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5181516311&code=900308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11) 파주 주월리 육계토성(下)
입력 : 2007-05-18 15:16:31
임진강이 휘돌아치는 2007년 4월 말. 기자는 11년전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 고대사의 흔적들이 홀연히 펼쳐진 바로 그곳, 육계토성(파주 주월리)을 찾았다.
육계토성
육계토성
첫 느낌은? 실망 그 자체였다. 농사를 짓느라 땅을 갈아엎은 경작지, 그리고 성인지 둑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현장.
‘어디가 성벽안가’
겨우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구조물(물탱크)에 올라서서 성전체를 조망했지만 어사무사했다. 그러나 찰라의 실망감도 잠시.
# 데자뷰
토성 건너편 임진강을 보자 순간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데자뷰라고 하던가.
그랬다. 몇 년 전 보았던 풍납토성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정말 비슷하군요.”
감탄사를 연발했다. 육계토성을 발굴한 김성태 기전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이나 백종오 경기도박물관 학예사(현 충주대 교수) 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북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강안을 따라 축조된 평지성인 풍납토성. 그리고 역시 북서쪽으로 임진강이 굽이 돌아가는 강안을 따라 축조된 평지성인 육계토성. 둘레 3.5㎞인 풍납토성과 그것의 절반 규모인 1.858㎞인 육계토성. 한강변 풍납토성은 이미 온조가 기원전 6년 천도했던 하남위례성으로 사실상 확정된 상태다.
그렇다면 임진강변에 방치된 채 서 있는, 풍납토성의 아우뻘 되는 이 육계토성은…. 혹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내려와 처음으로 세운 나라(백제)의 첫 도읍지, 즉 하북위례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육계토성은 삼국사기에 나온, 13년간 이어진 백제의 도읍지?
이제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자. 발굴단을 이끌었던 김성태씨와 백종오씨의 논문과 해설이다.
김성태씨는 육계토성 인근의 임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학곡리 적석총 등 일의대수로 이어진 백제적석총을 발굴한 주역. 그는 기원전후~1세기 적석총으로 보이는 학곡리 적석총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쓰면서 ‘하북위례성’이란 항목을 삽입했다. 한마디로 하북위례성은 임진강변에 있었을 것이며, 그 위치로 바로 ‘육계토성’일 수밖에 없다고 지목한 것이다.
풍납토성
# 5가지 이유
그는 하북위례성=육계토성일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댄다. 우선 두 성 모두 하중도(河中島)에 입지하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풍납토성의 경우 지금은 강 반대편은 평지로 돼있지만 일제시대 지도를 보면 자연 해자(垓字)처럼 돼 있다. 마치 섬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육계토성도 물길을 따라 성을 수축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두 성 모두 도강이 가장 유리한 교통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 그리고 평지성인 토성이면서 청야수성을 위한 산성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점도 꼽힌다.
알다시피 온조는 고구려계다. 그런데 고구려의 청야전술은 유명하다. 적이 쳐들어오면 주변에 적의 보급품이 될 만한 것들을 없앤 뒤 모든 백성이 배후의 산성에 들어가 적을 지치고 굶주리게 하는 전술이다.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모두 이 청야전술 덕분이었다. 지안의 국내성이 바로 그렇고, 풍납토성이 그렇다. 평지성인 풍납토성의 배후엔 남한산성이, 육계토성의 뒤에는 칠중성이 서있는 것이다.
# “낙랑·말갈 때문에 천도”
또한 두 성 모두의 인접지역에 백제적석총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도 꼽힌다. 육계토성 인근 임진강변에는 학곡리 적석총을 비롯, 삼곶리·삼거리 등 모두 7기의 백제적석총이 확인됐다. 그런데 풍납토성 인근에도 그 유명한 석촌동 고분군이 밀집돼있다. 마지막으로 토성 안에 대규모 취락지가 확인된다는 점도 같다. 풍납토성 안과 마찬가지로 육계토성 내에는 발굴단이 온몸으로 지킨 취락유적이 확인됐다는 점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육계토성 일대의 공간배치 구조는 고구려 왕도의 수법이 반영되었고, 13년후 하남위례성을 건설할 때의 모범이 되었다는 게 김성태씨의 단언인 것이다. 다른 증거들은 없을까.
온조왕은 기원전 13년 (하남)위례성 천도 불가피론을 밝히면서 “말갈과 낙랑의 위협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6년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말갈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는 등의 말갈 침입 기사가 도처에 깔려있다.
견디다 못한 온조왕은 마수성이란 성을 쌓고, 목책을 세웠다. 그러자 낙랑태수가 사자를 보내 협박했다.
“혹시 우리 땅(낙랑)을 야금야금 침범하려는 수작이 아니냐. 한번 해보겠다는 거냐?”
그런 협박에 굴복할 온조왕이 아니었다.
“요새를 설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정 너희들이 쳐들어 온다면 우리도 좌시하지 않겠다.”
낙랑은 말갈과 연합, 백제를 끈질기게 쳐들어왔다. 결국 낙랑과 말갈의 위협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 천도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김성태·백종오씨 등 발굴자들은 여기에도 착안점을 둔다. 한국사에서 천도라는 것은 특정의 대하천 유역에서 다른 대하천 유역권으로 공간적인 이동을 해온 게 일반적이다.
# 백제탄생의 비밀 담긴 곳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 이후 많은 학자들이 지목했던 한강이북(하북위례성)→한강이남(풍납토성)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은 적다고 봐야 한다. 당시 백제와 낙랑의 접경이 예성강을 중심으로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면 자연 백제의 배후 중심지는 임진강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또한 육계토성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북방·남방세력의 침공로로 중요시됐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물론 아직까지 육계토성=하북위례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육계토성은 2000년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한국고대사의 진실, 즉 백제 탄생의 비밀을 밝혀줄 열쇠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방치, 그 자체다. 얼마전 육계토성은 ‘경기도문화재’ 지정이 결정됐다. 당연히 ‘국가사적’으로 지정돼야 했지만 ‘도지정 문화재’로 격하된 것이다. 만약 육계토성이 요즘 트렌드인 ‘고구려 유적’으로 지정신청되었다면 어땠을까. 백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격하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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