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50809183344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0> 몽골, 또 다른 한국 - 프레시안"의 긴 내용 중 "(4) 또 하나의 『고려사(高麗史)』, 『원사(元史)』" 내용 일부를 가져오고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또 하나의 『고려사(高麗史)』, 『원사(元史)』
  
다음의 그림을 봅시다. 이 그림은 세계적인 대제국 몽골제국의 직할령을 표시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습 회사의 그림을 알기 쉽게 우리말로 재구성한 그림입니다.
  

대몽골 제국과 고려. ⓒ김운회  


아마 이 그림은 여러분이 항상 보아오던 지도일 겁니다. 무심코 지나쳐서 이 지도의 본질을 못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세계 모든 나라가 몽골의 깃발 아래에 있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남아있습니다. 세상은 오직 몽골과 고려만이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에 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본과 베트남·인디아는 정벌하기가 힘들어서 못했겠지만 몽골 제국의 수도(首都) 바로 옆에 있는 땅을 직할령(직속령)으로 두지 않고 자치국으로 두었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마 고교 역사부도였다면 여러분들은 으레 한국역사부도이니 한국만 따로 빼놓았겠지 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세계적인 학습회사의 그림들을 번역하고 알기 쉽게 재구성하여 붙여놓았습니다.
  
이상하죠? 왜 바로 자기의 수도 코앞에 있는 나라를 세계를 제패했던 무력을 가진 원나라가 그대로 두었을까요? 이제 그 의문을 한번 풀어봅시다.
  
역사를 꼼꼼히 보면,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일부를 보면, 1224년 원나라는 저고여(扎古雅) 등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그만 살해되고 맙니다. 그 후 원나라 태종 3년(1231) 살리타이(薩里台, 또는 撒禮塔)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이 동생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元史』208 高麗傳).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초토화(焦土化)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원나라 황제의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그 시간 이후 잿더미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살됨을 의미하는데 말입니다. 몽골은 항복하면 평화롭게 받아주지만 반항하거나 대항하면 철저히 보복하고 응징하는 특성을 가진 나라지요). 이 부분을 현재 한국의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8쪽]."
  
이상한 일이죠. 몽골 쥬신들이 반도쥬신에 대한 매우 강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나라 조정은 역대 고려왕에게 공주를 출가시켜 원나라 황실과의 혈통적인 결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나라 세조는 당시 만주쥬신(여진)들이 고려 땅을 침범하는 일이 있자 이를 엄금하도록 조치하고 관(官)으로 하여금 고려 국민을 보호하게 하고 파사부(婆娑府)에 명하여 군대를 둔전하게 하여 압록강 서부지역을 지키게 합니다(乙未, 禁女直侵軼高麗國民, 其使臣往還, 官爲護送. 命婆娑府屯田軍移駐鴨綠江之西, 以防海道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여러분도 시간이 나면 『원사(元史)』를 한번 보십시오. 이상하리만큼 『원사』에는 고려(高麗)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많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다른 어떤 사서보다도 고려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원나라는 마치 고려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와는 국교(國交)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원사(元史)』에는 신년 새해부터 고려에 대한 기사가 줄줄이 엮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와 관련해서는 조유(詔諭 : 황제가 친히 타일러 말하다), 위무(慰撫 : 위로하여 달래다), 조사(詔賜 : 황제가 친히 내리다) 등의 말들이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고려왕이 내조하면 원나라 황제는 우조답지(優詔答之 : 황제가 친히 넉넉하게 이에 보답함)합니다.
  
『원사』의 세조기(世祖紀)에서는 고려왕이 황제를 속인 죄를 범하여 이를 책망하지만 달력을 보내주었고(詔責高麗欺慢之罪 又詔賜高麗王□曆), 고려왕이 황제의 조서에 대해 답이 없자 사신을 보내어 이를 나무라는(以高麗不答詔書, 詰其使者) 장면들이 나옵니다. 원나라의 세조는 고려의 군신들이 내조하자 "고려와 원나라는 군신의 관계라 할지라도 짐이 느끼는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高麗君臣, 感戴來朝, 義雖君臣, 而歡若父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조는 중국과 친한 일본으로부터 고려를 떼어내도록 하는데 만전을 기울입니다. 마치 고려가 딴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지를 시새움하는 듯합니다. 전 세계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계의 주인 원나라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운 광경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고려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기도 합니다(高麗使還, 以王□病, 詔和藥賜之 : 『元史』卷6 本紀第6 世祖三). 뿐만 아니라 고려의 술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세금을 면해주기도 합니다(免高麗酒課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칸). ⓒ김운회

제가 보기엔 동아시아의 역사상 (고구려 이후) 원나라 때만큼 반도쥬신이 요동에서 활개를 친 예는 없었을 것입니다. 심양왕(瀋陽王) 제도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원사(元史)』에 나타난 고려 부분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했습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나타나는 고려에 대한 기록 때문에 그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지나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사』를 보면 세상엔 단 두 나라만 존재하는 듯합니다. 원(元)나라와 고려(高麗), 단 두 나라 말입니다.
  
마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반도부여(백제)사의 다른 한 편이라면 『원사(元史)』는 고려사의 다른 한편으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시콜콜한 고려의 내외 이야기들이 대부분 수록되어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마치 남녀간의 사랑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몽골은 지속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고 고려는 피하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몽골은 한족(漢族)과 가까운 것은 다 싫어하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예외였습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습니다. 『원사(元史)』를 보시죠.
  
"천하를 가진 자 가운데 한(漢)나라·수(隋)나라·당나라·송나라 등이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원나라에 미치지는 못한다. 한나라는 북적(北狄)에게 시달렸고 수나라는 동이(東夷)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서융(西戎)으로 인하여 환란을 겪었고 송나라의 걱정은 항상 서북(西北)에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삭막(朔漠)에서 일어나 서역을 병합하고 서하(西夏)를 평정하였다. 여진을 멸하고 고려를 신속(臣屬)시켰고 남송을 평정하여 천하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 고려는 동번(東藩)이 되어 신하의 예를 공손하게 취하니 이전에는 볼 수가 없었던 일이다(『元史』57 地理志)."
  
그리고 1270년 고려의 원종이 원나라에 내조(來朝)했을 때, 원나라 황제는 "경(卿)은 내조를 늦게 했으니 제왕(諸王 : 칭기즈칸의 종친)들보다 반열(班列)이 낮게 되었습니다. 경은 이런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元史』7 世祖紀)."라고 합니다. 즉 조금이라도 일찍 원나라에 내조(來朝)를 했다면 원나라 종친들보다도 더 높거나 같은 지위를 줄 수 있는데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거의 천년 동안 몽골의 나쁜 점만 들추어내어 가르쳐왔습니다. 몽골에 대해 공식적으로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면 '야만족'과 같은 놈이라고 매도당해 왔습니다. 새끼 중국인들이 천년 이상을 한국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얘긴가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한국의 새끼중국인들은 고려가 몽골의 속국(屬國)인 점만 강조합니다. 이런 점을 천년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비판 없이 지내왔다는 것이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에는 아마 제대로 된 학문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군요. 한족(漢族)과 중국(中國)을 찬양하면 그것은 학문이고, 그 이외의 것을 제대로 보려면 모두 오랑캐로 매도합니다. 그러니 쥬신의 역사가 수천 년 동안 감춰질 수밖에요.
  
한국과 일본의 새끼중국인들에게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원나라 때 도대체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몇 군데 있습니까?
  
험준한 산악·먼 바다·밀림 등 몽골이 이르지 못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국체를 유지한 나라는 고려(高麗)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원사(元史)』를 보면 온통 고려 이야기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제 왜 그런지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왜 몽골인들이 반도쥬신을 이렇게 끔찍하게 대해주었는지 말입니다. 몽골 군대가 갈 수 있는 정복 가능한 땅에서 몽골의 직속령(直屬領)이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바로 고려입니다.
  
이것을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려의 끈질긴 항쟁의 결과[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7쪽]"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지요. 세계를 굴복시키고 복종하지 않은 나라를 온통 잿더미로 만든 나라에게 남송(南宋)의 10분의 1도 안 될 국력(國力)을 가지고 끈질긴 저항으로 직속령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그것도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 현재의 베이징)의 바로 코앞에 있는 국가(고려)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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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몽골의 민족적 정체성

다시 주제로 돌아갑시다. 몽골이 이토록 고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허물을 덮어두려고 한 것은 제가 보기엔 몽골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정체성 때문입니다. 한국인들과 몽골을 하나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족들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Khori : 고구려족, 또는 구리족, 또는 고리국의 구성원)족의 발원지로서 보고 있으며 이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이런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전설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그 방향에 차이가 다소 있습니다. 즉 제가 보기엔 흑룡강에서 오난강쪽으로 이동해갔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한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서 한국 생활을 경험했던 몽골 쥬신들이 한국인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고 저질의 한국인들이 몽골에서 저지르는 많은 사기 사건들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한국인들의 행태들이 우리들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합니다.
  
원나라 때 고려 습속이 세계의 중심지인 원나라의 서울에서 크게 풍미하여 고려의'한류열풍'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당시의 '한류열풍'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지배자들이 고려 한류(韓流)에 열광하여 고려양(高麗樣)·고려풍(高麗風)이란 말이 기록될 정도이니 말입니다. 오늘날 한류 열풍이 미국의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영국의 런던 등에는 없질 않습니까? 그리고 몽골 제국은 당시 유럽과 중근동의 각종 문물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의 문화를 접해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몽골의 민족정체성과 관련하여 지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몽골은 부여·고구려의 원류인 바로 고리족(코리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번 지적했지만 한번만 더 보고 지나갑시다.
  
『몽골비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주목할 만합니다. 알탄 칸(금나라의 황제)이 타타르가 자신에 복종하지 않자 칭기즈칸에 협력을 요청하고 칭기즈칸이 타타르를 정벌합니다. 이 때 칭기즈칸이 받은 칭호가 '자오드 코리(札兀忽里)'입니다(『몽골비사』134절).
  
여기서 말하는 자오드는 족장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코리족의 족장이라는 말이죠. 이 코리는 바로 고리·고리국·구리(고구리·고구려) 등을 의미하는 것이죠. 칭기즈칸은 이 호칭에 대해 대체로 만족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당시 칭기즈칸은 자오드(札兀) 이상의 제후인 '제후타오(招討) 코리'를 요청하였으나 금의 승상 옹깅이 그것은 대금황제에게 결정하도록 요청해보겠다고 하면서 떠났다고 합니다.
  
몽골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는 고구려는 기원적으로 몽골과 유사성을 가진 민족으로 단언합니다. 부여·고구려의 시조의 어머님인 유화부인은 중세 몽골에서 버드나무꽃(Uda-Checheg)으로 다시 복원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후금의 삼신할머니인 포도마마(佛多媽媽)는 다름 아닌 버드나무(Uda)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몽골계나 부여·고구려·금(만주) 민족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흑룡강 중상류 일대에서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는 나무는 버드나무밖에는 없다는 것이죠[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칭기즈칸은 분명히 코리족의 족장이었으며 금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성장해왔고 후일 세계정복을 하는 과정에서 남으로 이동하여 금나라를 병합합니다. 그리고 금나라와 힘을 합해 중국경영에 나섭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먼 후일 청 태조가 북으로 몽골의 주요부족을 통일하고 그들과 함께 다시 남으로 내려가 중국경영에 나섰다는 것이죠. 방향만 다를 뿐 결국은 유사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요.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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