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2571

한강을 굽어보는 삼국의 역사
<서울 경기 역사기행 17> 여주 파사성(婆娑城) 기행
06.05.21 15:15 l 최종 업데이트 06.05.21 15:16 l 노시경(prolsk)

남한강변 지도를 따라가다 보니 파사산(해발230m)에 자리잡은 파사성지(婆娑城址)가 눈에 들어온다. 지도를 머리 속에 넣고 88올림픽대로를 지나 6번 국도에 접어드니, 두물머리의 햇볕이 따스하게 빛난다. 양평에서 37번 국도를 만나고 한적한 마을을 지난 후, 나의 차는 여주에 접어들었고, 곧이어 이포나루 근처의 대신면(大神面) 천서리(川西里) 막국수촌이 나온다. 막국수촌의 북쪽에 자리잡은 산이 파사산이고, 차를 조금 동쪽으로 움직여 파사성 이정표가 있는 파사산 입구에 도착했다.

차를 사찰의 주차장에 세워두고 파사산을 향해 발걸음을 떼다가 다시 돌아왔다. 인가 사이로 난 좁은 길 중에서 어느 길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사찰의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시멘트를 개던 스님에게 말씀을 여쭈었다.

"파사산 올라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하지요?"
"저기 인가 오른편으로 난 조그만 길을 따라가면 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기자 신가요?"
"파사성 유적을 구경하고 유적 사진을 찍으려고 합니다."

"파사산은 이른 아침에 오면 참 좋습니다. 그리고 비 갠 후의 맑은 날에 내려다보이는 이포 나루의 절경은 이루 설명할 수 가 없습니다. 오전에 오셨으면, 제가 직접 파사성과 마애여래불로 안내해 드렸을 텐데. 우선 마애여래불(磨崖如來佛)을 먼저 보시고 파사성을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애여래불 아래에서는 샘물로 목을 축이시지요"

스님의 따스한 미소를 뒤로하고 파사산 등정을 시작했다. 이방인의 등장을 경계하는 동네 개가 나를 보고 연신 짖어댄다. 파사산 남쪽 능선은 그리 높지 않지만 경사는 꽤 심한 편이어서, 괜히 숨이 차기도 한다. 이 능선 길에 가득 찬 산밤나무와 도토리 나무가 이 여행자를 굽어보고 있고, 중간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가 이 아름드리 나무들과 어울리고 있다.

파사성과 마애여래불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는 자연 나무에 붓으로 쓰여져 있다. 이 이정표는 방금 만나 뵌 수호사 스님이 만들었을 것이다. 수호사 주차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스님의 친절이 산에 오르는 이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산을 20분 정도 오르니 우리나라 여느 산성에서도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성벽이 눈앞을 막아선다. 높은 곳의 성벽은 높이가 5∼6m에 이른다. 아! 서울 근교에 이렇게 높은 삼국시대의 성벽이 아직까지 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다.

▲ 파사산 약수 ⓒ 노시경


우선 마애여래불을 찾았다. 능선을 따라 북쪽 아래로 향기로운 소나무 숲길 500m를 가면 마애여래불이 나온다. 이 마애여래불은 그 양식이 뛰어난 국보나 보물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국방의 요새인 파사산에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게 해주는 푸근한 문화유산이다. 바위에 선각된 마애여래불의 높이가 5.5m에 이르니, 저 마애여래불을 조각한 이는 바위에 매달리거나 상당히 높은 단을 쌓아두고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나갔을 것이다.

마애여래불 아래편 바위에서는 신기하게도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바위 속 싱그러운 이끼가 샘물을 머금고 햇빛에 빛나고 있다. 이 샘물은 전쟁 시에 파사성에 주둔한 군인들의 식수로도 유용할 만큼 충분하다고 한다. 파사성을 쌓은 여자 장군이 암벽에 새겨진 여인이고, 그 아래에 암벽을 뚫어 샘을 팠다고도 하나, 암벽의 마애불과 관련해서 생긴 인근 주민들의 애교 섞인 전설이다.

발 밑으로는 이포나루의 모래사장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도 저렇듯 자연스러운 백사장에 새들이 사는 곳이었으면 얼마나 더 멋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시 소나무 숲길을 접어들어 남쪽으로 내려오면 바로 파사성 동쪽 성벽이 이어지는 파사산 정상이 나온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파사산성 정상 위에 총을 멘 군인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예비군 아저씨들은 얼마 있지 않아 무리를 지어 총총히 파사산성을 내려갔다. 삼국시대의 격전지에 요새도 군인들이 모이는 것은 이 산성이 자리한 위치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 파사성 ⓒ 노시경

파사산성 정상에 서니 일순간 가슴이 탁 트인다. 성벽은 가장 높은 파사산 정상으로 솟구쳤다가 능선을 따라 한강을 바라보며 긴 뱀 같이 936m가 이어진다. 성벽은 이 곳 여주의 자치단체장들이 힘들여 복원한 구간도 많지만, 역사적 연륜의 이끼 낀 성벽도 아주 잘 남아 있다. 성의 어디에서나 한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보이기에 한강을 따라 움직이는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공격하기에 아주 좋은 요새이다. 조선시대에 번창했던 한강변 이포나루는 서울의 한강에 비해 인적도 드물고, 한강 위에 걸친 이포대교도 한가롭다. 강변에 이어지는 여주의 너른 들판은 예부터 참으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른 성벽 위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기다가 문득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성의 이름이 파사성(婆娑城)인가? 신라의 왕 중에 5대 왕인 파사 이사금(재위 80∼112년)이 있는데, 이 파사 이사금의 한자가 파사성의 한자와 똑같다. 파사 이사금은 경주 주변의 낙동강변 소국들과 울진, 삼척의 소국들을 병합했던 정복군주이기는 했으나, 당시에 신라가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을 때이다. 파사 이사금이 이 파사성을 만들었으리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신라 파사 이사금 때에 남녀 두 장군이 이 파사성을 쌓았다는 것은 후대의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는 전설일 뿐이다.

이 성을 처음으로 쌓았던 나라는 이 파사산 인근을 가장 먼저 지배했던 한성백제였다. 파사성 가장 안쪽 건물지를 발굴한 결과, 전형적인 한강 유역 백제 토기인 중도식 무문토기(무늬 없는 토기)와 타날문토기(찍어누른 무늬가 있는 토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토기들은 한성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 즉 풍납토성에서 수도 없이 발견되는 토기들이다.

그 후 이 백제의 파사성을 접수한 나라가 신라였던 것이다. 파사성 성벽을 발굴하자 6세기 이후 신라토기인 단각고배(短脚高杯: 높은 굽 토기잔 중 비교적 짧은 다리를 가진 잔)와 오각형 모양의 철 화살촉이 나왔다. 발굴 결과는 이 성이 한창 팽창하던 신라의 진흥왕 때 사용했던 석성으로 밝혀졌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 진흥왕 십이년 조에 의하면,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 명하여 고구려를 침락하여 이김에 따라 10개 군을 취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파사성은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뺏은 한강 중상류의 10개군 소속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흙으로 쌓은 토성 위에 신라인들이 석재로 성벽을 더 강하게 쌓았을 것이다.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한강 조망이 좋은 파사성은 충주와 조령을 잇는 신라의 요지라는 점에서 진흥왕 이후 신라의 중요한 성으로 기능해 왔다.

이 파사성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 유물도 많이 발굴되어, 파사성은 역사시대 내내 줄곧 중요한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파사성은 임진왜란 때에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발의하여 승군총익인 의암(義巖)과 승군을 동원하여 둘레 1,100보의 이 파사성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파사성 성벽을 자세히 보면, 신라인들이 쌓은 초기의 석벽과 함께 중수한 석재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 성은 한강에 대한 조망이 훌륭하여,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이 이 파사성에서 '파사망우(婆娑望雨)'라는 시를 남겼다. 대문장가 이색이 여름철 파사성에서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느꼈던 아름다움이 지금도 이 성에 전해지는 듯 하다. 수호사 스님도 비 갠 후 파사성 전망이 더 없이 아름답다고 하던데, 강나루에 빗물이 젖어드는 풍경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어느 봄날, 조선 선조 때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있던 유성룡(柳成龍)이 파사산 금강루에 올라 '파사성(婆娑城)'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婆娑城上草  (파사성상초천천) 파사성 위에 풀이 무성하고 
婆娑城下水 廻(파사성하수영회)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게 굽어 흐르네 
春風日日吹不斷(춘풍일일취불단) 봄바람은 날마다 끝없이 불어오고 
落紅無數飛城 (락홍무수비성외) 지는 붉은 꽃잎이 무수히도 성 모퉁이에 흩날리네

조선시대, 한강과 봄날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하다.

파사성을 내려와 수호사 주차장에 들어서니, 수호사 스님이 밝은 미소로 다시 나를 맞는다.

"둘러보시니 어떻던가요? 마애불과 파사성 모두 둘러보셨나요?"
"네,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마애불 앞의 샘물이 시원해서 참 좋았습니다. 파사성도 성벽의 크기가 대단하더군요"

"파사성은 여주군에서 계속 복원은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미완성 상태입니다. 예산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언제 다 복원될지는 알 수 없지요. 아침 맑은 공기에 파사산을 오르면 참 좋습니다. 다음에 또 오시면 정말 파사산에 같이 한번 오르시지요."
"서울에서도 가까워서 참 좋네요. 서울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군요. 다음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스님은 창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호사 건물 건립에 쓰일 시멘트를 개고 있었다. 그가 불사에 바쁘지 않았으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신라군들이 자신들의 국력을 걸고 팽창하던 한강변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오는 동안 내내 한강이 왼편에서 나를 따라왔다. 서울로 들어오자 한강변에는 차들이 너무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나의 차도 앞으로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네이버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do에도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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