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55944
임진왜란은 '화약전쟁'
변화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09.06.13 14:46 l 최종 업데이트 09.06.13 14:46 l 고진숙(hangval)
1.
1543년 8월 25일. 필리핀 앞바다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던 포르투칼 상선은 뜻하지 않은 태풍을 만납니다. 그들은 지독한 악천후와 사투를 벌인 끝에 표류하다 일본 남쪽 다네가시마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낯선 이방인을 만난 일본인들이 세상을 뒤바꾸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 이런 기회는 조선에게도 있었습니다.1591년에 말이죠. 하지만 두 나라의 대응은 극과 극을 달렸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겠지요. 같은 상황에 대한 다른 대처, 그것이 가져온 수많은 다른 결과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선택을 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일본, 특히 규슈지방은 애초부터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뒤늦게 편입한 까닭도 있겠지만 매우 개방적인 곳인가 봅니다. 섬마을 해양민족 특유의 호기심을 가진 이곳 주민들은 즉시 포르투칼 상인들을 자신들의 도주인 도키타가에게 인도합니다. 도주 도키타가는 벽안의 상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도주답게 새롭고 낯선 물건에 눈길을 멈춥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 그것이요? 그것은 화승총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대화는 손짓 발짓을 섞은 바디랭귀지였겠지만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대화였습니다. 왜냐하면 도주는 즉시 두 개의 총을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포르투칼 상인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만나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으니 아마 도주가 천국의 사자 정도로 여겨졌나봅니다. 한껏 상기되어 내친김에 '화약 만드는 법'까지 알려주었으니까 말이죠.
그동안 일본은 백방으로 이 '화약제조법'을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화약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나라인 중국과 조선은 모두 이 제조법 자체가 국가의 일급비밀사항이었습니다.
'중앙집권형 왕권국가'라는 두 나라의 공통점은 그만큼 반란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조법이 일급비밀이었고, 국가가 지정한 곳에서 국가가 지정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도록 한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요. 경쟁 없는 기술개발. 그것은 정체 그 이상의 무서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이 '화약'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요?
화약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아시다시피 중국입니다. 중국의 도교 선인들은 '불로장생'의 명약을 만들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했는데 이것이 이후 동양의 화학이 서양을 수천년간 앞서나가게 한 비결이었습니다. 이때 우연히 만들어진 '화약' 제조비법은 다시 '금'을 만들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하는 서양의 연금술사들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들도 도교의 선인들처럼 '비법'은 숨겨질 때 제 맛이라는 금단의 열매에 대한 규칙을 잘 지켰습니다.
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은 1242년, 영국입니다. 기록을 남기려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그 파괴력에 괴로워했던 영국의 승려 로저 베이컨은 이 화약의 제조비법을 감출수도 드러낼 수도 없는 딜레마에 괴로워합니다. 인간적 고뇌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암호였습니다. 그것은 꽤 괜찮은 타협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화약이란 '이단적 연금술'의 증거를 숨김으로써 종교재판의 칼날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1313년에 호기심 많은 독일사람 베르톨드 슈와르츠가 암호를 풀면서 서양은 순식간에 화학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동아시아처럼 지정학적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은 서양은 수많은 왕가와 성주들이 자신들의 힘과 위엄과 명예를 뽐내느라 날 새는 줄 모를 때였기에 '화약'은 너무도 소중한 보물이었던 것이지요.
세상을 지배할 열쇠를 손에 쥐려는 그들에게 상인들의 유혹은 달콤했습니다. 상인과 성주의 후원아래 어두침침한 실험실에선 날마다 새롭게 화약성능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불과 100년도 못 되어 서양의 화약기술은 동양을 뛰어넘었습니다. 화학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중국과 조선에서 그토록 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화약제조비법을 일본이 갖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들로서는 오히려 행운이었던 셈입니다. 서양의 앞선 기술을 전수받은 셈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임진왜란은 동서양의 '화약전쟁'이라고 부릅니다.
2.
도주 도키타가는 두 자루의 총을 앞에 두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언제나 재앙만 가져오던 태풍이 데려 온 이 선물의 가치를 잘 알았기 때문이겠지요. 때는 바야흐로 막부시대 말기. 게다가 일본은 철의 나라라고 할 만큼 풍부한 철광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산이 가져다준 보상품 이라고나 할까요?
도키타가는 즉시, 눈썰미 좋은 대장장이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총이란 것이다. 만들 수 있겠느냐?"
대장장이는 수대에 걸쳐 내려온 장인집안의 후계자답게 날카로운 감각과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해보겠습니다."
대장장이는 총을 즉시 분해해서 그 구조를 연구했습니다.다시 조립하고 분해하고를 거듭한 끝에 총의 제작에 성공했을 무렵엔 일본 본토는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전쟁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총은 즉각 도키타가가 충성을 맹세한 시마즈 가문에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시마즈 가문은 곧 전국시대의 유력가문으로 발돋움했고, 칼과 활의 싸움이었던 내전은 화약전쟁으로 변했습니다.
이 전쟁은 화약무기의 성능개발과 대량생산체계를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평지 전술'도 개발시켰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조선을 초토화시킨 전술로 평지에선 절대무적이었습니다(이 전술은 조총이 장전할 때 걸리는 시간동안 상대의 공격에 무력하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세열이 한조로, 각각 앞열이 쏘는 동안 뒷열이 장전하고, 뒷열이 쏘는 동안 앞열이 장전하는 방식입니다. 이 조총부대는 연발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약점이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영민한 곽재우는 조총의 발사간격을 계산하여,수풀속에 숨었다가 장전하는 동안 냅다 뛰고,다시 수풀속에 숨었다가 벌떡 일어나 화살을 쏘는 방식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이 화약무기와 전술에 대한 자신감은 곧 조선 출병을 결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조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1591년에 대마도주는 두 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시달릴 일이 걱정되었던 터라 일본에 들렀다 돌아가는 통신사 편에 '두 자루의 조총'을 바쳤습니다.
선조임금과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이 두 자루의 조총을 앞에 두고 근심했습니다. 새로운 이 무기가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경험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3.
1555년, 을묘왜변은 변화된 세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 앞에 백기를 들었고, 세종임금의 유화정책에 따른 공식무역로의 개설로 명분을 잃었으며, 일본 내부의 상황으로 겨를이 없었던 왜구들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나타난 왜구들은 놀랄만한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시마즈 가문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조총이었지요.
태종시대까지도 왜구는 극성이었지만 그들의 공격을 막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빠른 배를 몰고 있긴 하지만 고작해야 활과 칼을 들고 설치는 그들을 향해 해안가에 미리 준비한 '화포'만 펑펑 쏘아대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총을 든 왜구는 달랐습니다. 날렵하게 요리조리 포탄의 둔중한 움직임을 피한 뒤 해안가에 무사히 상륙하거나 느린 조선의 배 위에 가까이 다가서기만 하면 화포는 무력해졌습니다. 조선으로서도 새로운 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지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화포를 대량으로 탑재할 수 있는 판옥선이었습니다. 그리고 화포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크기순서대로 '천지현황' 총통이 만들어져 사거리와 속도를 다양화하였습니다. 왜구에게 시간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사실, 왜구는 더 조선을 괴롭힐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도 화약무기를 더 개발할 수 있었겠습니만 역설적이게도 왜구의 활동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남해안을 무대로 동아시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왜구 대장 오초쿠는 명나라에서 안락한 삶을 보장받아 귀화해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오초쿠의 안락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명나라는 시간을 두고 오초쿠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버렸고, 바다 사나이 오초쿠가 명나라의 기름진 음식에 익숙해져버렸을 무렵, 그에게 덧없는 형장의 칼날만이 남겨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림으로써 일본의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1591년, 통신사가 갈 때까지 말입니다. 대신 골칫덩이들은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두만강에 얼음이 끼기 시작하는 겨울만 되면 넘어와 식량을 뺏아가고 마을을 불질렀고,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모든 조선의 장수들은 무과에 합격하면 두만강변에서 근무해야 하는 의무 규정이 생겼고, 이곳에서 공을 세운 이일,신립은 국민적 영웅 취급을 받았습니다.
말 탄 날쌘 여진족을 물리친 무기, 그것도 역시 화약무기인 '승자총통'이었습니다. 화포따위는 그 날렵한 여진족을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긴 김지는 1579년에 개인용화기인 승자총통을 개발합니다. 이 총통은 옮기기 쉽기 때문에 여진족의 뒤를 쫓으면서 사용할 수 있었고,총통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는 그 소리에 놀란 말이 날 뛰는 바람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총통은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전멸시키며 북방의 주도권을 압록강 이북의 여진족,즉 만주족의 누르하치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하였으니,바야흐로 '화약무기 전성시대'가 아닐 수 없지요(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린 무기는 포르투칼에서 만든 대포인 홍이포 즉 불랑기포였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를 알턱이 없는 조선은 두자루의 조총을 앞에두고 근심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그때,이 모든 근심을 한방에 날려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립'장군입니다.
"조총이 쏜다고 다 맞는 건 아니지요!"
이 호방한 말에 모두의 얼굴이 펴졌습니다. 여진족이 그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린다는 '신립'장군이 아닌가. 그 공로로 부마의 자리까지 오른 국민적 영웅의 자신감은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이 소문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혹시 싶은 마음에 성채를 다시 복구하려는 지방관들은 목이 달아날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신립장군이 있는데 왜 성을 고치느라 백성들을 고달프게 한단 말이오?"
이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버렸습니다. 그 뒤는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4.
임진왜란이 화약전쟁이란 것을 미리 깨달은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이순신과 같은 사람들. 또,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화약전쟁이란 것을 깨닫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변이중과 권율, 그리고 이장손입니다. 아시다시피 변이중은 화차를 이용하여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인물입니다. 바로 영화 <신기전>으로 화제가 된 '화차'와 거북선의 원리를 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신기전은 엄밀히 말하면 살상무기는 아닙니다. 그 소리의 요란뻑적지근함에 비해 파괴력도 적고 화약소모도 많은 편이라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구에게 신기전을 쓴다는 것은 놀라게 하려는 목적 이외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고, 그나마도 한 두 번이지 곧 면역이 됩니다. 그래서 신기전은 통신용으로 쓰거나 궁중에서 불꽃놀이를 할 때 쓰는 지극히 주변무기입니다.
화차는 말 그대로 이동식 다연발탄입니다. 특히 행주산성과 같이 공성전에 유용한 무기로 거북선처럼 든든한 방패막이를 위에 둘러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쏘아대면 조총부대는 혼비백산했습니다. 조총부대는 장전시간의 약점 외에 평지용무기로 개발되었다는 약점이 있었지요. 평지에 오도카니 모여 있는 그들에게 화차공격은 매우 손쉬운 표적에 대고 쏘는 명중률 높은 공격이었습니다.
조총부대의 세 번째 약점은 바로 화약의 장전법에 있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화승총은 심지를 총 위에 꽂아놓고 그곳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비가 오면, 조총은 무용지물입니다!
영리한 권율은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수차석포'라는 특수 투석기에 '진흙덩이'를 장전해서 쏘았습니다. 진흙덩이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총부대위로 날아갔고, 이리저리 그 찰진 흙을 흩뿌렸습니다. 순식간에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임진왜란 최대의 발명품은 '비격진천뢰'라고 생각됩니다. 경주의 화포 장인이었던 이장손은 조총부대의 두 번째 약점을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습니다. 화차는 화약이 많이 들고 위험합니다. 하지만 파괴력이 크지요. 이런 파괴력을 고스란히 가진 효율적인 무기. 그것이 바로 비격진천뢰입니다.
말 그대로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 터지는 비격진천뢰의 발사에 필요한 화약의 양은 대포 한 알과 같습니다만, 그 효과는 화차한대 이상입니다. 커다란 공안에 뾰족한 철 조각을 넣고, 그 안에 화약을 심은 뒤 발사하면 그 화약이 날아가다가 혹은 날아가서 터지면서 철조각 파편을 사방으로 튀게 합니다.
고속으로 튀어나온 철조각은 부대중심으로 몰려다니는 조총부대에게 가장 치명적이었지요. 사실상, 비격진천뢰의 개발과 함께 조총부대는 평지전술을 포기,결국 왜성에 웅크린 채 게릴라전술로 변경해야 했습니다.
5.
전쟁이 한참일 때, 선조 임금은 비망기 하나를 내렸습니다.
"만일 조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겐 당상관의 벼슬을 내릴 것이다."
이 명령을 받아들었을 때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평소 손재주 좋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이 명령을 전달했을까요? 그리고 과연 이장손은 당상관의 자리에 올랐을까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어느 날, 이순신은 한편의 장계를 올렸습니다.
"정사준, 이필종, 언복, 동지, 안성. 이들에게 각별히 상을 내리셔서 감격하여 열심히 일하게 하고 모두들 다투어 본받아 만들도록 함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삼가 갖추어 아뢰옵니다."
이순신은 쇠를 다루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들과 눈썰미가 좋은 기술자, 그리고 그것을 지휘할 만한 양반과학자로 이루어진 팀을 짭니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후 자체 기술개발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노력 끝에 조총에 버금가는 '정청총통'을 개발합니다. 그리고는 다섯자루의 총과 함께 그 장계를 올립니다. 놀랍게도 그 장계의 주인공은 정사준을 제외하면 평민 이필종, 그리고 나머지는 노비신분이었습니다. 즉, 천민.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개발한 것은 돈때문이었습니다. 군대에 그것을 팔아 큰 돈을 손에 쥘 요량이었던 것이지요. 수많은 발명과 발견은 과학 기술자의 사명감만이 아니라 돈과 명예를 좇아 이루어졌습니다. 적어도 조선에서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전쟁 중이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은 무려 7년이나 끌었으니까요.
아마 이때 선조가 정사준에게 당상관의 벼슬을 내리고 이필종에게는 당하관이라도 품계를 내리고, 노비들에겐 양인신분과 더불어 제법 쏠쏠한 재물을 내려주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임진왜란과 그 이후 조선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잃을 것이 많은 새로운 변화를 선택하기를 거부했던 기득권자, 보수적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이 이미 쌓아 놓은 재물을 껴안고 변화라는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가는 소리에 귀를 막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장손은 여전히 화포장이라는 천민으로 세상을 마감했으며, 화포도감을 비롯한 기술직에는 명나라에서 초청된 장인, 일본군 포로 중 귀화한 사람들로 채웠습니다. 그들은 모방할 줄은 알았으나 더 나은 기술개발에 열정을 바칠 까닭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총은 개수가 늘었습니다만, 40년 후 청나라가 홍이포를 앞세우고 국경을 넘었을 때, 이미 수백년전 낡은 기술을 계속 이어받기만 하던 조선이 치른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인조 임금은 삼전도의 얼어 붙은 땅에 머리를 세 번 찧으며 항복을 선언해야 했습니다. 임금의 이마에선 붉은 피가 흘렀고, 백성들의 마음은 퍼렇게 멍들었습니다. 변하는 세상을 읽지 못한 채 낡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빠졌던 조선의 운명은 사실상 그날로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우리나라가 그 이전에 치른 그 어떤 전쟁과도 성격이 달랐습니다. 화살, 창, 돌. 구석기 시대 말에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진 도구식 무기가 사실상 종말을 고했고, 이제는 바야흐로 과학기술문명에 의해 대량 살상무기체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 다른 차원의 전쟁이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물러갔습니다만 그 이후 조선은 변화라는 세계전쟁에서 도태되었습니다. 수백만명의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역사가 가르쳐주는 진실을 외면한 아픈 대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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