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4.htm
* "북한의 발해사 인식 - 대륙연구소" 중 "4. 연구 동향"에서 "(3) 대외 관계"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대외관계
* "북한의 발해사 인식 - 대륙연구소" 중 "4. 연구 동향"에서 "(3) 대외 관계"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대외관계
(3) 대외 관계
발해의 대외 관계는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 및 돌궐, 거란 등과의 관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대외 관계에 관한 본격적인 북한의 발해사 논문은 적다. 다만, 박시형의 처음 글(1962)과 {발해사}(1979)에 개설적으로 쓰다가, 박영해가 1987년에 비교적 자세한 대외관계 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최근(1992)에는 김성호가 이에 가세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관심을 갖게 된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박시형의 개설적인 글 이외에서는 찾아 보지 못하다가, 김성호의 글부터 이에 대한 본격적이 관심이 표명되고 있다.
박영해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1) 당과의 국교 개시기, 2) 당나라의 흑수주설치 기도와 발해의 등주공격, 3) 북중국의 할거적인 봉건세력(치청번진)과의 관계, 4) 당과의 국교 정상화로 서술하고 있으며, 일본과의 관계는 1) 사신교환과 국교의 목적, 2) 일본과의 경제교류, 일본에 중 문화적 영향, 그리고 거란과의 관계는 약술하고 있다.
박영해의 대외관계 논문은 신라와의 관계는 당과 거란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언급되었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발해의 신라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늦었던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관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러한 경향은 남한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발해와 신라는 대립적이었다는 개설서적인 견해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양국간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이후였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신라와의 관계사는 1956년판 {조선통사}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양국이 계속 평화상태를 유지하였다고 보았고, 이로써 양국은 왕래가 빈번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어 박시형의 이러한 서술을 보다 적극화하여 양국의 교섭이 {삼국사기}보다 더 빈번했을 것이라고 하고,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의로 발해를 말살하려다가 그만 부주의하여 남기게 된 실책의 소산이라 하고, 당시 동방의 국제정세가 어떻게 되여 있었던지 간에 적어도 이백수십년간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족의 두 나라가 이와 같이 몰교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도 하여 교섭이 빈번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발해사}(1979)는 {삼국사기} 보다는 좀더 왕래가 많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동족인 두 나라가 수백년간 내왕이 매우 적었다고 하고, 그 이유는 전적으로 7세기 중엽 이후 심한 사대주의외세의존 정책에 매달린 신라봉건 통치계급들의 죄악의 결과라고 하였다. 대립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양국의 관계는 매우 빈번했던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장상렬은 발해의 건축이 근본적으로는 고구려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신라건축과의 공통점도 있음을 밝혀 양국의 교섭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즉, 발해 건축에 통합신라 건축의 공통성도나타나는데, 성시와 건축계획, 돌쓰는 솜씨, 자[尺]와 건축부재 등이 그것이며, 이들을 살펴보면 양국의 기술 발전 수준이 대등하였으며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고고학개요}에서도 이어져 그들은 언어와 풍습이 같은 한겨레로서 화목하게 살았으며 접촉과 교류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이 같은 문화를 이어 받은 사정과 함께 두나라 문화의 공통성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양국의 교섭 사실은 기록상으로는 발해와 신라양국간에 신라도(新羅道)가 있었다는 {신당서} 기록을 포함해서, 신라의 정천군으로부터 발해의 책성(柵城)까지에 걸쳐 39개의 역이 있었다는 가탐의 {고금군국지}를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는 장상렬의 지적이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최근 러시아에서 발굴된 봉황이 있는 기와무늬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입증이 되었다.
한편,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기록은 {협계태씨족보}이다. 여기에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 무왕 19년 봄 2월에 발해 수군이 출동하여 신라군사와 합세하여 일본병선 300척을 물리쳤다고 하며, 발해 원왕(元王)[大虔晃] 8년에 황룡사 탑이 무너졌다고 발해에 알렸다고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본기)가 성덕왕 30년(731)과 경문왕 8년(868)에 일본병선이 침입했다는 내용과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에 대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 같다. 아울러 이것에 근거하여 김성호는 남북국사에서 신라는 발해를 '섬기는' 입장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앞으로 이 귀한 족보의 사료적 가치는 다시 한번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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