 정작 《일본서기》에는 고씨가 아닌 현무약광으로 적혀있다. 현무와 고씨가 무슨 상관이라는 건지(다만 그가 그들 일족의 선조라는 점은 분명하다)
[冬十二月, 高宗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 以司列少常伯安陸 · 郝處俊副之, 龐同善·契苾何力, 並爲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 其水陸諸軍摠管, 幷轉糧使竇義積·獨孤卿雲·郭待封等, 並受勣處分. 河北諸州租賦, 悉詣遼東給軍用.]
겨울 12월에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사열(司列)ㆍ소상백(少常伯)인 안륙(安陸)ㆍ학처준(郝處俊)을 그 부장으로 삼았으며, 방동선(龐同善)과 계필하력을 함께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수륙제군총관(水陸諸軍摠管) 병 전량사(轉糧使) 두의적(竇義積) · 독고경운(獨孤卿雲) · 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하북 여러 주의 조부(租賦)를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용으로 공급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5년(666)
적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우리는 이렇게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지만, 당으로서야 쾌재를 부르며 환영할 일이 아니던가. 그토록 염원하던 소원을 이루고, 수 이래 불구대천의 원수, 고려를 멸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지.
[高句麗貴臣淵淨土, 以城十二戶七百六十三口三千五百四十三來投. 淨土及從官二十四人, 給衣物·糧料·家舍, 安置王都及州府, 其八城完, 並遣士卒鎭守.]
고려의 귀신(貴臣) 연정토(淵淨土)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연정토와 그의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 · 집을 주고 서울 및 주(州) · 부(府)에 안주시키고, 그 여덟 성은 온전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6년(666) 겨울 12월
형만한 아우 없단 말을 제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냅다 신라로 도망가버린다. 연정토라는 그 자는, 명색이 고려의 대신이나 되는 자가 어떻게든 나라를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자 대번에 신라로 도망가버렸으니, 고려 조정 내부의 분열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당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죽는다.
[七年, 秋七月, 大酺三日. 唐皇帝勅以智鏡 · 愷元爲將軍, 赴遼東之役. 王卽以智鏡爲波珍湌, 愷元爲大阿湌. 又皇帝勅以日原大阿湌爲雲麾將軍, 王命於宮庭受命. 遣大奈麻汁恒世, 入唐朝貢. 高宗命劉仁願 · 金仁泰從卑列道, 又徵我兵, 從多谷·海谷二道, 以會平壤. 秋八月, 王領大角干金庾信等三十將軍, 出京. 九月, 至漢城停, 以待英公.]
7년(667) 가을 7월에 사흘 동안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당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고 요동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 황제가 일원(日原) 대아찬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는데, 왕명으로 왕궁의 뜰에서 칙을 받도록 하였다. 대나마 즙항세(汁恒世)를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를 따라, 또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대각간 김유신 등 서른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9월에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영공(英公)을 기다렸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7년(667)
이 해... 667년 3월 3일에 보덕이 머무를 경복사가 모두 완공되었다는데, 보덕도 이러한 상황을 모두 듣고 있었을까. 자신의 조국이 이제 멸망할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을.
[二十六年, 秋九月, 李勣拔新城, 使契苾何力守之. 勣初渡遼, 謂諸將曰 "新城高句麗西邊要害, 不先得之, 餘城未易取也." 遂攻之, 城人師夫仇等, 縛城主開門降. 勣引兵進擊, 一十六城皆下. 龐同善·高侃, 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擊破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我軍乘勝逐北, 薛仁貴引兵橫擊之, 殺我軍五萬餘人, 拔南蘇 · 木氐 · 蒼嵒三城, 與泉男生軍合.]
26년(667) 가을 9월에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계필하력을 시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처음 요하를 건널 때 (이)적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신성은 고려 서쪽 변방의 요해지이니, 먼저 그곳을 빼앗지 않고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마침내 공격하니 성 사람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던 것이다. 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고간이 나와 금산(金山)에 이르러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패하자, 우리 군사는 승세를 몰아 적을 추격하여 패주시켰으나,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에서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 · 목저 · 창암의 세 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의 군사와 합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6년(667)
고려 서북쪽의 대진(大鎭)이라 불리던 신성은 참 더럽게 망했다. 성안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주를 잡아 가두고 항복해버렸다고.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전쟁이 아무리 귀찮았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그럴수가 있었던 걸까. 신성을 적에게 내준 사부구라는 그 이름은 당으로서는 반가운 이름이었겠지만, 우리로서는 을사오적의 이름처럼 듣기만 해도 기분 더럽고 짜증스러운 기억으로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만 남기게 되었다.
[授平壤道行軍大摠管 兼 持節安撫大使. 擧哥勿 · 南蘇 · 倉巖等城以降. 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 就軍慰勞, 賜袍帶金釦七事.]
그에게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 겸 지절안무대사(持節安撫大使)의 벼슬을 주었다. 가물성(哥勿城), 남소성(南蘇城), 창암성(倉巖城) 등의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 서대사인(西臺舍人) 이건역(李虔繹)에게 명하여 그 군대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도포, 띠, 금그릇 및 일곱 가지 물건을 내려 주었다.
《삼국사》 권제49, 열전9, 개소문, 부(附) 남생ㆍ남건ㆍ남산
남소성이라면 원래 연남생의 소속이었던 성인데, 성이 함락된 바로 직후에 연남생의 군사와 합쳤다는 것은 저 세 성은 고려 본국에 남아있다가 연남생이 오기를 기다려서 내통했다는 그런 말이 되나? 아무튼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郭待封以水軍, 自別道趣平壤. 勣遣別將馮師本, 載糧仗以資之, 師本舡破失期, 待封軍中飢窘. 欲作書與勣, 恐爲他所得, 知其虛實, 乃作離合詩以與勣. 勣怒曰 "軍事方急, 何以詩爲? 必斬之." 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 爲釋其義, 勣乃更遣糧仗赴之. 萬頃作檄文曰 "不知守鴨淥之險." 泉男建報曰 "謹聞命矣." 卽移兵據鴨淥津, 唐兵不得度. 高宗聞之, 流萬頃於嶺南.]
곽대봉이 수군을 데리고 다른 길로부터 평양으로 달려왔다. 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장기를 싣고 가 공급하게 하였는데, 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대봉의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핍하였다. 글을 지어서 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적이 빼앗아 보고 그 허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적에게 주었다. 적이 노하였다.
“군의 사정이 급한데 무슨 시냐? 꼭 목을 베겠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어주니 적이 그제야 다시 군량과 병장기를 보내 주었다. 만경이 격문을 지어 말했다.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르는구나.”
연남건이 회보하였다.
“삼가 명을 받들겠소이다.”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의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듣고 만경을 영남(嶺南)으로 귀양보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6년(667) 9월
이합시라는 건 일종의 암호문 같은 것인데, 당군은 암호문을 만들어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기서 첩자가 있었나? 이합시가 아니라 격문이라고 했는데, 격문은 다들 보라고 내놓는 것 아닌가? 여하튼 그런 격문 한 번 보고 '오냐 알았다'라면서 압록강에 떡 진을 쳐버린 남건. 이 녀석은 그래도 자기 형보다는 좀 나았던가?
[郝處俊在安市城下, 未及成列, 我軍三萬掩至, 軍中大駭. 處俊據胡床, 方食乾糒, 簡精銳擊敗之.]
학처준이 아촌골[安市城] 밑에 있으면서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사 3만이 갑자기 닥치니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처준이 호상(胡床) 위에 걸터 앉아서 막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뽑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6년(667) 9월
안시성(아촌골)은 그렇게 쉽게 함락될 성이 아니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왜 고려군은 밥 막 먹으려고 하는 찰나에 그렇게 쳐들어와서 밥도 못 먹게 하는 건가요 하고 투덜댈 계재가 뭐 있었겠나? 그냥 오니까 맞받아치는 거지. 이런 거 익숙하잖아. 신성을 함락시킨 이적도 마침내 10월 2일에는 펴라성 북쪽 2백리 지점까지 육박해왔다.
[冬十月二日, 英公到平壤城北二百里. 差遣尒同兮村主大奈麻江深, 率契丹騎兵八十餘人, 歷阿珍含城, 至漢城, 移書以督兵期, 大王從之. 十一月十一日, 至獐塞, 聞英公歸, 王兵亦還. 仍授江深位級湌, 賜粟五百石. 十二月, 中侍文訓卒. 唐留鎭將軍劉仁願, 傳宣天子勅命, 助征高句麗, 仍賜王大將軍旌節.]
겨울 10월 2일에 영공이 펴라성[平壤城] 북쪽 200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 대나마 강심(江深)을 뽑아 보냈는데,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에 이르러 서신을 전하고 군사 동원 기일을 독려하니 대왕이 그에 따랐다.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러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 또한 돌아왔다. 이에 강심에게 급찬의 관등을 주고 벼 500섬을 내려주었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7년(667)
신성을 함락시킨 이적은 겨울 10월 2일에 펴라성 북쪽 2백리까지 육박해 신라에 군사 동원을 독려했지만,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11일에 갑자기 돌아가버렸다고 《신라본기》는 전한다. 신라군이 이미 장새(지금의 황해도 수안)까지 진군해 있었던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더니 12월에 또다시, 백제의 웅진도독부에 주둔하고 있던 유진장군(留鎭將軍) 유인원을 시켜 대장군의 정절(旌節)과 함께 고려 공격을 도우라는 요구를 해왔다.
[八年, 春, 阿麻來服. 遣元器與淨土入唐, 淨土留不歸, 元器還.]
8년(668) 봄에 아마(阿麻)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元器)와 (연)정토(淨土)를 당에 보냈다. 정토(淨土)는 그 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원기만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연정토가 왜 당에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눌러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후에 그가 얼마나 더 살다가 죽었는지조차도, 기록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있다. 멸망한 나라의 망명객으로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대신이었던 자로서 그의 처신은 누가 봐도 용납될 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다.
[二十七年, 春正月, 以右相劉仁軌爲遼東道副大摠管, 郝處俊·金仁問副之. 二月, 李勣等拔我扶餘城. 薛仁貴旣破我軍於金山, 乘勝, 將三千人, 將攻扶餘城, 諸將以其兵少止之. 仁貴曰 "兵不必多, 顧用之何如耳." 遂爲前鋒以進, 與我軍戰勝之, 殺獲我軍. 遂拔扶餘城, 扶餘州中四十餘城皆請服.]
27년(668) 봄 정월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 · 김인문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2월에 이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설인귀가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서 3천 명을 거느리고 장차 부여성을 공격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은 것을 이유로 말렸다. 인귀가
“군사는 꼭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고 하고, 마침내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우리 군사와 싸워 이겨서 우리 군사들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주(扶餘州)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일찌기 모두루가 '고려 천하에 가장 성스러운 땅'이라 자부심을 드러냈던 그 부여성이다. 고려 요동 방어망의 배후 기지와도 같은 이 부여성이 함락당함으로서, 당군은 고려 안으로 파고들때 후방이 공격받을 위험성을 차단할 수 있었다. 부여성이 함락되면서, 휘하에 속해 있던 40여 개에 달하는 성들이, 줄줄이 굴비 두름처럼 당에 항복해버린다.
[侍御史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 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釁也. 諺曰, '軍無媒, 中道回.' 今男生兄弟鬩狠, 爲我鄕導, 虜之情僞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今九百年, 勣年八十矣. 虜仍荐饑, 人相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蚡穴於門, 人心危駭, 是行不再擧矣."]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신으로 왔다가 요동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물었다.
“군중은 어떠한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태종)께서 죄를 물을 때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적(고려)에게 미처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 길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다투어 우리의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적의 진실과 허위를 우리가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스러우며 군사는 힘을 다하고 있는 까닭에 신이 반드시 이길거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고려비기(高麗秘記)》에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여든 살 먹은 대장에게 망하리라' 하였는데, 고씨가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 여든입니다. 적들은 거듭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빼앗아 팔고,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가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인심이 위태로워 놀라니, 이번 걸음으로 다시는 거사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언급한 《고려비기》에는, 고려가 9백년이 되기 전에 80먹은 대장에게 망한다고 했다던가, 근거없는 헛소리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어째서 고려의 역년을 가리켜 '9백년'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즉 고구려는 추모왕이 개국한 BC.37년부터 보장왕 때인 AD.668년에 멸망하기까지 꼭 705년을 존속했는데, 고려의 역년을 가리켜 2백년이나 더 끌어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려가 처음 건국되던 그 해,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라를 열던 그 때에 이미 고구려의 수도 홀승골성 홀본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천제자(天帝子)' 천왕랑 해모수가 와서 북부여를 선포하고 나라를 세웠던 적도 있으며, 그 전에 이미 동쪽 가섭원으로 옮겨가기 전의 부여가 있었으니,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우기 전부터 부여족들이 대를 이어가며 왕 노릇 했고 더구나 추모왕은 졸본부여국왕의 둘째 딸 소서노를 왕비로 맞이했던 졸본부여왕의 사위로서 그녀의 도움으로 그 왕의 뒤를 이어 그 땅에서 태왕으로 즉위했다는 《삼국사》 백제본기의 기록을 참조한다면, '9백년'에서 '2백년'은 추모왕이 즉위하기 전 졸본부여의 역대를 말한 것일수도 있다. 스스로 그 출자가 북부여라고 기록하고서 부여의 건국조라는 '동명(東明)'의 전설을 따라 동명성왕이라는 시호를 얻었으니, 고구려라는 나라가 서기 이전의 '북부여'라 불리는 나라를 자신들의 조상이자 자신들이 계승할 나라로 여기고 그 북부여, 혹은 추모왕이 직접 왕위를 이어받은 나라 졸본부여의 존속기간까지 합쳐서 '9백년'이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9백년이라는 세월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버텨온 나라가 멸망하는데는, 기껏 3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泉男建復遣兵五萬人, 救扶餘城, 與李勣等遇於薛賀水合戰, 敗死者三萬餘人. 勣進攻大行城.]
연남건이 다시 5만 군사를 보내어 부여성을 구하려고,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서 붙어 싸우다가 패하여, 3만여 명이나 죽었다. 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668년 3월, 신라에서는 고려 남쪽 비열홀ㅡ지금의 함경도 안변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파견했다. 그곳은 일찌기 신라가 고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한 북방 기지. 이곳을 거점으로 신라는 당군을 도와 고려를 공격할 계획이었다.(훗날 이 비열홀주는 발해와 신라가 대치하는 경계가 된다.)
[夏四月, 彗星見於畢昴之間. 唐許敬宗曰 "彗見東北, 高句麗將滅之兆也." ]
여름 4월에 살별[彗星]이 필성(畢星)과 묘성(卯星) 사이에 나타났다. 당의 허경종(許敬宗)이 말하였다.
“살별이 동북방에서 나타나는 것은 고려가 망할 징조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마침 신라에서도 살별이 천선이라는 곳을 지키고 있었다나. 4월에.
[六月十二日, 遼東道安撫副大使, 遼東行軍副大摠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摠管右, 相檢校太子左中護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 奉皇帝勅旨, 與宿衛沙湌金三光, 到党項津. 王使角干金仁問, 延迎之以大禮. 於是, 右相約束訖, 向泉岡.]
6월 12일에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식(禮式)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에 우상(右相)은 (군사 동원기일) 약속을 마치고 천강(泉岡)으로 향하였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고려 공격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신라에 도착한 당의 장수 유인궤와 신라의 각간 김인문 두 사람은 군사 동원 날짜를 확인한 뒤 곧바로 작전에 돌입한다.
[二十一日, 以大角干金庾信爲大幢大摠管, 角干金仁問ㆍ欽純ㆍ天存ㆍ文忠, 迊湌眞福, 波珍湌智鏡, 大阿湌良圖ㆍ愷元ㆍ欽突爲大幢摠管. 伊湌陳純<一作春>, 竹旨爲京停摠管. 伊湌品日ㆍ迊湌文訓ㆍ大阿湌天品爲貴幢摠管. 伊湌仁泰爲卑列道摠管. 迊湌軍官 · 大阿湌都儒 · 阿湌龍長爲漢城州行軍摠管. 迊湌崇信 · 大阿湌文穎 · 阿湌福世爲卑列城州行軍摠管. 波珍湌宣光 · 阿湌長順 · 純長爲河西州行軍摠管. 波珍湌宜福 · 阿湌天光爲誓幢摠管. 阿湌日原·興元爲罽衿幢摠管.]
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 · 흠순 · 천존 · 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 개원 · 흠돌을 대당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춘(春)이라고도 썼다>과 죽지를 경정(京停)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행군총관으로 삼았다.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행군총관으로 삼았다.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 · 순장(純長)을 하서주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총관으로 삼았다.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총관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6월
신라로서는 그야말로 온 나라를 모두 기울인 군사였다. 칠순이 가까운 고령의 노장 김유신이 총지휘관이 되고, 그 휘하로 왕자와 고위 대신들이 각기 군사를 나누어 지휘했다. 모두 신라의 상류 귀족, 진골들이었다. 신라의 북쪽 진이었던 한성주의 모든 군사들이 고려를 치는데 동원되었고, 고려의 남쪽 경계는 이들에게 조금씩 침식되어갔다.
[二十二日, 府城劉仁願遣貴干未肹, 告高句麗大谷△, 漢城等二郡十二城歸服. 王遣一吉湌眞功稱賀. 仁問ㆍ天存ㆍ都儒等, 領一善州等七郡及漢城州兵馬, 赴唐軍營.]
22일에 웅진부성의 유인원이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 고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다. 인문 · 천존 · 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 및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6월
6월 22일에 고려의 남펴라였던 한성을 비롯해 2군 12성이 항복한다. 신라가 아니라 당에게. 훗날 고려 부흥운동을 지휘한 검모잠이 새로운 고려의 수도이자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곳이 바로 한성인데, 유인원이 보낸 사신 미힐이 '귀간'이라는 벼슬을 갖고 있는 것이 걸린다. 귀간이라면 신라의 관직이름이잖아. 당군 진영에 신라측 사람이 포함되어있었던 걸까.
[二十七日, 王發京, 赴唐兵. 二十九日, 諸道摠管發行. 王以庾信病風, 留京. 仁問等遇英公, 進軍於嬰留山下<嬰留山在今西京北二十里>.]
27일에 왕이 서울을 출발하여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 29일에 여러 도(道)의 총관들이 출발하였다. 왕은 유신이 풍질(風疾)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아있게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 영류산(嬰留山)<영류산은 지금(고려)의 서경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6월
서경 북쪽 20리라... 거의 육박했구나. 영류산이라면 연개소문이 죽인 영류왕을 거기 묻어서 영류산인가?
[秋七月十六日, 王行次漢城州, 敎諸摠管, 往會大軍. 文穎等遇高句麗兵於蛇川之原, 對戰大敗之.]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에 이르러 여러 총관들에게 명하여, 가서 당군과 만나 합치라고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려 군사를 만나 싸워 크게 무찔렀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7월
나중에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문무왕보서》즉 답설인귀서에 보면 가을 7월에 신라의 군사와 일전을 치르려 고려의 연남건은 모든 군사들을 동원해 신라군에 맞섰지만, 그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아버지가 당군 10만을 전멸시킨 사천ㅡ사수의 강에서 신라군 20만에게 쫓겨 평양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일본서기》에 보면 이 달에 고려에서는 고시(越)의 길을 따라 사신을 보냈지만, 이들 사신은 "풍랑이 높아서 돌아가지 못했다[風浪高故不得歸]"고 했을 뿐 아니라 고려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旣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會, 進至鴨淥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相繼. 契苾何力先引兵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가을 9월에 이적이 펴라[平壤]를 함락시켰다. 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鴨淥柵)에 이르렀다. 아군이 맞서 싸웠으나 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 리를 쫓아와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계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펴라[平壤]의 성 밑에 이르니, 적의 군대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펴라[平壤]를 포위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여러 성이 함락되고 또 겹겹이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펴라(평양)는 1년을 버텼다. 그 1년은, 마치 초가 다 녹아 사라지기 전의 가장 환하게 타오르는 마지막 순간과도 같은, 8백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모아두었던 고려의 마지막 저력이고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가쁜 숨이었을 것이다.
[王臧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詣勣降, 勣以禮接之.]
왕 장(臧)은 연남산을 보내 98수령(首領)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가을 9월
《삼국사》신라본기에 따르면 보장왕이 항복한 것은 신라를 통해서였고 날짜는 9월 21일이었다. 김인문열전에 보면, 펴라 공격 한 달만에 보장왕을 붙들었을 때, 김인문이 직접 그를 영공 이적 앞으로 끌고 가서 꿇어앉히고 죄를 세었다[問使王跪於英公前, 數其罪]고 적고 있다. 보장왕이 적장 이적 앞에 두 번 절함으로서 공식적으로 고려 왕실은 무너졌다. 《삼국사》고구려본기야 중국 기록을 많이 참조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측 인물들의 역할만 부각된 감이 없지 않다. 중국 기록이 애써 감추려고 했던(왜 그랬는지는 모르나) 신라의 역할들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英公以王寶臧, 王子福男 · 德男, 大臣等二十餘萬口廻唐. 角干金仁問, 大阿湌助州, 隨英公歸, 仁泰 · 義福 · 藪世 · 天光 · 興元隨行.]
영공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 · 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갔는데, 인태 · 의복 · 수세 · 천광 · 흥원 등도 수행하였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9월 21일
왕이 항복한다고 끝날 나라였으면 8백년이라는 시간을 굳건하게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연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가을 9월
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한 무제의 군사에게 포위당했을 때, 우거왕의 왕자가 니계상 삼과 함께 한에 투항하고, 우거왕마저 삼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는데도 왕검성이 함락되지 않은 것은, 성안에서 조선의 대신이었던 성기(成己)가 끝까지 싸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마저도 살해당하자 결국 왕검성은 무너지고, 조선은 패망해버렸다.
[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 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 密遣人詣勣, 請爲內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縱兵登城, 鼓噪焚城. 男建自刺不死. 執王及男建等.]
남건은 군사의 일을 중[浮圖]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닷새가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왕과 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가을 9월
일찌기 조선의 왕검성에서 그러했듯, 평양의 성문을 부순 것은 적국 신라나 당이 아니라, 황당하게도 그 성 안에 있던 고려인이었다. 막리지 남건으로부터 군사에 관한 일을 일임받은 신성이라는 자가 당군과 짜고서, 밤중에 몰래 평양의 성문을 열어놓았고, 그로 인해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으로 입성하는 것을 도와, 성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가쁜 숨을 쉬며 버티던 고려의 마지막 숨통은 끊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신라군은 평양 북문으로 진입해 고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신성이라는 자는 부도(浮圖), 즉 불교 승려였는데, 보덕은 불교 안 받들어모신다고 백제로 떠나버리고, 신성은 아예 성문까지 열어서 나당 연합군을 받아들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보면 참 알수 없는 것이 세상사가 아닐까. 고려도 백제도 신라도 모두 불교를 받아들여 승려들이 군사로 나아가 싸우고 불교를 통해서 중앙집권을 이루었는데, 그렇게 소수림왕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인되어 고려의 중흥을 이끌었던 불교가, 지금은 고려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될줄. 소수림왕이나 보덕, 심지어 그 스스로 불교를 억누르고 도교를 일으켜 귀척 세력을 억누르려던 연개소문조차도, 전혀 몰랐으리라. 성안의 대궐과 민가가 무려 넉 달을 탔다고 하니 약탈도 이런 약탈이 없었다.
아참, 참고로 당군이 펴라성을 뚫을 때에 선봉으로 세운 것은, 신라 기병 5백이었다.
[冬十月, 李勣將還, 高宗命, 先以王等獻于昭陵, 具軍容奏凱歌, 入京師, 獻于大廟.]
겨울 10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할 때, 고종이 명령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고, (다시)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大廟)에 바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보장왕 27년(668)
그,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라는 책 지은 분이 직접 소릉을 찾아가려고 세 번 시도했다가 두 번은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소릉은 당 태종의 무덤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섬서성(陝西省) 예천현(禮泉縣) 동북쪽 22.5km 지점, 장안에서 80km나 떨어진 구종산이라는 곳에 있다 한다. 당 역대 황제 18명의 무덤이 묻힌 '18릉' 가운데 하나인데, 중국에서는 당 태종을 '백대영주(百代英主)', 소릉을 '천고일릉(千古一陵)'이라고 극찬하고 있다던가.
첫 번째 방문 때는 택시 기사가 도중에 여기저기 전화하더니 길이 끊겼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고(기사의 태도가 왠지 석연치 않았단다),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는 하필 가랑비가 내렸는데, 험준한 산을 한참 올라 소릉 부근까지 왔을 때는 안개비가 자욱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기사가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다시 또 되돌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본인은 당 태종이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감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때도 기사가 길이 끊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본인께서 이미 여기 두 번이나 와보신 경험이 있던 터라, 여러 핑계를 대며 안 가려는 택시 기사를 자신이 아는 길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면 된다고 달래고 달래서 또 무려 1188m나 되는 구종산을 올라가야 했다고, 주봉(主峰) 남측 산허리로 아득하게 보이는 현궁(玄宮)까지 가셨더란다. 이 높고 험준한 곳까지, 보장왕과 고려 유민들은 당군에게 결박당한채 개처럼 질질 끌려 올라와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칭송받는 당 태종을 패퇴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한쪽 눈에 화살까지 맞혀 애꾸 궁예를 만들어버린 죄를 사죄(?)하고, 당 백성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장안까지 가야 했다 이거지.
지금이야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수 있지만 참... 나라 망한 것도 서러운데 그 험한 곳까지 걸어올라가서 이미 죽은 황제 앞에 머리 숙여야 하는 그 참담함과 울분, 치욕은 대체 뭐라고 해야 보상이 될까.
[冬十月二十二日, 賜庾信位太大角干, 仁問大角干. 已外伊湌將軍等並爲角干, 蘇判已下並增位一級. 大幢少監本得, 蛇川戰, 功第一, 漢山州少監朴京漢, 平壤城內, 殺軍主述脫, 功第一, 黑嶽令宣極, 平壤城大門戰, 功第一, 並授位一吉湌, 賜租一千石. 誓幢幢主金遁山, 平壤軍營戰, 功第一, 授位沙湌, 賜租七百石. 軍師南漢山北渠, 平壤城北門戰, 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一千石, 軍師斧壤·仇杞, 平壤南橋戰, 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七百石. 假軍師比列忽世活, 平壤少城戰, 功第一, 授位高干, 賜粟五百石. 漢山州少監金相京, 蛇川戰死, 功第一, 贈位一吉湌, 賜租一千石. 牙述沙湌求律, 蛇川之戰, 就橋下涉水, 出與賊鬪大勝, 以無軍令, 自入危道, 功雖第一而不錄. 憤恨欲經死, 旁人救之, 不得死.]
겨울 10월 22일에 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인문에게 대각간의 관등을 주었다. 그 이외 이찬과 장군들을 모두 각간으로 삼았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펴라골 [平壤城]안에서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여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은 펴라골[平壤城] 대문에서의 싸움에서 공이 제일 많았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관등을 주고 조(租)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서당당주(誓幢幢主) 김둔산(金遁山)은 펴라[平壤] 군영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관등과 조 700섬을 내려 주었다. 군사(軍師) 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펴라골[平壤城] 북문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 관등과 벼 1천 섬을 내려 주었고, 군사 부양(斧壤), 구기(仇杞)는 펴라[平壤] 남교(南橋)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므로 술간의 관등과 벼 700섬을 내려 주었다. 가군사(假軍師) 비열홀의 세활(世活)은 펴라[平壤] 소성(小城)의 싸움에서 공이 제일 많았으므로 고간(高干)의 관등과 벼 500섬을 내려 주었다. 한산주소감 김상경(金相京)은 사천 싸움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租)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사천 싸움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격하여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軍令)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분하게 생각하고 목매어 죽으려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구해서 죽지 못했다.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한편 신라는 저들끼리 논공행상 중이었다. 너는 여기서 이거 했으니까 이 벼슬, 넌 저기서 저거 했으니까 저 벼슬. 무슨 늦은 밤 작업실에 모여 소세지 나눠먹기도 아니고 뭐하는 거래냐 저게. 그런데 보면 참, 여기저기 각지에서 활약한 흔적이 보인다. 사천 싸움에서 남건의 군사를 맞아 공을 세운 사람이 보자.... 세 명, 평양 돌격전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 여섯 명이구나. 여기저기서 활약해놓긴 활약했는데, 사실 그것만으로는 신라에게도 성이 차지 못했다. 고려 공격의 주력군이 당군이었다는 것도 있겠고, 무엇보다도 당에게는 처음부터 신라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것에 있다.
[於此新羅兵士並云 "自征伐已經九年 人力殫盡, 終始平兩國. 累代長望, 今日乃成. 必當國蒙盡忠之恩, 人受效力之賞." 英公漏云 "新羅前失軍期, 亦須計定." 新羅兵士, 得聞此語, 更增怕懼. 又立功軍將, 並錄入朝, 已到京下, 卽云 "今新羅並無功" 夫軍將歸來, 百姓更加怕懼.]
신라 병사들은 말하기를
“정벌하려 한 지 9년이 넘었는데, 사람의 힘을 다하여 마침내 양국을 평정하였다. 여러 대(代)에 바라던 것을 오늘에야 이루었다. 반드시 진충(盡忠)의 은혜를 입을 것이요, 사람들은 힘쓴 대가를 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영공은 누설하기를
“신라는 앞날에 군사의 기일을 어겼으니, 역시 칠 계획을 세워야겠다.”
하였으므로 신라 병사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공포심이 더했습니다. 또 공을 세운 군장(軍將)들을 모두 기록해서 조회하러 들어갔는데 경하(京下)에 도착하니 곧 말하기를,
“지금 신라는 공이 없다.”
하고는 군장들을 돌려보내니 백성들은 다시 두려워하였습니다.
문무왕보서(文武王報書) 中
《삼국사》권제7, 신라본기7, 문무왕 11년(671) 가을
와, 끈질기네. 이 개새끼들. 황산벌 싸움에서 한 번 늦은 걸 갖고 이렇게나 울궈먹나 그래. 아주 죽을 때까지 벗겨먹어라 이 썅것들아.(사실 신라가 자초한 일이라서 이렇게까지 나올 것도 없지만서도)
[十一月五日, 王以所虜高句麗人七千入京. 六日, 率文武臣寮, 朝謁先祖廟, 告曰 “祗承先志, 與大唐同擧義兵, 問罪於百濟 · 高句麗, 元凶伏罪, 國步泰靜. 敢玆控告, 神之聽之.”]
11월 5일에 왕이 고려의 포로 7천 명을 이끌고 서울에 돌어왔다. 6일에 문무 관료를 이끌고 선조묘(先祖廟)에 배알하고 아뢰었다.
“삼가 조상들의 뜻을 이어, 대당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백제와 고려에게 죄를 묻고 원흉들이 복죄하여 국운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옵나니 신께서는 이를 들어주소서.”
《삼국사》 권제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문무왕 8년(668)
7천 명? 장난하냐?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4>제28대(마지막) 보장왕(10)|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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