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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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騎兵)들이여! 고구려로 진격하라
<역사기행 2> 몽촌토성에 남은 백제의 기마 문화를 찾아가는 여행
03.07.15 06:38 l 최종 업데이트 03.07.15 11:16 l 노시경(prolsk)
오락가락하던 장맛비가 그치고 다시 뜨거운 햇살이 대지를 달구고 있다. 오늘은 몽촌토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한산성에서 뻗어 내린 '산(山)'의 낮은 부분에 토성을 쌓은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던 '한산(漢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물론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지명이지만,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진실은 더욱 호기심을 끌게 하는 법이다.
서울 시내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이 백제의 성에서 나는 며칠을 지낸 적이 있다. 9년 전, 나는 새벽마다 체육복을 입고 수백 명의 그룹 입사동기들과 헉헉거리며 언덕길을 뛰었었다. 여행은 항상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삶을 풍요하게 한다.
토성은 전날 밤의 비에 젖어 향긋한 풀내음을 풍기고 있고, 진한 녹색의 잔디밭은 더 이상 푸를 수 없는 모습이다. 물론 이 잔디는 현대 조경술의 산물로서, 백제 당시에는 누런 황토 흙의 성벽에 잡초만이 자라고 있었을 것이지만….
▲ 몽촌토성 해자. 고대에는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 노시경
먼저 해자(垓字, 성밖으로 둘러서 판 방어용 못)를 건넜다. 그 해자가 넓고 시원하기는 하지만 너무 막무가내로 복원을 해 놔서 백제 당시의 모습이 아닌 것이 안타깝다. 그 당시의 백제인들은 이 해자 위에 다리를 놓아 건너고, 이 다리는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 몽촌토성 남문 내부. 성문은 무너지고 내부에는 야생화가 피어있다. ⓒ 노시경
남문이 있었던 자리에는 성문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높은 성벽 위 산책로에는 아침 운동을 나온 사람들의 건강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남문 터 안쪽의 야생화 단지에는 무궁화와 함께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숲 속에서는 먹이를 찾는 토끼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접근한다. 나도 성 남단의 성벽에 올라 2340m의 토성 산책로에 들어섰다. 그 높은 성벽의 잔디밭을 미끄럼틀 삼아 성벽을 타고 내려가는 남자아이들의 표정만이 즐거울 뿐이다.
▲ 토성 내부에는 사람을 반기는 토끼가 놀고 있다. ⓒ 노시경
▲ 토성의 높은 성벽에서 미끄럼을 타는 남자 아이들 ⓒ 노시경
몽촌토성 성벽의 곳곳에 자리한 망루(망을 보기 위하여 세운 높은 집) 자리에 올라보자. 이 곳에 서면 몽촌토성을 포위한 거대한 시멘트 건물들의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토성의 흙이 주는 따뜻함과 부드러운 곡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성곽의 육중하고 폐쇄적인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백제 당시의 '한산'의 망루는 주변 지역보다 훨씬 높아서 북쪽의 한강과 위례성을 내려다보는 요새와 같았다. 그리고 망루 아래에는 고구려 군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목책(나무 울타리 방어벽)이 성벽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 몽촌토성 북벽의 목책. 고구려군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 노시경
<삼국사기> 백제본기 371년(근초고왕 26년) 기사를 보자. '이도한산(移都漢山)'. 백제의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은 도성의 위치로는 너무 높은 산 위에 있고, 주변의 이성산성에서는 백제의 뚜렷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몽촌토성의 발굴 연구성과로 인하여,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인 한산이자 남성(南城)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한산'은 북성인 위례성과 함께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몽촌토성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도 이 곳이 3세기 이후에 지어진 곳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성(大城)인 위례성 내에는 왕 등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거주하여 도성공간이 협소하였고,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방어에 더욱 용이한 도읍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위례성 800m 아래 지점인 한산에 또 다른 성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이 몽촌토성은 근초고왕 이후의 백제왕들이 살던, 현재의 청와대 같은 곳이었다.
이 곳의 왕과 왕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당연히 이 성은 군사적인 면이 중시되게 된다. 그래서 이 곳에는 한성백제의 군대들, 특히 기마 부대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이 흔적들은 몽촌토성에 현재까지 남은 뼈 갑옷, 말 재갈과 함께 <삼국사기>의 기록들이다.
▲ 몽촌토성 움집터. 백제 군인들의 막사로 추정된다. ⓒ 노시경
기병의 흔적들을 찾으려면 우선 토성 동문 터 아래의 망루에 자리잡은 움집에 가봐야 한다. 움집터는 현재 일반인들이 유구의 위에서 잘 둘러볼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다. 유적을 흙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유적에서 조금 벗어나 이 유적을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이 시설은 유적을 친근하게 보존할 수 있는 정답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이 움집터는 다름 아니라 동문을 지키던 경호부대의 막사였다. 이 곳의 막사 3개에서는 기마병을 포함한 백제병사 수십 명이 동문과 왕성을 지키고 있었다.
▲ 움집에서 발견된 뼈갑옷. 기마병들의 전투보호장구이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바로 이 움집터에서 돼지나 사슴의 뼈로 만든 비늘갑옷이 발견되었다. 갑옷은 주지하듯이 적의 무기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했던 것으로, 비늘(小札)에 구멍을 뚫어서 서로 엮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뼈 조각을 연결해서 옷 모양으로 만든 비늘갑옷(札甲)은 판갑옷(短甲)에 비해 가볍고 활동성이 커서, 기마용으로 사용되었다. 짐승의 내부를 지탱하던 뼈가 인간의 몸뚱아리를 보호하기 위해 치장된 것이다. 말 등에 올라탔던 기마병은 없어졌지만 기마병이 입고 있던 뼈 갑옷은 그 때의 진실을 지금까지 전해준다.
▲ 백제의 말재갈 혹은 말족쇄. 말을 통제하던 쇠붙이이다. ⓒ 몽촌역사관
기마부대의 또 한 구성요인인 전투마들의 흔적은 어디에 있나? 이 곳의 말들도 물론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 몸을 통제하던 쇠붙이는 남아 있다. 1985년, 몽촌토성 3호 구덩이에서는 인상적인 마구(馬具)인 말 재갈이 발굴되었다. 쇠로 만든 이 재갈은 말의 입에 물려서 말을 통제하는 마구이다. 이 마구를 풀어놓은 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앞 발목을 묶어 두던 마구인 말 족쇄로 보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쇠로 만든 이 마구는 반원 모양 쇠뭉치 2개를 꽈배기처럼 꼬아 쇠줄 고리로 연결하였다.
당시 군사력의 척도였던 이러한 말들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였으며, 말들을 상하게 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해졌다. '고구려인 사기(斯紀)는 본시 백제인으로 국가에서 기르는 말의 발굽을 잘못하여 상하게 하자 죄줄까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쳤었다'라는 <삼국사기> 근초고왕 기사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신왕 8년(399년)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군사와 말들을 크게 징발하였다.' 전쟁 시에는 민간의 말까지 전쟁에 동원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왕과 기마부대는 평화시에 이러한 갑옷을 입고 마구를 채운 말을 타면서 남한산과 북한산에서 사냥을 하였다. 그리고 전쟁시에는 왕이 이 기마부대를 이끌고 말갈과 고구려에 진격하였다.
그렇다면, 한성백제의 기병 규모가 궁금해진다. 그 수수께끼는 <삼국사기>의 기병에 대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온조왕 10년(서기전 9년)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중략).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온조왕 22년(서기 4년) 가을 9월에 왕이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온조왕 40년(서기 22년)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구수왕 3년(216년) 가을 8월에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하였다. (중략).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한성백제 초기의 기병부대는 2백 명에서 천명 가량이었다. 특히 천 명의 기병은 그 기동성으로 인하여 전쟁 수행능력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 몽촌토성 북쪽 망루터. 이 곳에서 보면 한강이 보였었다. ⓒ 노시경
이 기병들은 이 몽촌토성에 왕성을 지은 근초고왕 대에 고구려로 진격을 한다. 근초고왕과 기마병을 포함한 백제군사가 고구려를 치러 집결했던 곳, 그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당시 한강을 바라보던 몽촌토성 북쪽 망루터에 올라보면 그 곳을 볼 수 있다.
다른 곳의 성벽과 달리 이 곳은 아주 높아서 성벽 아래의 사람이 까마득하게 보일 정도이다. 이 북쪽 망루와 한강 사이에 한성백제의 연병장이 있었던 것이다. 현재 그 곳은 고층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사진을 찍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 몽촌토성 북쪽 망루터. 고구려군의 침입을 경계하였다. ⓒ 노시경
'근초고왕 24년(369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깃발은 모두 누른 색(黃色)을 사용하였다.' 1천 6백년 전, 한수 남쪽의 현재 아산병원 자리에서는 백제군의 황색 깃발이 장관이었다.
다시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근초고왕이 고구려로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리의 개선을 한 것이다. 371년! 그 당시의 몽촌토성은 대륙의 강자를 무찌른 기쁨에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백제군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이 몽촌토성의 남문을 열고 힘차게 뛰어 나가는 백제의 기마병들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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