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92892
희대의 망나니 임해군, 동생을 왕으로 만들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 ②
13.08.05 16:38 l 최종 업데이트 13.08.05 16:38 l 김종성(qqqkim2000)
▲ 임해군(이광수 분). ⓒ MBC
조선 제14대 주상인 선조는 후계자 선정 문제에서 아들들 간의 위계질서를 지나치게 중시했다. 그는 서자보다는 적자, 차남 이하보다는 장남을 우선시하는 적장자 우선주의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그가 이 원칙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는 죽기 직전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적자가 없는 상태에서 광해군이 자신을 대리해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능력을 입증했으므로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게 누가 봐도 이치에 맞았다.
그런데 임종 직전까지도 선조는 '서른 살이 넘었지만 서자'인 광해군과 '갓난아기이지만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어떻게든 적장자를 후계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이 갓난아이가 아니었다면 선조는 주저 없이 영창대군의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조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영창대군이 광해군을 제치고 제15대 주상이 됐을지 모른다.
선조가 다른 왕들에 비해 적장자 우선주의에 유별나게 집착한 것은 그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선조는 왕의 적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의 서자도 아니었다. 왕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조는 왕의 서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아들이었다.
'왕의 아들이 다음 왕이 된다'는 관념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왕의 서자의 아들'인 선조의 입장은 극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처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의 처지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 그가 적장자 아닌 왕자들을 유별나게 박대한 것은 이런 콤플렉스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선조의 콤플렉스대로라면, 서자 중의 장남인 임해군에게 좀 더 기회를 주었어야 했다. 적장자 우선주의를 고수한 선조가 서자 중의 장남인 임해군보다 서자 중의 차남인 광해군에게 좀 더 기회를 준 것은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해군의 행적을 보면, 선조가 임해군을 냉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식들 간의 위계질서에 과도하게 집착한 선조가 보기에도 임해군은 그런 냉대를 받을 만한 아들이었다.
누가 이 사람을 왕자로 볼까?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의 임해군(이광수 분)은 야비하고 탐욕스러우며 무책임한 왕자다. 드라마 속의 임해군은 누가 봐도 왕자의 품위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드라마 속의 임해군은 실제의 임해군에 비하면 그나마 '귀여운' 편이다. 실록에 기록된 임해군의 행적을 읽다 보면 '뭐 이런 게 다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임해군은 한마디로 망나니였다. 선조 39년 8월 23일자(1606년 9월 24일자) <선조실록>을 포함한 몇 군데의 실록에 따르면 그는 민간인을 함부로 구타하고 살해했으며 남의 토지와 노비도 마음대로 강탈했다.
심지어 그는 측근들을 시켜 민가의 닭과 돼지까지 빼앗았다. 무시무시한 악행뿐만 아니라 좀스러운 악행도 저질렀던 것이다. 그는 필요할 때는 사기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왕자의 품위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임해군은 조직폭력배 두목 같은 인물이었구나'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직폭력배' 부분은 맞지만 '두목' 부분은 틀리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선조 25년 4월 14일자(1592년 5월 24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실록>을 보충하고 수정한 실록이다.
이에 따르면 임해군은 성질이 거칠고 학업을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하인들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하인들에게 자율권을 지나치게 많이 주는 바람에 하인들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자율권을 너무 많이 주는 것 자체도 리더십 부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임해군은 왕자였지만, 리더는 아니었다. 조직폭력배 행동대원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임해군은 왕실이나 국가 또는 관료의 재산에까지 손을 댔다. 선조 39년 8월 24일자(1606년 9월 25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지방에서 서울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강탈하기도 했다. 산적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 그는 지방 군수가 한양을 방문하면 수행원을 붙잡아두고 군수를 협박해서 재물을 갈취하기도 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위 날짜의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임해군에게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지시하자, 백성들이 거리에 뛰어나와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임해군의 비행과 그에 대한 원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임해군은 나쁜 짓만 한 게 아니라 바보 같은 짓도 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일본군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왕자가 적군의 인질이 됐으니 조선 측의 전쟁수행능력에 지장이 초래됐음은 물론이다.
임해군은 자신이 전쟁 중에 포로가 됐다는 점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려 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임진왜란 이후에 저지른 불법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전방 지역인 평안도·함경도에서는 지방관이 자기 지역의 관기와 동거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임해군은 임진왜란 때 만난 평안도 기생을 한양에 데려와 수년간 동거했다.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사실은 잊고 싶어 하면서도, 그때 만난 관기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 중의 실책도 망각한 채 그는 아주 무책임하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을 괴롭히며 살았으니, 그는 그야말로 희대의 망나니였다.
광해군의 적들은 임해군을 편들었을까?
▲ 광해군(이상윤 분). ⓒ MBC
이런 의문을 품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편찬됐으므로, 임해군을 제치고 왕이 된 광해군이 임해군에게 불리한 내용만 거기에 수록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염려는 전혀 없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정권에서는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인조의 아들인 효종 때 완성됐다. 효종 때 완성된 기록을 <선조수정실록>이라 한다.
만약 임해군에 관한 <선조실록>의 기록이 악의적인 거짓이라고 판단됐다면, 인조 정권이나 효종 정권의 인사들은 <선조수정실록>에서 그런 내용을 삭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삭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선조실록>에 없는 기사까지 추가로 삽입했다. 위에서 소개한 선조 25년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실록>에 없는 기사를 추가한 것이다. 이것은 광해군을 몰아낸 사람들의 눈에도 임해군이 매우 한심한 악당으로 비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임해군의 비행이 조금만 덜했다면, 선조는 서자 중의 장남인 그에게 기회를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해군의 비행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그래서 자식들 간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선조로서도 도저히 장남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선조는 임해군과 광해군 둘을 놓고 평가할 때만큼은 위계질서보다 능력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임해군은 형식주의에 빠진 선조가 제한적이나마 능력주의를 고려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이렇게 보면 임해군은 광해군의 왕위 등극을 도운 조력자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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