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5179

한길 벼랑 위에 이어지는 바람
<서울경기 역사기행 13> 파주 월롱산성(月籠山城) 기행
05.05.12 22:31 l 최종 업데이트 05.05.13 11:43 l 노시경(prolsk)

파주의 월롱산성은 현재 통일전망대인 오두산성(烏頭山城)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가족들과 통일전망대, 그리고 바로 북쪽의 헤이리 예술인마을에 자주 가 보아서, 월롱산성 가는 길은 눈에 익은 길이다. 가족과 같이 가던 길을 나 혼자 차를 가지고 나서니 조금 낯설다.

군부대 담벼락 한쪽에 차를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어서 차를 세우고, 바로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줄기 아래에는 많은 공원묘역이 있고, 산의 남쪽 아래 넓은 지역에 군부대가 있다. 인적이 드문 길이기에 이 곳이 월롱산이 맞느냐고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다. 지도에서 보았던 지명과 방위감각 만으로 월롱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니 계속 오르다보면 정상이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올라갔다.

산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붉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가끔 남산제비꽃이 눈에 띈다. 바위 옆에는 아기 손 같은 고사리가 탐스럽게 자라고 있고, 바위 밑의 약간 습기 진 곳에는 이끼와 바위솔이 탐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다. 황사를 머금은 하늘은 약간 뿌옇다.


▲ 월롱산성의 철쭉 ⓒ 노시경

고작 229m 높이의 산이라서 만만하게 생각하고 이 산을 올랐으나 그게 아니었다. 깎아지른 듯한 월롱산 정상의 암벽은 올라가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참으로 장관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제대로 서 있기도 불안한 상황을 연출한다. 참으로 성을 만들기에 적합한 험준한 지형이 산 정상부에 갑자기 나타난다.

정상 바로 아래 암벽에 뿌리를 내린 철쭉이 산정상에 부는 바람을 맞아 흔들거리고 있다. 암벽 아래로는 야트막한 산줄기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파주 서쪽의 낮은 산들 중에서 월롱산만이 비교적 높은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특히 북녘 땅 산줄기의 이어짐도 한눈에 들어오고, 임진강 하류와 한강 하류 사이의 파주 평야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월롱산 동북쪽으로는 문산읍이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는 봉서산성(鳳棲山城, 216m)이 보인다. 문산 쪽에서 교하로 들어오는 길목인 통일로는 이 월롱산성 동쪽을 지나고 있다. 월롱산 서편으로는 기간봉(246m)이 월롱산(229m)을 마주보고 있고,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점에 자리한 오두산(119m)이 이어지며, 서남쪽으로는 장명산(102m)이 보인다. 월롱산을 포함한 구릉성 산지는 풍화와 침식을 받아서 완만한 산마루를 보여주고 있다.

월롱산 남쪽으로는 금촌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앞을 한강의 지류인 곡릉천이 아스라이 지나간다. 월롱산 남쪽의 물줄기는 모두 한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고개를 돌려 월롱산 서쪽을 보면 서해와 연결된 한강의 물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오두산성, 월롱산성 등 파주 서쪽에 지어진 성곽은 임진강변과 양주의 교통로에 집중 분포한 성곽들과 연결되고 있다.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자리잡은 파주는 옛부터 풍요로운 곳이었다. 월롱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에는 덕은리 고인돌군과 옥석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가 있으니, 역사시대 이전부터 이 월롱산 주변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풍요로운 곳을 지키기 위한 성곽들이 어느 곳보다도 많이 남아 있다.


▲ 월롱산성에서의 전망 ⓒ 노시경

이 월롱산에 산성이 들어선 이유는 또 한가지가 있다. 월롱산을 둘러싼 월롱면 일대는 옛 부터 약수가 유명한데, 상처를 입은 사슴이 매일 밤 월롱산 개울에서 상처를 씻었다고 하며, 많은 새들이 이 곳에서 목을 축였다고 한다. 물 좋고 지세가 험한 산이 평야지대 한편에 자리잡고 있으니, 선조들이 자연히 이 곳에 성을 쌓은 것이다.

나는 산 정상부에 있다는 산성을 바로 올라가지 못했다. 내가 올라간 남쪽 능선에서는 암벽을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암벽 아래에 난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자 산의 능선을 가로지르는 비포장 임도가 나왔다. 그 길을 따라 산길을 조금 오르니 북쪽과 동쪽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드디어 눈앞에 월롱산성이 나타난다. 이 산성은 월롱산 정상부의 내성과 함께 동쪽 능선 모양을 따라 둘러진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에 테를 두른 듯이 산성을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내가 이 월롱산성을 찾은 것은 이 산성이 한성백제의 흔적이 남은 몇 안 되는 산성이기 때문이다. 이 월롱산성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한성백제가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파주 지역을 통제하던 산성이었다. 군사적 요지에 자리잡은 이 성은 풍요로운 파주 들녘을 지키는 성이자 백제 북쪽의 영토확장을 위한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었다. 

월롱산 암벽은 적이 올라오기 힘든 거대한 성벽이며, 산 정상부에 밖으로 돌출된 거대한 암봉은 성을 지키기 위해 성벽 바깥쪽에 튀어나온 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도 산성 바로 아래에는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으니, 이 월롱산의 전략적 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약 1600년이라는 역사를 지나면서 허물어진 토축은 현재 높이가 2.7m이다. 성벽이 오랜 기간 허물어진 높이이니, 당시의 성벽 높이는 이 높이보다는 높았을 것이고, 평지가 아닌 험준한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이 성벽은 더욱 높았을 것이다. 

토축! 이는 한성백제인들이 남긴 대부분의 성에서 나타나는 양식이다. 풍납토성이 그렇고, 몽촌토성이 그렇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흙으로 쌓은 성벽이 아직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흙으로 대충 쌓은 성벽이 아니라 다져 쌓기로 정성을 들여 이룩된 성벽이기 때문이리라.

2004년 5월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월롱산성의 전체 길이는 1315m에 면적은 3만3232㎡이다. 성의 외벽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수직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임도가 있는 곳까지 돌아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재의 나는 이 곳을 지키는 백제의 병사들이 없기에, 아주 손쉽게 성안으로 진입하였다. 산중턱에 쌓은 이 성의 내부는 마치 평지에 지은 성처럼 평지 면적이 매우 넓다. 말 그대로 천연 요새인 것이다. 산성 내부가 넓게 펼쳐져 있기에 많은 백제 유적이 분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학술 조사결과는 아직 허술한 편이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이 월롱산성 정상에 근린체육공원이라는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점이다. 2000년에 만들어진 체육공원 주변에는 백제시대 토기조각 등의 유물이 흩어져 있다. 산 정상에는 주한미군의 헬기장과 포대 은폐지 등 군사시설까지 만들어져 있고, 한국이동통신 기지국시설까지 들어서 있다.

산성의 외벽도 문화재로 지정 전에 채석장으로 쓰여서 상당부분이 깎여나간 상태다. 그 험준한 외벽이 백제 당시의 모습이 아니고 굴착기로 무너뜨린 이후의 모습인 것이다. 이국적이고 황량한 아름다움을 던지는 수직의 절벽은 현대의 기계가 갉아낸 자국이다. 성벽의 한 축을 담당했던 절벽을 정상 부분만 남겨두고 갉아냈으니, 이는 우리 문화유산이 무너진 것인가? 아니면 자연의 절경을 무너뜨린 것인가?

산성 북쪽의 성벽에는 성벽의 돌을 빼내고 그 자리에 고무 타이어를 박아놓았다. 이런 황당한 사태가 있을 수 있는가? 성벽을 올라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 쓰다 버린 타이어를 선인들의 유산에 박아놓았는가?

게다가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일대에 LG필립스 LCD 단지가 유치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군부대 진지가 이 월롱산성 아래의 6∼7부 능선에 이전되려 하고 있다. 발굴조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월롱산성을 현대의 군시설이 포위하려고 하고 있다. 군부대 진지 건설보다는 발굴조사로 이 산성의 유적과 유물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월롱산성은 1994년과 1999년의 지표조사 결과, 3세기∼4세기 중반의 회청색 격자문(格子文: 직선이 같은 간격으로 직각으로 교차해나가는 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승석문 (繩蓆文: 새끼줄 무늬)토기조각과 회백색연질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로 미루어볼 때 역사적으로 백제의 전성기인 고이왕(古爾王)∼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이 산성이 주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백제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 때에 이 산성의 활용도는 가장 높았을 것이다. 이 산성이 존재하던 이유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 월롱산성의 암벽 ⓒ 노시경

바람이 강하게 부는 월롱산의 산정에 올랐다. 산 정상에는 지적 측량을 하는 기준점인 지적삼각점이 있다. 이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은 천애의 낭떠러지인데, 바람마저 얼굴에 부딪히니, 잠시 한 눈을 팔았다가는 바로 황천 행이다. 어른 한 명이 겨우 걸어갈 수 있는 낭떠러지를 식은 땀 흘리며 걸어야 결국 이 산의 정상에 닿는다. 이 낭떠러지 길은 마치 한성백제의 역사를 찾으러 가는 외길로 연결되는 듯 보인다. 이 산성에 들렀을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초고왕은 현재의 황해도 땅인 대방(帶方)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한 왕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369년(근초고왕 24년) 가을 9월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추정되는 치양(雉壤)을 침략하여 주둔하면서 군대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치고, 이 지역을 백제의 영토로 굳히게 된다. 백제의 근구수(近仇首) 태자가 군대를 이끌고 치양에 이르는 지름길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대를 일격하였던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 군을 격파하여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노획한 전리품을 장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마도 그 백제군사들은 현재의 풍납토성인 수도 위례성에서 출발하여 이 월롱산 우측을 통과하여 북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문산읍과 임진강을 지나고 개성을 지나 황해도 땅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마도 이 월롱산성과 주변의 봉서산성, 오두산성에 주둔해 있던 백제 병사들도 백제의 대군대에 합류하여 황해도에서의 고구려와의 대회전(大會戰)에 참가하였을 것이다. 대륙의 강자인 고구려군과의 전투는 이 월롱산성에 주둔하던 병사들에게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침공은 계속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71년(근초고왕 26년)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369년의 침공 2년 후인 371년에 고구려 군대가 보복을 위해 다시 대군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허를 찌르는 매복작전 전술로 고구려의 남진에 제동을 걸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71년 겨울에 왕이 태자(근구수왕)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황해도의 남평양성 추정)을 공격하였다.' 원수 고구려를 칠 때가 되자 백제는 마침내 대군으로 고구려 침공에 나섰던 것이다.

태자가 지휘관으로 선봉에 섰고,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이 친히 싸움에 나왔다. 백제군은 계속 돌진하였고, 고구려 왕 사유(斯由)도 이에 지지 않고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정통으로 맞아 죽었다. 태자는 백제군을 휘몰아 돌진하였지만 적국의 왕이 죽자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그 곳에 전승 기념으로 돌을 쌓게 하고는 군사들을 돌렸다.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表)'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고국원왕의 머리는 목이 베어진 후 백제 병사들 앞에서 나무나 창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제군은 화살과 함께 돌도 전투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현대의 투석전은 이토록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 월롱산성 정상 ⓒ 노시경

377년 초겨울 10월, 드디어 근구수왕은 다시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까지 침공하였다. 근구수왕은 가을 동안 거둬들인 보급품을 가지고 눈이 오지 않는 초겨울에 선제공격을 가하였던 것이다. 초겨울이지만 날씨가 따뜻하여 고구려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고, 이러한 날씨도 백제군이 전쟁을 시작하는데 용이했을 것이다.

월롱산성 오른편에는 현재도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1번 국도가 지나간다. 월롱산 정상에서 1번 국도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2.5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한반도 북쪽에 가기 위한 이 '1번' 국도는 당시에도 고구려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선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파주의 들녘에서 나온 식량은 초겨울 전투를 위하여 백제군들에게 지급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와의 대전쟁 기간 동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남은 월롱산성의 백제군은 아마도 '병참선 경비대'였을 것이다.

서기 369년∼377년의 백제와 고구려간 전쟁은 삼국시대의 전쟁 중에서도 가장 단기간에 유래가 없을 정도의 많은 병사들이 치른 수차례의 대회전(大會戰)이었다. 현재 이 월롱산성은 찾는 이가 많지 않은 한적한 산성이나, 이 8년의 기간 동안에 한성백제 전방을 지키던 월롱산성에는 끊임없이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월롱산성은 언제 고구려군에 함락되었을까? 391년,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게 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은 상황이 바뀌게 된다. 동아시아의 패자인 광개토대왕은 즉위 초부터 대방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으로 진격하였다.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친히 이끄는 고구려 수군이 한성백제의 심장부 깊숙이 치고 들어와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396년에 백제는 다시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았다.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남하한 광개토대왕에 의하여 백제는 무려 58성을 빼앗기고,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이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58성과 700촌을 고구려에 공취당하였다. 이 58개의 성 가운데에 월롱산성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백제 이후의 삼국시대 유물은 이 산성에서 발견되지 않으니, 고구려군에 함락된 이 월롱산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산을 한바퀴 돌아드니 산 중턱에 용상사(龍床寺)라는 사찰이 나온다. 이 사찰 밑으로는 조그마한 계곡이 이어진다. 이 곳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왕이 몸을 피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의 왕이 거란 대군의 침입시 일찍이 민간인 차림으로 피난하여 여기에 몸을 숨겼다는 곳이다. 당시 고려의 왕 현종(顯宗)이 이곳에 도피하여 한때 은둔하였고, 이 내력으로 인해 이 암자와 같이 조그마한 사찰의 이름에 왕을 상징하는 '용'자가 남았다.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힘드나, 흔하지 않은 전설임을 생각해보면, 역사적 사실과 닿아있을 것이다.

거란의 대규모 침입은 현종 원년인 1010년과 현종 9년인 1018년에 이루어졌으니, 월롱산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된 지 600년 후에 이 월롱산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월롱산에 급박하게 대피하였던 현종은 개성에 돌아간 후 거란의 요구를 수용하여 송(宋)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거란이 세운 요(遼)와의 공식 외교관계를 수용하였다.

이 월롱산은 북방에서 등장한 고구려, 거란과의 힘이 맞부딪치던 곳이었다. 고구려의 공략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게 되었고, 이 산 아래 숨어들었던 고려의 현종도 개성으로 돌아가 왕위를 유지하며 고려의 수백 년 왕업을 유지하였다. 이 겨레 산하에 이러한 우리 조상의 역사가 낱낱이 스며들어 있으니, 이 땅 이 산은 진정한 우리의 정신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 4월에 파주 월롱산성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http://blog.naver.com/prowriter.do에도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