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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7>제28대(마지막) 보장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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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 春正月, 李世勣軍至幽州.]

4년(645) 봄 정월에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유주ㅡ당시로서는 상당히 먼 곳이었지. 중국 애들이 보기에는.(동도東都 낙양洛陽에서 1600리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이곳 유주에서 당군은 수많은 모래를 쌀처럼 쌓아서 군량처럼 보이게 한 황량대라는 것을 만들어 고려군의 눈을 속였다.

 

[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 報子弟之○, 高句麗, 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3월에 황제가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시중하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씨(隋氏)가 네 번이나 출병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짐이 지금 동쪽을 정벌함은, 중국을 위해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 고려를 위해 임금의 치욕을 씻어주려는 것뿐이다. 또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못했기에, 짐이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들의 남은 힘으로써 이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출발할 때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자기 손으로 안장 뒤에 비옷을 매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유성(柳城)을 출발해 형세를 과시하며 마치 회원진(懷遠鎭)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고는, 군사를 몰래 북쪽 양쪽에 용도(甬道)를 몰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길로 나왔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3월 정해

 

아아, 그러니까 중국을 위해서 그들 아들들의 원수를 갚아주시겠다.

이것이 또 기가 막힌 일이라, 조금은 판소리 사설이 가미된 신소설식의 문체로 이야기를 하자면,

아 내 잊고 말을 안 할뻔 하였는디, 저 당태종 이세민이라는 양반이 어떤 작자냐.

황제가 되겠다고 자기 형과 동생을 황궁의 현무문에서 활로 쏘아 죽이고,

병상에 누운 자기 아버지 고조를 협박해 황제 자리를 빼앗아 즉위한 분이다 이 말이외다.

그런 식으로 더러운 방법을 통해 황제의 지위를 얻은 그나,

그 이세민이의 아버지 당 고조 이연이는, 저기 멀찍이 따져보자 하면

일찍부터 수 양제에게서 녹봉 받아 먹고 살던 신하였는데도 불구하고서,

그걸 배신하고 반역해서 수를 무너뜨리고 당을 세웠단 말입니다그려.

무슨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오.

그러니 자기가 이미 반역에 패륜까지 저질러가며 황제가 된 주제에,

머나먼 동쪽의 땅 고려에서 일어난, 막리지 연개소문의 반란을 따끔히 혼내주겠다고 나오는

저것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니고 뭐겠소?

그러고보니 예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 김 아무개 여사께서도 그랬었다지.

친일파 때려잡겠다고 하더니, 정작 자기 아버지가 만주국 특무로 일하던 높은(?) 분일줄

누가 알았겠소이까. 그래놓고 자기 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투사로 활약하셨다고

국민들 앞에서까지 거짓 부렁을 해갖고서 국회의원까지 되놓고 말이외다.

뭐 어쨌든 경우가 제법 비슷한 것 같아서(내 주관에서) 소개를 하였소이다.

(이세민이 정주에 도착한 것은 3월 9일 정축ㅡ양력 4월 10일,

조서반포를 통해 고려에 '선전포고'한 것은 3월 19일 정해ㅡ양력 4월 20일.)

 

[夏四月戊戌朔, 高麗學問僧等言, "同學鞍作得志, 以虎爲友, 學取其術. 或使枯山變爲靑山, 或使黃地變爲白水, 種種奇術, 不可殫究. 又虎授其針曰 '愼矣愼矣, 勿令人知. 以此治之, 病無不愈' 果如所言, 治無不差. 得志恆以其針隱置柱中. 於後, 虎折其柱, 取針走去. 高麗國知得志欲歸之意, 與毒殺之."]

여름 4월 무술 초하루에 고려의 학문승들이 말하였다.

"우리 동료 안작득지(鞍作得志)는 범을 친구로 삼아 그 변신술을 배웠다. 메마른 산을 푸른 산으로 바꾸기도 하고, 황량한 땅을 흰 물로 바꾸니, 온갖 기술을 다하여 끝이 없다. 또한 범이 바늘을 주면서 '모쪼록 사람이 모르게 조심하라. 이걸로 다스리면 낫지 않는 병이 없다'고 했다. 과연 말한 바와 같아서 다스려서 낫지 않는 병이 없었다. 득지는 그 바늘을 기둥 속에 감춰 두었다. 뒤에 범이 그 기둥을 부러뜨리고서 바늘을 갖고 도망갔다. 고려국에서는 득지가 귀국하려는 것을 알고 독을 주어 죽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4, 황극기(皇極紀, 고교쿠키) 4년(645)

 

고려 학문승들이 왜국에서 이런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고 있던 바로 그날, 이세적은 통정진에 이르렀다. 요수 서쪽. 일찌기 수 양제가 고려를 공격할 때에 설치했다는 이 진에는 예전 수가 부교(浮橋)를 만들어 요수를 건너면서 쌓은 용도(甬道)라는 것이 있었다.당군은 이것을 재활용해 요수를 건넜다.

 

[夏四月, 世勣自通定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여름 4월에 세적이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지켰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4월 1일 무술ㅡ양력 5월 1일,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이 마침내 요하를 건넜을 때, 고려의 성읍들은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고ㅡ. 유성을 출발한 당군은 회원진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면서 일부러 북쪽의 용도로 빠져나와 통정진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동래에서 출발한 당군은 곧바로 평양으로 갈듯 싶더니, 방향을 틀어 고려 수군기지인 비사성이 있는 요동 반도 남쪽에 수군을 내렸다.

 

[副大摠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擾, 無敢出者.]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자,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10여 기(騎)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압박해 왔다. 성 안에서는 놀라 소란해지더니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4월 5일 임인(양력 5월 5일)

 

고려의 서북대진(西北大鎭)이라 불렸던 신성. 봉상왕 때에 북부대형의 벼슬을 지냈던 태수 고노자가 선비족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고국원왕 때에도 북도(北道)의 요충지로서 환도성을 작살낸 전연 군사들을 압박한 난공불락의 군향(軍鄕)이었다.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장수들과 용맹한 군사들이 이 성을 지키고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일. 겁 먹고 감히 나가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쓰던 청야수성의 원칙에 따라 성을 굳게 지키며 장기전을 모색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걸 당군이 자기네들 띄우느라 제멋대로 곡해해서 해석한 것 뿐이지.

 

계묘에 황제가 군사들에게 크게 음식을 먹인 다음 유주(幽州)의 성 남쪽에 장막을 쳤다. 조서를 내려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명하여 서사(誓師)하게 한 뒤, 이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신당서》

 

군사들한테 음식을 먹여가며 사기를 한껏 올려주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승리 뿐이다 라면서 조서를 내려 장손무기에게 서사를 시킨다. 일종의 충성 서약 같은 것인데, 출정하기 전에 모든 장수와 군인들이 최고 통수권자 앞에서 '반드시 이겨 돌아오겠사옵니다'라고 하늘 땅 사람 다 걸고 맹세하는 의식이다. 요즘도 하긴 하던데...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가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수천 명을 죽였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4월 6일 계묘(양력 5월 6일)

 

4월 6일 계묘에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구당서》의 자문을 빌리자면....

 

영주도독(營州都督)인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검(張儉)이 여러 번병(藩兵)의 기병을 이끌고 대군의 전봉(前鋒)이 되었다. 이때에 어떤 고려후(高麗侯)를 사로잡았는데, 막리지가 장차 요동으로 올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장검에게 조서를 내려 신성(新城) 길에서 맞아 치게 하니, 막리지가 마침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장검이 이 틈을 타서 진격해서 요수를 건너 곧장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들어가 고려군을 궤멸시키고 수천 급을 참수하였다.

《구당서》

 

신성과 건안성이 가장 먼저 당군의 공격 타깃이 되었다. 그리고 열흘 뒤인 4월 15일에, 당군은 개모성을 공격했다.

 

임자(15일)에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했다. 좌둔위장군(左屯衛將軍) 강확(姜確)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공격하다가 유시에 맞아 죽었다[卒].

《구당서》

 

개모성에 대해서 《자치통감》에 달린 주석에 보면 일단 그 위치는 요동성의 동북쪽이라고 했다. 원(元) 때에는 요양부로(遼陽府路)에 개주요해절도(蓋州遼海節度)가 있어서 건안(建安)ㆍ양지(陽地)ㆍ웅악(熊岳)ㆍ수암(秀巖) 네 현을 거느렸던 곳인데, 지금 중국 랴오허 유역의 서쪽인 선양 남부에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곳도 강하게 버텼지 버티기는...

 

좌둔위장군 강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개모성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있지? 예전에 그 당 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려고 할 때에 말렸던 사람. 전쟁 터지기 전에 안라산에서 성을 공격할 때 쓰는 운제나 충차 제작을 감독하기도 했었는데, 참 원하지도 않던 전쟁에 나와서 무기제작 감독을 한 것도 그렇고 결국 고려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참... 이 자리에서 조촐하나마 명복을.... 나무아미타불.

 

[李世勣·江夏王道宗攻盖牟城, 拔之, 獲一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함락시켜, 1만 명을 사로잡고 양곡 10만 석을 빼앗았으며, 그 땅을 개주(盖州)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4월 26일 계해(양력 5월 26일)

 

당 태종의 군사들이 북평에 도착하고 7일, 개모성이 함락당한다. 당군이 가장 먼저 함락시킨 고려의 성이었다. 이때에 주민 1만 명과 양곡 10만 석이 당의 손에 빼앗겼다. 하지만 개모성이 함락된 것을 고려군이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라... 여기 《구당서》 기록이다.

 

위정(韋挺)이 면직되었는데, 황제가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전군(前軍)이 개모성을 격파함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위정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개모성을 지키게 했다. 위정은 개모성이 대군(大軍)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의 신성(新城)과 가깝게 접해 있어 밤낮없이 전투를 벌여 북소리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구당서》

 

무슨 이유인지, 궤수사로서 군량수송을 맡았다가 면직당했던 태위경 위정이라는 사람이 당군에 백의종군했다가, 새로 함락시킨 개모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 사람은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를 못했다고 《구당서》는 적고 있다. 고려군이 사방에서 개모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겹겹이 둘러치고 북치고 소리치고 나와 이 XX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쨔라쿵짝... 아무튼 별별 개소리(?)를 다 내면서 깽판을 치고 있으니 이거 진짜 성 다시 함락되는거 아냐 싶어서는 겁먹고 벌벌 떨면서 거의 초조불안증 및 함락공포증에 시달려서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침상에 누워서도 마구 뒤척이고 벌벌 떨고 먹은 것도 다 토하고 제대로 밥도 못 먹고(아마 그랬을 거야. 불안증 증세라면. 나도 그렇거든)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五月,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했다.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올라갔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삼국사》 권제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보장왕 4년(645) 5월 2일 기사(양력 6월 1일)

 

개모성 다음으로 함락된 것은 비사성. 지금 요동반도 끝퉁이에 붙어있는 곳인데, 중국 현지에서는 대흑산산성이라 부르고 있고(실제로 그 산 자체가 멀리서 보면 진짜 시커멓다) 지금은 중국 해군기지가 들어서있는 곳이란다.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쪽 문으로만 오를수 있는 성이라는 기록처럼,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쌓는 고려의 성곽축성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고려의 성. 그런데 지금 동북공정인지 뭔지 하면서 그걸 엉터리로 복원해놓고 관광지로 만들어서 개방중이라니, 옛날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 듯 싶다. 들은 이야기도 그렇고...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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