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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던 당태종 어니하 빠져… 설인귀가 도와 죽을고비 넘겨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10>
중부일보 2010.03.15 남도일보 2012.02.02 00:00
어니하 현재의 모습
청석령.인근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설인귀, 연개소문에 대한 전설을 대부분 알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 유래들 또한 고구려 역사와 관련이 있다. 먼저 설인귀의 전설 한 토막을 살펴보자. 설인귀는 원래 거란인으로, 당나라군에 들어갔다. 초기에 설인귀는 요동행군부장(遼東行軍副將) 장사귀(張士貴)의 부하였는데 무예가 출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인이었기에 좀처럼 알아주지 않았다. 설인귀가 청석관을 칠 때 고구려군이 관문을 닫기 전 미리 쫓아 들어간 당나라 병사가 닫히는 문 안에 갇히려는 순간 1천여 근이나 되는 육중한 문을 두 손으로 버티어 들어간 군사가 다시 나오도록 했다.
어떤 지명도 고구려와 관련
그 후 설인귀가 연개소정의 진영에 들어가 개소정을 죽이고 청석관 문을 열어놓아 후에 건안성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장사귀는 그 공로를 자신의 사위인 하충현(賀忠顯)의 공으로 조정에 표주했다. 건안성을 함락한 후 북으로 떠나면서 장사귀는 이 사실이 드러날까 봐 설인귀를 망마대(望馬臺·현재의 개주 영안향 부근의 마을)에 남겨 말을 먹이게 했다.
갇힌 몸이나 다름없던 설인귀는 산 아래에 단을 쌓고 말떼를 지켰다 한다. 후에 이곳에 마을이 생겼고 그 마을을 망마대라 했다. 한 번은 설인귀가 말을 타고 서쪽으로 달려 어니하(淤泥河)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북쪽 기슭에 한 떼의 군사가 그곳 진펄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당 태종 이세민도 와중에 있는데, 뒤에서는 연개소문이 칼을 꼬나든 채 군사를 이끌고 이세민을 주시하면서 추격해 왔다. 이때 남쪽 기슭에 있던 설인귀는 말을 달려 강을 뛰어 넘으며 이세민을 말에 탄 채로 끌어내어 남쪽 기슭으로 던졌다. 여기에서 설인귀의 충성심과 무예를 알아본 이세민은 그때부터 그를 장수에 중용했다고 한다. 이세민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 강물이 진펄 속에서 흐른다고 하여 강 이름을 어니하라 했다.
두 번째로 답사할 때, 필자는 망마대와 어니하를 찾아냈다. 망마대는 현재 개주시 박락보진 망마대 마을 서남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고 개주시에서 지정한 시급 문화재 "망마대"라고 새긴 비석을 복원해 놓았는데 모습이 어설프다. 망마대에서 북쪽으로 4.7km 나아가면 대석교시를 눈앞에 두고 그리 크지 않은 강다리를 지나는데 이 강이 바로 어니하다. 어니하는 대석교 도시동남쪽 조구(棗溝)에서 발원하여 대석교 도시 남쪽 변두리를 지나 서남쪽으로 서하구(西河口)에서 발해로 흘러들어 가는데 지금은 이 강을 대한하(大旱河)라 부른다.
건안성 북쪽 10여km 거리를 두고 남쪽으로 당왕산을 바라보는 곳에 수십 개의 무덤 같은 언덕이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이 언덕을 타자(타子)라 부른다. 당태종의 아들 당 고종이 건안성을 칠 때 식량이 떨어지자 사흘 밤낮이나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틈을 타 병사를 시켜 수십 개의 둔덕을 쌓고 식량더미처럼 꾸며 놓아 고구려군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황량퇴(詤糧堆 또는 황량대<詤糧臺>)라고 불렀는데 근대(近代)에 속일 "황"( )자를 누를 "황"(黃)자로 고쳐 부르고 있다.
대련~하얼빈 간 국도 옆에 있는 주전(朱甸)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4km 나아가면 바로 황량퇴촌이다. 이 마을주민 고덕승(高德勝·61)씨에 의하면 원래 이 지역에 크고 작은 둔덕, 즉 타자(타子)들이 모두 72개 정도 있었는데 당왕산에서 황량퇴 마을 쪽으로 내려다보면 이 타자들은 사람 인(人)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려갔다고 한다. 그중 큰 타자의 부지는 2만㎡에 달한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 타자들을 모두 밀어서 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밀어버린 큰 타자들은 그 흔적을 지금까지 알아볼 수 있다. 원래 갯벌이었던 이곳에서 진흙을 떠서 쌓아 올린 까닭에 아직까지 예전처럼 타자 터마다 거름과 비료를 주지 않아도 곡식들이 다른 데보다 잘 자란다고 했다. 고덕승씨가 안내하는 대로 우리는 마을 안에 성씨가 당(黨)가인 주민의 집 서북쪽 모서리 담장 밖에 있는 "황량퇴비" 터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쓰레기더미 옆에 비좌만 있을 뿐, 비신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건안성 소재지 개주시
현재의 개주시는 영구시의 현(縣)급 시로, 총 면적 3천53k㎡이며 인구는 88만여 명이다. 개주에는 황금, 화강석, 대리석, 영석(瑩石), 규석(硅石), 백운석(白雲石), 색정석(色晶石), 내화토(耐火土), 철, 인 등 20여종의 광물자원이 있다. 그중 황금의 매장량은 100t에 달하며 와룡천(臥龍泉) 금광의 연간 황금 생산량만 해도 1만 냥에 달한다. 화강석의 매장량은 12억㎥에 이르며 북경 인민대회당을 지을 때도 이곳의 화강암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개주시는 50여㎞에 달하는 해안선과 갯벌 3천700여ha를 갖고 있다. 국가의 해파리 수출기지로도 유명한 이곳의 해파리 생산량은 전국의 60%를 차지하며 어류, 대하, 게, 패류 등 해산물의 연간 생산량이 10만t에 달하고 사과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역사 유적지로는 건안성터 외에도 청나라 때 세웠다는 자항사(慈航寺·개주시 동북 4km), 명 홍무 5~9년(서기 1372~1376년)에 세웠다는 종고루(鐘鼓樓·성급 중점문화재보호단위, 개주시 중심 동남쪽에 위치), 명 홍무 15년(서기 1382년)에 지었다는 상제묘(上帝廟·본명은 현정관<玄貞觀>이며 현제묘<玄帝廟>라고도 부름, 전국 중점문화재보호단위) 등 옛 유적들이 있으며 청룡산(靑龍山) 유람구, 귀주(歸州) 백사장, 연통산성(煙筒山城), 적산(赤山), 선인도(仙人島) 삼림공원 등 관광유람구가 있다.
그중 현정관은 현제묘(玄帝廟)나 상제묘(上帝廟)라고도 일컫는데 명 홍무 15년(서기 1382년)에 세워진 중국 고대의 도교사찰로서 6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개주시 서대가 북쪽 거리를 이웃해 있는 현정관은 원래 정전과 양측 편전, 그리고 종루, 고루(鼓樓) 등이 있었으나 현재 대전과 산문이 남아 있고, 대전 앞에 청 옹정(雍正) 4년(서기 1726년)에 세워진 중수비가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비석과 석각물들이 있다. 현재 현정관은 국가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돼 있다.
개주의 명칭에 대해서 개주시 정부 인터넷 사이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개주는 수(隋)나라 때 개모(蓋牟)라 불렀으며, 당(唐)나라 때 개주로 고쳤다. 요(遼)나라 때 신주(辰州)라 불렀으며, 금(金)나라 때 그대로 써내려오다 장종명창(章宗明昌) 6년 신주를 폐하고 개주로 고쳤으며 동경로에 소속됐다. 원(元)나라 때 개주를 개주로(蓋州路)로 개명했으며 동경지군(東京支郡)이라고도 칭했다. 지원(至元) 6년(서기 1269년) 개주로 강등시켰고 지원 8년(1271년)에 개주천호소(蓋州千戶所)를 설치했다. 명(明) 홍무(洪武) 4년(서기 1372년) 천호소를 폐지했다가 홍무 5년에 개주로 고쳤고 홍무 9년(서기 1376년) 개주를 폐하고 개주위(蓋州衛)로 승급시켰으며 그 아래 천호소를 두었고 요동도지휘사에 소속시켰다. 그 후 청 강희(康熙) 3년(서기 1664년) 개주위를 폐지하고 개평현을 설치하여 봉천부(奉天府)에 소속시켰다. 역사적으로 한(漢)나라 때 개현 경내에 평곽(平郭·현재의 웅악<熊岳>)현을, 금·원·명 시기에는 개주(蓋州)를 설치했는데 개평이란 명칭은 "개주"와 "평곽"의 앞에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1965년 개현으로 개칭했으며 1992년 개주시로 변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개현은 개주시에서 남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손가와붕(孫家窩棚) 부근에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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