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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부인 떠나 연상과부와... '나쁜남자' 주몽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여섯 번째 이야기
11.01.11 12:08 l 최종 업데이트 11.01.11 12:08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주몽>. ⓒ MBC
지난 2006·2007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주몽>은 한국인들에게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이미지를 아주 멋지게 각인시켜 놓았다. 드라마에서처럼 고주몽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분명히 '훌륭한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었을까? 특히 여자에게 그는 어떤 남자였을까?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부모에게도 잘하고 친구에게도 잘하고 이성에게도 잘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역사소설이나 사극이 많다. 그런 소설이나 드라마를 접하다 보면, 정치적으로 훌륭한 위인은 인간적으로도 따스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했을까?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8세(재위 1509~1547년)는 종교개혁·왕권강화에 기여했지만 2명의 왕후를 죽이는 오점을 남김으로써 '훌륭한 왕, 나쁜 남편'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역사학자 카아(E.H.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훌륭한 왕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좋은 정치가'와 '좋은 남자'는 반드시 등치하지 않는다.
주몽의 경우에도 '좋은 왕이었지만 좋은 남자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명성왕 편에 따르면, 유화와 해모수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여왕 금와 밑에서 성장했다.
주몽은 활쏘기 등에서 놀라운 재주를 발휘했지만, 부여에서 오랫동안 살 수는 없었다. 대소 왕자를 비롯한 부여의 고위층들이 주몽을 시기하고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몽이 내린 결단은 '부여를 떠나자!'였다. 그런데 주변의 집중 견제를 받는 상황 속에서 주몽이 부여를 빠져나가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부여에서 탈출할 것인가?
무사히 부여를 빠져나가기 위해서 주몽이 생각해낸 방법은 여자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한·중 양국의 사료를 바탕으로 <삼국사기>의 오류를 상당 부분 시정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이 대목을 살펴보자.
"대소 왕자가 그를 더욱 시기하여, 살해하려는 음모가 더 심해졌다. 주몽이 이를 알아차리고는 예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밖으로는 아내에게 빠져서 다른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속으로는 오이·마리·협보 등 세 사람과 공모하여 어머니 유화에게 고별하고 처를 버리고 도망하여 졸본천에 이르니,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주몽이 예씨와 결혼한 이유는?
주몽이 예씨와 결혼한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여자에게 푹 빠진 것처럼 위장해서 정적들을 안심시켜 놓은 뒤에 부여를 탈출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왕 편에 의하면, 주몽은 예씨가 아이를 밴 상태에서 부여를 떠났다. "아들을 낳거든 내게 보내라"는 말만 남기고 말이다. 주몽의 행위는 정적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예씨라는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주몽은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 <주몽>의 고주몽(송일국 분)과 소서노(한혜진 분). ⓒ MBC
생존을 위해 여자를 이용하는 주몽의 행동패턴은 부여를 떠난 후에도 나타났다. 부여에서 도망해 졸본천에 정착한 22세의 주몽은 토착 여인의 힘을 빌려 현지에서 기반을 잡는 방식을 취했다. 번번이 여인들의 도움을 받은 걸 보면, 주몽이 상당히 매력적인 남자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주몽이 졸본천에서 만난 여인은 이 지역 세력가의 딸인 소서노였다. 소서노는 주몽을 만나기 전에 우태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비류·온조를 낳은 적이 있는 과부였다. 비류·온조가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주몽이 소서노의 결정적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세워놓고도 비류·온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꺼렸을 뿐만 아니라 끝내 비류·온조와 결별한 사실을 볼 때, 주몽과 비류·온조 사이에 피가 섞이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몽을 만날 당시의 소서노는 애 둘 딸린 과부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두 남녀의 만남에 대해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졸본천에 이르니, 그곳의 부자인 연타발의 딸이자 미인인 소서노가 부친의 재산을 상속하고 해부루의 자손인 우태의 부인이 되어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았으나, 우태가 죽은 뒤로 과부로 지내고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소서노가 주몽을 보고 사랑하여 결혼하니, 주몽이 그 재산에 의지하여 명장 부분노 등을 불러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왕업의 기틀을 닦았다."
22세의 도망자 주몽이 만난 소서노는 아름답고 부유한 37세의 과부였다. '아름답고 부유한 연상의 과부' 중에서 주몽이 주목한 것은 '부유한'이란 부분이었다. 주몽은 소서노의 재산을 '대선 자금'으로 활용했다. 스타급 참모진을 만들고 민심을 얻는 데에 그 돈을 활용한 것이다. 주몽이 소서노의 돈을 물 쓰듯 썼다는 점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편에서도 나타난다. 친아버지 같던 주몽과의 관계가 깨진 뒤에 비류가 온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에,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다. 그 공로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소서노의 돈을 '선거판'에 쏟아 부을 때만 해도, 주몽은 소서노 모자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서노를 고구려 초대 왕후로 삼고 비류·온조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이 시기에 주몽이 소서노에게 차기 왕권을 비류·온조 쪽으로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비류·온조가 왕위계승권 문제 때문에 주몽에게 배신감을 느꼈다는 기록을 볼 때 그렇게 추론할 수 있다.
'여자에게 멋진 남자'로 기억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든지, 주몽은 부인이라기보다는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소서노마저 결국 배신하는 쪽을 선택했다. 부여를 떠나기 전에 예씨 뱃속에 있었던 아들 유리가 어머니와 함께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로 들어오자, 그는 곧바로 유리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소서노 및 비류·온조를 배척했다. 이렇게 주몽에게 배신을 당한 소서노·비류·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한강 유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
자기보다 훨씬 더 부유한 아내와 결혼하여 처가에서 살던 남자가 아내와 헤어질 경우에는, 남자가 그 집에서 나오는 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다. 하지만, 주몽-소서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토착세력인 소서노가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이는 소서노와 결혼한 이후에 주몽이 소서노의 지지기반을 잠식해가면서 자신의 세력을 늘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별 탈 없이 소서노와 잘사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소서노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소서노의 기반이 여전히 강력했다면, 주몽이 소서노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소서노가 그렇게 쉽게 고향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몽은 소서노의 돈을 이용해 고구려를 세우고 소서노의 힘을 약화시키다가 결국에는 소서노마저 버렸던 것이다.
두 번씩 여자 눈에서 눈물 나게 한 고주몽의 역사적 평가는...
▲ 고주몽의 무덤인 동명왕릉. 평양직할시 역포구역 용산리 소재.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 도서출판 신유
드라마 <주몽>에서 '훌륭한 왕'의 이미지를 남긴 고구려 시조 고주몽. 그는 위와 같이 대여(對女) 관계에서는 '나쁜 남자'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여자 눈에서 눈물을 나게 만든 것이다.
걸그룹 시스타의 노래 <니까짓게>에서는 "내 눈에 눈물 나면, 니 눈에는 피눈물 나!"라고 했지만, 여자들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든 고주몽은 피눈물을 흘리기는커녕 기쁜 마음으로 인생을 마감했다. '고구려 본기' 동명성왕 편에 따르면, 그는 친아들 유리를 만나자마자 "기뻐하며 (그를) 태자로 세우고" 소서노·비류·온조와 결별한 직후에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나쁜 남자' 캐릭터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다.
주의할 것은, 이처럼 고주몽이 '나쁜 남자'였다고 해서, 그의 정치적 업적까지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쁜 남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구려 건국이라는 위업을 남긴 '훌륭한 왕'이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카아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그것(역사적 인물의 사생활)이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칠 때에만 (역사가는 사생활에) 흥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정치적 업적은 정치적 업적대로, 사생활은 사생활대로 따로 평가할 줄 아는 균형 감각을 가지라는 주문이다.
주몽의 사례는 우리에게, 역사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사생활에서는 얼마든지 '꽝'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훌륭한 위인은 인간적으로도 따스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역사소설이나 사극을 볼 때에, 이런 점을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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