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ksfish/38
* 긴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소제목을 내용에서 따서 달았습니다.

[을지문덕 파헤치기]살수대첩의 영웅 고건무
작은물고기 2009.09.08 09:30 
 


살수대첩하면 을지문덕 장군. 을지문덕 장군하면 살수대첩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살수대첩의 영웅은 상당히 많다. 그중 한 명이 바로 고건무. 훗날 영류태왕이다.
 
고건무는 살수대첩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사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 승리를 일궈낼 수 있었던 것도 고건무 때문이다. 
 
을지문덕 장군이 청야전술로 수나라 30만5천의 별동대를 고구려 도성으로 끌어들이면서 배를 곯게 하던 때 수양제는 내호아 장군에게 바다로 고구려 도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내호아 장군과 그의 부하 주법상은 6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도성 근처 패수(오늘날 대동강)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주법상은 수나라 30만5천의 별동대를 기다렸다가 같이 고구려 도성을 공격해야 한다고 내호아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공명심에 눈먼 내호아는 6만의 병사 중 4만의 병사만 이끌고 고구려 도성을 공격한다.
 
고구려 도성에는 외성, 중성, 내성, 북성 등 4개의 성으로 돼있다. 고건무는 외성 밖에서 내호아 4만 군대를 기다렸다가 짐짓 패하는 척하고 중성으로 퇴각을 했다. 내호아 4만 군대는 외성을 장악하게 되는데 날이 저물어 결국 외성에서 기거를 하고 중성은 다음날 치기로 했다. 외성에는 가옥들이 즐비했고 내호아 4만 군대는 그 가옥들로 뿔뿔이 흩어져 자게 이르렀다.
 
그때 고건무의 500군대가 나타나 내호아 4만 군대를 격파한다. 500군대가 4만의 군대를 격파한다고 하면 이해하기 힘들것이다. 하지만 고건무의 500군대는 개마부대이다. 개마부대란 기수뿐만 아니라 말까지 갑옷을 입힌 군대를 말한다. 보통 철갑옷은 상당히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철갑옷을 입히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생산되는 철과 기술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호아 4만 군대가 고건무 500군대를 척살하려고 해도 철갑옷 때문에 화살이며 칼이며 창이며 소용없게 된다. 오히려 자기네들이 척살당하는 위험에 빠진다. 결국 내호아는 자신의 군대를 버려둔 채 주법상이 있는 곳으로 퇴각을 하게 된다. 주법상이 겁에 질린 내호아에게 "지금 다시 고구려 도성을 쳐들어가면 승리할 수 있다"고 제언하지만 겁에 질렸기 때문에 오히려 패수 밖으로 철수를 하고 수나라 별동대를 기다리게 된다.
 
이처럼 고건무는 수나라 수군을 500의 군사로 물리쳤다. 이것은 살수대첩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된다. 수나라 별동대가 고구려 도성까지 쳐들어올 동안 식량은 바닥이 나고 을지문덕 장군의 청야전술로 인해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이때 만약 고건무가 패배를 하고 내호아가 수나라 별동대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면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고건무가 그만큼 살수대첩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영류태왕의 활약상
 
이 고건무가 훗날 영류태왕이 된다. 영류태왕의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즉위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618년 음력 9월에 영양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618년 중국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몰락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 왕조를 일으킨 당 고조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벌을 제거하는 등 내적으로 통일 작업에 몰두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고구려에서는 일단 당나라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여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만들어갔다.
 
대외 관계
 
영류왕의 온건주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친당 정책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고구려와 당나라는 고수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서로 교류를 하였다.
 
626년 이세민이 황태자 이건성을 살해하고, 당 고조에게 압력을 가하여 선위 형식을 통해 제위를 찬탈해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당 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곧 주변 나라들에 압박을 가하면서 영토 확장 작업을 가속하였다. 그래서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가 당나라에게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말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백제, 신라와 화친 관계를 맺을 것을 종용하였다. 영류왕은 당 태종의 요구를 받아들여 백제, 신라와 화친하였다.
 
신라와의 전쟁
 
당나라는 628년에 마지막 남은 군벌 세력 및 서돌궐을 제거하고 통일 작업을 완수하였다. 이렇듯 당나라의 성장을 당나라와 가까운 고구려는 염려하였고, 반대로 당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라는 당나라를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진평왕은 당나라가 내부 통일을 완수하면 필시 고구려를 칠 것이라 판단하고, 그 때문에 고구려는 한반도 쪽 변경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629년에 김유신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여 동쪽 경계 지역인 낭비성(娘臂城)을 탈취하였다.
 
고구려는 몇 번에 걸쳐 반격을 가했지만 당나라의 침입을 우려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재위 14년인 631년부터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장성인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는 축성 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업을 지속하였다. 천리장성은 646년에 완성되었는데 완공까지 16년이 걸렸다.
 
638년 영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장수 알천에게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대당 관계
 
고구려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 것을 주장했고, 온건파는 왕태자를 장안으로 보내 당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것을 주장했다.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에게 손을 들어주어 640년 왕태자 고환권(高桓權)을 장안에 보냈다. 그리고 당 태종에게 서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기 위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 문제로 강경파와 온건파는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요수로부터 평양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당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당 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죽음
 
한편, 강경파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입지가 좁아질수록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에서는 그러한 강경파의 불만을 무시하고 급기야는 천리장성 축성 작업까지 중단하자는 주장까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642년 음력 10월에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다. 그런 다음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쳐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동생인 고대양의 아들인 보장을 옹립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한편, 당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지절사를 고구려에 보내 조문하였다. 


고건무에서 영류태왕으로

일단 고건무는 영류태왕이 되면서 대당관계를 유화관계로 만들었다. 살수대첩에서 그 혁혁한 공을 보였고 장수로서의 기개를 보였던 고건무가 영류태왕이 되면서 유화관계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몇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1. 이복동생의 신분으로 왕위를 계승받았다
 
영류태왕은 영양태왕의 이복동생이다. 그리고 영양태왕 아들이 있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영양태왕이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동생인 고건무가 왕위를 계승 받은 것이다.
 
물론 고구려 시대에서는 부자상속과 형제상속이 혼재된 나라였다. 하지만 고구려 말기로 가까오면서 가급적 부자상속을 원칙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복동생이 왕위를 계승받았다는 것은 정치적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라는 추론을 하게 된다.
 
2. 귀족들이 고건무 포섭?
 
무장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고건무가 영양태왕이 되면서 당나라에게는 온건파로 돌어섰다.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영류태왕은 귀족들의 지지로 왕위를 받은 것 아닌가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귀족들은 가급적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영양태왕은 왕권강화를 외치면서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대중국 투쟁을 감행했다. 수나라와의 1차 전쟁(임유관전투) 때 1만의 말갈 군사로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한 이유도 물론 수나라를 견제하기 위함도 있지만 귀족들을 견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귀족들로서는 영양태왕은 별로 탐탁지 않은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 판단했고 대신 이복동생에게 물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고건무 입장에서는 왕위를 물려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무장으로서의 호개를 버리고 일단 당나라에 유화정책을 펼친 것 아니냐는 추정을 할 수 있다.
 
3. 청야전술로 인한 국토의 피폐. 강경파 대신 온건파 득세?
 
수나라와 4차에 걸쳐 전쟁을 했다. 수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고구려가 사용한 전술은 청야전술. 청야전술은 평야에 있는 식량을 치우고 평야를 불태우는 것. 특히 2,3,4차 전쟁은 매년 일어났다. 고구려로서는 엄청난 재정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고구려 백성들은 기근으로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상처뿐인 영광이 될 수 있다.
 
고구려 내에서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존재했다. 강경파는 주로 무장들이고 온건파는 귀족들이다. 온건파들은 더이상 중국과의 싸움은 안된다고 주장하고 강경파는 무조건 중국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계속 되면서 국토가 피폐해지자 강경파 대신 온건파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고 결국 온건파는 고건무를 포섭해서 영류태왕으로 만들고 당나라와는 온화정책을 펼치게 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이유 때문에 고건무가 영류태왕으로 되면서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바뀐 것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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