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10516
백제 건국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과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하고 싶다면] ② 북한산성의 과거와 현재
08.11.12 11:00 l 최종 업데이트 08.11.12 11:00 l 이상기(skrie)
삼국시대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역사
▲ 애기를 업은 형상의 북한산 ⓒ 이상기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 개루왕 5년(132) 2월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초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따르면 북한산성이라는 표현은 백제 건국 시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북한산성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보니 그 형상이 가히 살만한 땅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후에 온조가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 그리고 다시 도읍을 북한산성으로 옮기니 지금의 한양이다. 점술가가 그곳을 명당이라고 하였으나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
▲ 업힌 애기에 해당하는 인수봉 ⓒ 이상기
여기서 부아악(負兒岳)이란 아이를 업고 있는 바위산이라는 뜻이다. 동장대 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백운대와 만경대가 겹쳐 어머니 산처럼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인수봉이 등에 업힌 어린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비류와 온조가 현재의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에 올랐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역사가 백제가 나라를 세우는 기원전 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백제 개로왕 15년(469) 10월에는 백제가 쌍성(雙城)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성책을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북한산성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이 기록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진흥왕조에 보면 진흥왕 16년(555)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하였다. 18년에는 신주(廣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북한산이 신라의 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한양과 북한산성의 역사
▲ 목멱산 북쪽 현재 서울의 모습 ⓒ 이상기
이후 북한산 남쪽의 현재 서울이 다시 중요하게 된 것은 고려 숙종 때이다. 위위승 동정(衛尉丞 同正) 김위제(金謂磾)가 <도선비기>를 인용, 목멱산 북쪽 양지바른 곳에 남경을 만들 것을 상소한다. 이것은 <고려사절요> 숙종 명효대왕편 병자 원년(1096) 기록에 나온다.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국에 세 곳의 서울이 있으니, 송악(松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이 되는데, 11ㆍ12ㆍ정ㆍ2월은 중경에 머물고, 3ㆍ4ㆍ5ㆍ6월은 남경에 머물며, 7ㆍ8ㆍ9ㆍ10월은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한 뒤 일백 60여 년에는 목멱양에 도읍한다' 하였는데, 신은 지금이 바로 새 서울에 순주(巡駐)할 시기라고 여깁니다. 지금 국가의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없으니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때로 순주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니, 이에 점술가인 문상(文象)이 그 말을 따라 화답하였다.
이어지는 숙종 명효대왕편 신사 6년(1101) 기사에 보면, 최사추가 도성 건설을 주청하고 왕이 이에 따른다. 그렇다면 서울 도성은 1101년 건설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최사추(崔思諏)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옛 문서와 부합되니 주산 줄기의 중심 큰 맥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지형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 복원중인 중흥사의 모습 ⓒ 이상기
그리고 미수 허목이 쓴 <기언 별집>의 '고양(高陽) 산수기(山水記)'에 보면 북한산 중흥동에 들어가 산수를 감상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곳에서 미수는 고려 때 만들어진 북한산성의 흔적을 발견한다.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정(山頂)을 둘러 석문(石門)으로 된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석문을 들어가니, 반석(盤石)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절정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서울 도성은 조선 태조때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세종때 대대적으로 보완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서울 도성 북쪽의 방어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자연스럽게 논의되었다. 세조 2년(1456)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이때 네 군데 보완할 곳 중 하나로 북쪽 삼각산에 설치된 석성(石城) 즉 북한산성을 거론한다.
"경도(京都)의 사보(四輔)입니다. 대개 경도는 곧 이른바 북한산성(北漢山城)입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交戰)하던 땅이며, 고려가 3국을 통합하고 본조(本朝)가 도읍을 정한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四方)을 공제(控制)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中央)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三山)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大江]은 남을 에워싸고 서(西)에는 임진(臨津)을 두고 동(東)에는 용진(龍津)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道里)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또 석성(石城)이 호거(虎踞)하고 조시(朝市)가 기포(碁布)하며, 궁궐(宮闕)은 엄숙(嚴肅)하고, 여엄(閭閻)은 은부(殷富)하니, 진실로 만세(萬世)의 왕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북한산성
▲ 북한산성 지도 ⓒ 이상기
그러나 북한산성이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숙종 때이다. <만기요람> 군정편 3(軍政編三) '북한산성(北漢山城)'조에 따르면 1711년 이유(李濡)의 건의로 북한산성 축성을 시작한다. 이때 설치된 것이 산성과 성문, 행궁과 창고, 절 등이다. 성의 둘레는 7620보이며, 대문이 4개 암문이 10개였다. 그리고 장대가 3개이고 창고가 7개이며 크고 작은 절이 14개였다.
이때 세워진 4개의 대문이 대동문, 대서문, 대남문, 대성문이다. 대성문은 임금의 출입을 위해 대남문 동쪽에 별도의 대문으로 만들어졌다. 북문은 출입이 거의 없어 암문이 되었고, 중성문은 처음 암문으로 만들어졌다가 대서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중에 대문의 형태로 증축되었다.
▲ 4대문 중 임금이 출입하던 대성문 ⓒ 이상기
장대로는 동장대와 남장대 그리고 북장대가 있다. 북한산성 안에는 왕의 임시거처로 129칸 규모의 행궁이 지어졌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행궁은 대성문의 북쪽, 대동문의 서쪽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1999년 지표조사를 실시했으며 행궁지의 과거 모습을 알 수 있는 유구들이 대거 발굴되었다. 그래서 2007년 6월 북한산성 행궁지를 국가 사적 제479호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 삼각산 태고사 ⓒ 이상기
북한산성 안에는 또한 절이 있었는데 중심이 되는 절이 중흥사였다. 149칸이나 되었으며, 승병 지휘부에 해당하는 치영(緇營)이 있었다. 다음으로 큰 절이 태고사(太古寺)였으며 136칸이다. 태고사에는 경서(經書), 통사(通史), 당시(唐詩)의 판목이 보관되었다. 그 외 절로는 보국사(輔國寺), 진국사(鎭國寺), 부왕사(扶旺寺), 국녕사(國寧寺), 보광사(普光寺), 원각사(元覺寺), 용암사(龍巖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봉성암(奉聖菴), 원효암(元曉菴), 문수암(文殊菴)이 있다.
숙종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3개 군문으로 하여금 북한산성을 쌓게 했다. 서북쪽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문 북쪽으로부터 용암봉까지는 훈련도감에서 맡았다. 용암봉에서부터 가장 남쪽의 보현봉까지는 금위영에서 맡았다. 그리고 보현봉에서 수문까지는 어영청에서 맡아 쌓았다. 이렇게 해서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의 기본 틀이 만들어졌다.
20세기 이후 현재의 북한산성
▲ 1904년에 찍은 행궁 사진 ⓒ 이상기
북한산성은 조선말까지 그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1904년의 북한산성 행궁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행궁이 훼손되었으며 현재는 내정전과 외정전, 그리고 담장 등의 유구와 축대 등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정부에서는 훼손되어가는 북한산성을 보호하기 위해 1968년 12월5일 북한산성을 사적 제162호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1983년 8월2일에는 좀 더 넓게 북한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바 있다. 그것은 북한산이 자연생태계와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대표적인 자연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2007년 6월8일 북한산성 행궁지를 사적으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은 장기적으로 행궁지를 복원하고자하는 의도로 보인다.
▲ 원증국사 부도탑 ⓒ 문화재청
이곳 북한산성에는 이들 사적 외에도 보물과 유형문화재가 여러 점 있다. 대표적인 보물로는 태고사에 있는 원증국사 탑과 탑비가 있다. 원증국사(1301-1382)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승려로 공민왕의 왕사였다. 법명은 태고화상 보우이며 신돈에게 계를 준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고화상 보우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함께 고려시대 불교의 종통을 이은 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그 외 시도유형문화재와 시도기념물이 있는데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와 중흥사지가 있다. 금위영 이건기비는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고 있던 금위영 터를 옮긴 후 이를 기념하여 숙종 41년(1715)에 세운 것이다. 북한산성 내 대성암이라는 암자 아래에 있다. 그리고 중흥사지는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주춧돌과 축대를 토대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중흥사는 앞에 언급한 원증국사 외에도 대지국사 목암 찬영이 공부한 유서 깊은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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