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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우수리스크 발해유적
주블라디보스톡총영사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우수리스크시는 1966년에 러시아 이주자들에 의해 형성된 니꼴스꼬예(Nikol'skoe) 마을에서 비롯되었는데, 지금은 인구가 20만 명이 안 되는 도시이다. 이곳에는 1만 년 내지 1만 5천 년 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고, 발해 때부터는 역대 왕조의 중요 행정구역의 하나였으며, 러시아인들이 들어올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중국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도시 이름은 그동안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혼동되기 쉽다. 1898년까지는 니꼴스꼬예, 1926년까지는 니꼴스크, 1935년까지는 니꼴스크-우수리스크(Nikol'sk-Ussuriisk), 1957년까지는 보로쉴로프(Voroshilov)로 불리다가 그 이후로 현재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이곳을 쌍성자라고 불렀다. 도시 가운데에 두 개의 평지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두 개의 성이 있다는 것은 이미 17세기 청나라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시가지로 변하여 그 면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하나는 도시의 서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으며, 서로 대략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출토되는 유물들로 보아 이들은 금나라 때에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유즈노 우수리스크 성터의 아래층에서는 발해 문화층이 확인되어 여진인들이 발해시대의 성을 재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유즈노 우수리스크 성터의 북벽과 성벽이 거의 허물어져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확인하기도 어렵다. 다행히 북벽을 따라 해자가 아주 잘 남아 있는데, 너비가 10m 이상 되는 커다란 해자 속에는 물이 아니라 집 몇 채가 들어 있었고 채마밭도 일구어져 있다. 19세기까지의 기록을 보면 이 성은 평면이 직사각형에 가까웠고, 남북 길이는 1,200m, 동서 너비는 350m 정도였다. 성벽은 대략 6.3m 의 높이로서 옹성이 달린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28개의 치가 남아 있다.

바로 이곳이 발해 15부의 하나였던 솔빈부 자리이다. 성 남쪽에 흐르는 라즈돌나야(Razdol'naia) 강이 얼마전까지도 수이푼(Suifun) 강으로 불렸던 데서도 증명된다. ‘수이푼’이란 ‘솔빈’이란 발음이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흘러오는 이 강을 그 곳에서는 지금도 수이훤허라고 부르고 있다. 금나라 때에는 이곳이 휼품로였는데 역시 솔빈이란 발음이 변한 것이다. 샤프꾸노프는 이 부근에서 발견된 돌에 새겨진 문자를 해독하여 여기에 솔빈(Suibing 또는 Shuaibing)이라는 돌궐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돌궐 문자 전공자들은 회의적이다.

발해 솔빈부는 명마의 고향이었다. 발해 때에 수이푼 강 유역의 초원에는 수많은 말무리 들이 뛰놀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해주의 발해 성터들에서 모두 말뼈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전체 가축 뼈 중에서 적게는 7%, 많게는 22.5%까지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말뼈가 발견되는 것은 이들을 부리는 데에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용으로도 이용하였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말은 중국에도 수출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에 말을 보냈고, 발해가 멸망한 뒤에 세워진 동단국에서도 거란에 1천 필씩이나 바쳤다. 또한 당나라 후기에 산둥반도를 거점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던 이 정기는 해마다 발해 명마들을 사가서 자기 세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 사람은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서 당나라가 쇠퇴해 갈 무렵에 이곳의 번진세력으로 활약하였던 유명한 인물이다.

유즈노 우수리스크 성터 남쪽의 공원 안에는 절터가 하나있다. 1954년에 자벨리나(Zabelina)가 이곳을 발굴하여 발해 때의 것으로 추정하였지만, 지금은 12∼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주춧돌이 발해 상경성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 앞으로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발해의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아주 큰 곳이다. 주춧돌 부근에는 절의 본전 자리로 보이는 언덕이 솟아 있다.

이곳으로부터 더 남쪽으로 가서 수이푼 강을 건너가면 끄라스노야로프(Krasnoiarov)산성이 있다. 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있는 이 성은 누구에게나 천연의 요새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으로, 산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쪽은 허허벌판처럼 드넓다. 성의 평면은 불규칙한 형태로서 내성, 외성, 동남성의 3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은 전체길이가 8km 이상 되는데 일부에서는 두 겹 내지 세 겹으로 되어 있다. 내성에서는 1950년대에 몇 개의 건축물 자리를 확인하였는데 주춧돌이 100개 정도나 되었다고 하며, 내성 주위에는 지금도 호를 돌렸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일찍이 1910년대에 장도빈이 송왕령에 있다는 이 성을 답사하여 발해 동경 자리로 추정하였다. 당시에 조선인들이 지금의 수수리스크를 송왕령, 소왕령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 중에는 발해의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금나라 때의 성으로 여기고 있다. 앞으로 이 성을 비롯하여 우수리스크 시에 있는 3개의 성들에 대해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이들의 연대가 보다 확실해지고, 발해 솔빈부의 실체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도시는 교통의 요지이다. 사방으로 철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남쪽으로 블라디보스톡 항구까지 이어지고, 북동쪽으로 우수리 강을 따라 하바로프스크까지 통하며, 서쪽으로도 만주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 치따(Chita)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끄라스끼노를 거쳐 북한과도 접촉되어 있다.


발해 절터들

발해 솔빈부 관할 지역이었던 우수리스크 시 주위에서도 발해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이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서 발해 시대의 절터 두 곳이 확인되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몇 개의 마을을 거치게 되는데, 처음에 도달하는 보리소프까(Borisovka) 마을 부근에는 또 다른 발해 절터가 있다. 지금은 그 위치조차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두 개의 금동 불상은 모두 아래에 작은 막대가 달려 있어 제단에 꽂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절터 옆에서는 절에 예속되어 있던 농부와 수공업자들의 주거지도 발견되었다.

그 다음 마을인 꼬르싸꼬프카(Korsakovka) 마을 부근에서도 초기 철기 시대 유적과 함께 발해 시대의 취락지가 발견되었다. 1981년에 발견되어 곧바로 발해 연구자인 볼딘이 발견한 취락지는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끄로우노프까(Krounovka) 강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반 움집의 건물 자리와 함께 온돌 장치가 발견되었고, 집 자리 주위에서 저장구멍들도 확인되었다. 저장구멍에는 발해인들이 저장하였던 여러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서는 쟁기에 달았던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출토되었다. 그 모양은 마치 뒷축이 없는 장화 같다고 한다. 이러한 발해 보습은 상경성을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발해 사람들이 소를 부리며 논밭을 가는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1988년에는 이곳에서 막새기와가 하나 발견되어 절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와당에는 4개의 연꽃잎이 십자형으로 배치외어 있고, 그 사이에 새가 한 마리씩 부조되어 있다. 샤프꾸노프가 최근 논문에서 이 새는 불사조로 알려진 봉황새이고, 4개의 이파리는 연꽃이 아니라 봉황새가 먹는다고 하는 죽순이라고 주장하였다. 연꽃 사이에 새를 부조한 막새기와는 1990년 7월에 중국 길림성 교하시 천강진 발해 건축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더 나아가면 끄로우노프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4km 떨어진 끄로우노프까 강가에서 1968년에 여러 시기에 걸치는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 제일 윗 층에서 발굴된 주거지들은 초기 철기 시대의 끄로우노프까 문화[과거의 차삐고우(chapigou) 문화]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문화는 두만강, 수분화, 목릉하 유역과 연해주에 분포되어 있는데, 중국학자 린윈은 그 시기를 대략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 후 1세기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를 단결문화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 문화를 단결-끄로우노프까 문화로 부르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우리 역사에 보이는 북옥저인들이 남긴 자취가 바로 이것이다.

한편 아브리꼬스 마을에서는 한 민가의 마당에 세 가지 유물이 놓여 져 있다. 연자방아 돌같이 둥글 넙적한 판석, 기둥의 일종인 활주를 받쳤거나 아니면 여닫는 문의 돌쩌귀로 보이는 구멍 뚫린 돌,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통형 돌이 그것인데, 모두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현재로서는 어느 시기의 것인지 단정하기는 곤란하지만 가까이에 발해 절터들이 있고, 더구나 정영호 선생의 견해에 의하면 60cm가 되는 원통형 돌 위에 새겨져 잇는 8개의 연꽃잎 장식은 고구려적인 것이라고 하니, 발래 사원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민가를 떠나 마침내 두 개의 발해 절터에 다다랐다. 과거에 차삐고우 강이라고 불렸던 끄로우노프까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꼬쁘이또(Kopyto) 산과 왼쪽에 아브리꼬스(Abrikos) 산이 평지에 솟아 있고, 각각에 두 절터가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1956년에 우수리스크 시에 살던 지지학자 꼬쁘이또 절터의 존재를 알려옴으로써 2년 뒤에 샤프꾸노프가 발굴에 착수하였는데, 이것이 연해주 발해 유적에 대한 최초의 계획적 발굴이다. 또한 이 발굴 과정에서 아브리꼬스 절터도 확인되어 1960년에 역시 발굴되었다.

꼬쁘이또란 말발굽이란 뜻으로 산의 형태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이 둥그스름하면서 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다른 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것을 두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절터는 정상의 평탄한 면에 있는데, 건물 자리는 거의 정사각형이다. 우거진 풀숲을 헤치며 산에 오르니 사방이 훤히 트여 보였고, 정상의 평지에는 몇 년 전에 발굴하였던 도랑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이곳으로부터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내려가는 북서쪽 모퉁이에 절 입구가 있었다고 보고서에 적혀 있으나, 나무가 우거져 그 흔적을 찾지 못한다. 이 절은 8세기쯤에 해당되는 것으로 연해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 절이 마침 화재를 입게 되자 발해인들은 북서쪽으로 500∼700m쯤 떨어져 있는 강 건너의 아브리꼬스 산으로 자리를 옮겨 절을 다시 지었다. 이때 꼬쁘이또 절터에 있던 온전한 기와들을 가져다가 새 절을 짓는 데에 다시 사용하였던 사실이 조사 결과 드러났다. 절 건물은 북쪽 경사면에 형성된 낮은 대지 위에 지었는데 정면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다. 아브리꼬스란 살구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발국 당시에 이 산에 살구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산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발굴 당시에 이곳에서는 모두 22개의 주춧돌이 확인되었고, 각종 도자기, 기와, 불상들도 발견되었다. 기와 중에는 지붕 용마루에 설치하였던 치미도 포함되어 있다. 발견 당시에는 산산이 부서져 있었지만 나중에 복원해 본 상상도가 박물관에 걸려 있으나 어색해 보인다고 한다. 이 절터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블라디보스톡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일부가 역사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이곳에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그마한 점토판에 마치 독일의 철십자 같은 십자가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훈춘에 있는 발해 동경 자리에서도 목에 십자가를 달고 있는 3존불이 발견된 적이 있고, 역사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는 금나라 때의 도기조각들에도 이러한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경교라고도 불리는 이 교파는 당나라에서 638년에 공인되어 845년에 박해를 받을 때까지 번성하였다. 이때에 당나라로부터 발해에 유입되었던 것인지, 러시아 학자의 주장처럼 남부 시베리아로부터 전래된 것인지 아직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 종교가 발해 당시에 연해주 일대에 펴져 있었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사실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에도 경교가 들어와 있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절터 주위에서는 당시의 무덤들도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5기의 무덤을 발굴하였지만 모두 도굴되어 면모를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무덤 주인공들은 사원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던 사람들일 것이다. 부근 어딘가에는 발해인들이 살던 주거지도 있을 것이다. 끄로우노프까 강 주변에 살구나무, 벚나무, 산사나무, 배나무들이 널리 여생하고 있는 것은 발해 농부들이 이곳에 살았던 흔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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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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