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남자들, 뜨는 별들의 뒷이야기 - 오마이뉴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41963

정조의 남자들, 뜨는 별들의 뒷이야기

[사극으로 역사읽기] 과감성으로 떴지만, 중용 잃고 사라지기도

08.02.24 13:15 l 최종 업데이트 08.02.25 11:38 l 김종성(qqqkim2000)

▲  정조의 즉위를 축하하는 예포. 드라마 <이산>에서. ⓒ MBC

영조의 시대가 마감되고 정조의 시대가 개막됐다. 정조의 치세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앞 시대의 연장이지만, 통치자가 바뀌었다는 점에서는 새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 같은 권력 교체기에는 반드시 '뜨는 별'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도 뜨는 별들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뜨는 별'이라고 하여 반드시 도덕적으로 우월하리란 법은 없다. 을사늑약이나 5·16을 계기로 뜬 별들이 죽은 뒤에 두고두고 도덕적 지탄을 받는 걸 보면, 뜬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뜨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래도 '뜬다는 것'은 뜨는 그 순간만큼은 일단 기쁘고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 즉위를 계기로 뜬 별들은 누구였을까? 여기서는 그동안 이 연재 코너와 드라마 <이산>을 통해 많이 알려진 이들 중에서 세 명만 소개하기로 한다. 아래의 프로필은 정조 즉위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홍국영] 얼굴은 준수했으나 성품은 안 준수했다

1748년생. 1771년(23세) 문과 급제. 승문원 부정자(종9품), 세자시강원 설서(정7품) 및 사서(정6품) 등 역임. 정조 즉위 당시(28세)에는 훈련정. 

외척 문중의 일원으로서 영조의 총애를 받아 과거 합격 직후부터 국왕과 세손을 보좌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를 '조선의 공식 지정 미남'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은 영조 48년(1772) 9월 21일자 <승정원일기>에서 그의 외모를 두고 "매우 준수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국영은 언변도 훌륭한 편이었다. 

▲  권세를 잡은 홍국영. 매끈한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져 있다. <이산> 제46회 예고편. ⓒ MBC

정후겸·홍인한·김귀주·홍상간·윤양로 등을 밀어내 이산의 등극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홍국영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즉위 직후에 동부승지(정3품)로 특진했고 이후 도승지(정3품)로서 윗사람들인 3정승을 '거느리게' 된다. 이른 바 '세도정치'의 원조가 된 것이다. 사실상 '소통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그의 외모와 언변이 준수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준수하지 못한 편이었다. 욕심이 너무 많았다. 정조 즉위 2년 뒤인 1778년에는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 홍씨)으로 앉히더니, 원빈이 1년 만에 사망하자 원빈의 양자 완풍군(상계군으로 개칭)을 국왕의 후계자로 삼아 세도를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욕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1780년에는 효의황후(고종 때 시호)를 독살하려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도리어 정치적 화를 당하고 말았다.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낙향하게 된 것이다. 권력의 실세가 된 지 4년만의 일이었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명퇴'를 당한 그 울분을 참지 못해 화병을 앓다가 결국 이듬해인 1781년에 사망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불과 4년 만에 정조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효의황후 독살미수 때문이었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주군의 통치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것을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조의 탕평정치 대신 자신의 세도정치를 확립하려 한 인물이었다.

홍국영은 정조가 어디까지 가는 줄도 모르고 그와 끝까지 함께 갈 생각으로 정조에게 '차비'를 빌려주었다. 하지만, 정조와 홍국영이 함께 갈 수 있는 거리는 딱 네 정거장(4년)뿐이었다. 할 수 없이 홍국영은 네 번째 정거장에서 하차했고 정조는 그로부터 스무 정거장을 더 갔다. 그들은 처음부터 갈 길이 달랐던 것이다. 

[서명선] '인생은 한 방'... 매년 12월 3일 정조가 기억하는 남자

▲  서명선의 편지. ⓒ 국사편찬위원회

1728년생. 1763년(36세) 문과 급제. 홍문관교리·강원도관찰사·대사성·대사헌·승지·이조참판 등 역임. 정조 즉위 당시(48세)에는 이조판서.

서명선은 일처리가 빠르고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영조 재위 시기에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문과 급제 이듬해인 1764년에는 홍문관 관원들이 올린 상소가 영조의 미움을 사서 일시적으로 유배를 당했고, 정조 즉위 1년 전인 1775년에는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영조 시대에 그가 상당한 관직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우여곡절이 많은데다가 본인 스스로 은인자중하는 편이어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는 막판에 선택을 잘했다. '홈런타자' 홍인한의 압박으로 세손이 위기에 처한 '9회말 2사 만루의 역전 위기' 상황에서 '2진급 투수'였던 그가 전격적으로 구원 등판해 '삼진'으로 깨끗이 마무리한 것이다. 

홍인한에 대한 비판 상소문을 올릴 사람을 홍국영이 찾아 나섰을 때에 처음에는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홍인한의 권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미친 척' 하면서 홍인한 비판 상소문을 올려 정계에 일대 충격을 주는 동시에 영조 임금에게 홍인한 파면을 위한 명분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서명선이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대리청정 시기에는 예조·병조·이조판서를 지냈고, 즉위 후에는 수어사·총융사로서 병권을 장악한 데에 이어 우의정·좌의정·영의정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정조 즉위 이후에 그가 누린 권세는 신숙주·한명회에 비견될 만했다고 <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결정적 순간의 한 방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셈이다. 홍국영이 조기 하차한 것에 비하면, 그는 이후에도 별다른 굴곡 없이 권세를 유지했다. 홍국영과 달리, 그는 그 '한 방'을 끝까지 소중하게 다룬 사람이다.

정조가 그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는, 그가 홍인한 비판 상소문을 올린 12월 3일을 기념해서 매년 그 날짜만 되면 정조가 서명선·홍국영·정민시·김종수 등을 불러 특별 파티를 열어준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모임은 동덕회라고 불렸다. 

정조 15년(1791)에 그가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정조가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서명선은 그처럼 정조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채제공] 영조가 강추한 신하... '사도세자의 원수는 내가 갚는다'

▲  채제공 역 한인수 ⓒ MBC

1720년생. 1743년(24세) 문과 급제. 호는 번암·번옹. 승문원권지부정자·예문관사관·충청도암행어사·동부승지·대사간·도승지·병조판서·예조판서·호조판서·세손우빈객 역임. 정조 즉위 당시(57세)에는 호조판서.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채제공의 이미지는 충직하고 신중하며 과묵하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는 충직성 외에 과감성·강성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는 영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1758년 영조가 세자 폐위의 비망기(왕이 승지에게 내린 명령문서)를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철회시킨 인물이 바로 채제공이었다. 

이 일을 두고 훗날 영조는 손자 이산에게 "그는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며 너의 충신"이라고 '강추'했다고 한다. 영조가 그에게 세손우빈객(세손에게 강의하는 직책)을 맡긴 것도 그에 대한 강력한 신임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채제공에게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에 걸쳐 일관된 충성을 바쳤다는 점이다. 그는 단순히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친 정도가 아니라 '대·대'를 이어 충성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정조 즉위 이후에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했다. 정조 즉위 16일 뒤인 1776년 5월 13일 형조판서에 임명된 채제공은 그때부터 사도세자를 위한 복수에 착수한다. 사도세자의 죽음 문제를 다루면서 그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그러나 1780년에 홍국영의 세도가 붕괴하고 서명선 내각이 성립하자, 홍국영과의 친분뿐만 아니라 사도세자 재평가 작업에서 드러낸 과격성이 문제가 되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으며, 이후 8년간이나 한성 근교에서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홍국영과 함께 그도 물러난 것이다. 물론 1788년에 정계로 복귀하긴 했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과격한 충성심'은 그 자신에게 반대파의 공격이 집중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과감한 지원으로 정조 시대 열었는데...

지금까지 정조 즉위를 계기로 '뜨는 별'이 된 세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과감성이다. 세력가 홍인한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과감히 세손을 지원함으로써 정조 시대를 여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3인의 운명은 정조 즉위 이후에 엇갈렸다. 홍국영은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중도하차한 데 반해, 서명선은 큰 우여곡절 없이 정조를 보좌했고, 한편 채제공은 정조 시대에 권세를 유지하긴 했지만 과격성 때문에 8년씩이나 정계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여기서 홍국영과 채제공이 '아주 영원히' 혹은 '한때나마' 권력에서 밀려난 것은 그 두 사람이 중용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제공은 결국 돌아왔고 홍국영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홍국영은 개인적 욕심 때문에 중용을 잃은 데에 비해 채제공은 주군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중용을 잃고 말았다. 똑같이 중용을 잃었지만, 그 원인은 달랐다. 정조가 홍국영은 죽도록 내버려두고 채제공은 8년 뒤에 다시 불러들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