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histoire.egloos.com/v/2407842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 1
hyjoon 2010.3.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 1 : 명량해전의 배경 http://tadream.tistory.com/7083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 1 : 명량해전의 배경 http://tadream.tistory.com/7083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 2 - 전쟁사 : 명량해전의 전개 http://tadream.tistory.com/7169
(전략)
명량해전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볼려고 합니다. 이미 zert님이 '[명량대첩] 명량대첩의 전개와 의의'라는 포스팅으로 명량해전의 경과와 전개를 정리해주셨고 뒤이어 을파소님도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를 연재하시면서 명량해전에 대해 두차례에 걸쳐서 포스팅을 해 주셨습니다. 특히 을파소님은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8)-명량대첩에 얽힌 잘못된 속설'에서 쇠사슬론과 강강술래 등 명량해전에 대한 대표적 오해를 논파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서 정리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포스팅이 정리한 것들 말고 다른 사항들-특히 제가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었던 사항들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명량해전에 대해 총체적 설명을 하려다 보니 내용이 겹칠수도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명량해전의 배경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말도 안되는 결과를 만들고나자 제대로 된 지휘관이 중요하다는 병법의 상식을 뒤늦게서야 깨달은 조선 조정이 취한 조치였다. (진작에 깨달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워낙 수군의 규모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배설이 이끌고 탈출한 배 8척에 각처의 장수들이 합류해서 조금 늘어나긴 했지만 12척에 불과했던 것이다. 수군이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수군을 폐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임진년에서 5~6년간 적은 감히 호남으로 곧바로 쳐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죽기로 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적이 호남을 경유해 오는 것을 저지하는 일을) 해 볼만 합니다. 만약 수군을 폐한다면 이것은 적이 가장 기뻐하는 바로서, (적은)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진한 신(微臣)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自壬辰至于五六年間。賊不敢直突於兩湖者。以舟師之扼其路也。今臣戰船尙有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今若全廢舟師。則是賊之所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此臣之所恐也。戰船雖寡。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
- 이충무공전서. 제9권. 부록1. 행록(조카인 정랑(正郞) 이분(李芬)이 지음) -
이순신은 수군 폐지를 단호하게 반대하고 전장에 섰다. 그는 전라도 지역을 돌며 무기와 군사를 수습해서 숫자는 적어도 위력있는 함대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숫적열세에 대한 군사들의 공포심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8월 28일과 9월 7일 조선수군을 탐지하던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국지전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순신은 군사들이 가진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9월 7일에 벽파진에 접근한 일본군을 먼 바다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온 뒤 이순신은 야간기습을 예상하고 여기에 대비하도록 명령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통찰력을 발휘해 장병들의 신뢰도를 높였다. 동시에 같은 날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이 따를 것이다'고 강조하여 명령에 대한 복종을 받기도 했다. 또한 중앙절인 9월 9일에 제주도에서 잡아온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여 사기를 높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아군과 적의 상황을 판단하고 전장을 선택한다. 그 전장은 바로 명량-현재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었다. 물살이 빠르게 흐르면서-최소 9노트에서 최대 11노트까지도 빠르게 흐른다-소용돌이치는 곳이다. 명량(鳴梁)-순우리말로 울돌목-이라는 지명도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내는 소리가 크게 나는 것이 물살이 우는 것 같다는 데서 나왔다. 현재는 이곳에 진도대교가 들어서고 진도와 해남 해안 일부에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물살이 조금 약해졌다고 하지만 위에서 내려다 보면 여전히 명량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는 해류가 흐른다. 이순신은 왜 이런 곳을 전장으로 삼았을까?
명량해협 부근의 지형. 진도대교가 서있는 곳이 명량해협이다. 그 뒤쪽에 전라우수영 본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위성사진 제공: Daum 지도)
우선은 명량이 위치한 지리적 특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량은 전라도 서남쪽 끝에 자리한 곳이다. 당시는 원거리 대해에서의 항해가 위험하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남해에서 배를 타고 서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구간이었다. 문제는 땅이 돌출된 곳이라 해류가 부딪히고 물살이 거세 옛날 배들은 크게 우회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이순신이 이곳을 막고 있으면 남해의 일본군이 원거리 항해의 위험을 무릅쓰거나 이순신을 제거하기 전에는 이곳을 통과할 방법이 없었다.[1]
전략적 관점에서 명량이 가진 이점은 지리적 위치가 설명해 준다. 그렇다면, 전술적 관점에서 명량이 가진 이점이 무엇이었을까? 조선수군은 우수한 무기와 정규 군대의 편제를 갖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숫자적으로는 절대적 열세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육지같았으면 조선군은 정면대결을 피하고 중요한 길목에 있는 산성에 의거하여 일본군을 저지하는 전술-수성전으로 나갔거나 아니면 좁은 계곡을 택해서 이곳을 막는 병목작전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육지와는 다르다. 바다에서는 배 밑으로 해류가 흐르고 이것의 영향이 크다. 육지에서와는 달리 바다에서는 해협이 좁아질수록 물살이 빨라지고 적과 아군 모두 배를 운신하기 힘들어진다. 그 중에서도 명량은 무동력선이 전선이던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결코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이곳을 전장으로 고른 이유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순신이 짤 작전이 그렇게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아군의 전력-병력 수를 포함한 수치-이 열세일 때 적과 정면충돌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병법의 상식이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면 일본군이 서해를 통과해서 한강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별로 없었다. 유격전을 펼 수도 있지 않냐고 하겠지만, 유격전의 전제조건에는 강한 자생력-보급이 차단되어도 군대가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는 능력-과 적보다 우수한 기동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동력에 있어서 조선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은 일본군선보다 느리면 느렸지, 절대 그보다 빠른 배가 아니었다. 자생력에 있어서도 조선군의 주력무기인 화포를 사용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화약보급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은 어떻게든 일본군과 맞서서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기 위한 최적의 선택은 험한 동시에 교통의 요지인 지점을 봉쇄한다는-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지에서 중요 길목에 위치한 험지에 산성을 구축하고 적을 막는 것과 같은 전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다에서는 그런 장소가 명량해협이긴 하지만, 바다에서 육지의 산성과 같은 요새가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은 조선수군이 보유한 전함에 있었다. 바로 조선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이었다.
조선수군의 주력전함 판옥선의 모습. 판옥선은 선체가 튼튼하고 뱃전이 높아서 해전에서 하나의 성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New Vanguard. Fighting Ships of The Far East(2)-Japan And Korea[AD 612-1639]』. Stephen Turnbull. Osprey Publishing. 2003)
전통적으로 조선군의 장기는 기병(騎兵)과 수성전(守城戰). 그러나 바다에서 말(馬)은 쓸 일이 없으므로 해전의 구도는 수성전처럼 흘러간다. 조선군은 뱃전이 크고 높은 거선(巨船)을 선호했고 이런 배를 주력전선으로 삼았다. 뱃전이 크고 넓을수록 병사들을 집중하고, 여러 장비(쇠뇌, 화포 등)를 갖추기도 쉽다. 이러한 전투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명종대에 등장한 판옥선은 기존의 거함에 상갑판을 만들어서 전투원과 격군을 분리하여 상갑판의 공간을 넓히고, 선체의 높이를 높여 전선의 전투력을 극대화하였다. 판옥선의 이러한 특성에 따른 장점은 이항복이 정확하게 지적했다.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은 위에는 판옥(板屋)을 설치하고 주위에는 방패(防牌)를 설치하며 용부(用夫)는 1백여 명이나 되어 엄연히 하나의 작은 성보(城堡)를 이룹니다.
- 백사집 5권. 차자(箚子)편 -
경자년(1600년)에 도체찰사로써 전라도에서 올린 차자(庚子, 以都體察使, 在全羅道箚)
여기서 이항복이 말하고 있듯이, 판옥선은 승선 인원이 많은데다 배가 크고 높아서 '하나의 성보'-다시 말하자면 그 자체로써 하나의 수상요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반면에 일본수군의 주력전함은 세키부네(關船)이다.[2] 이 배는 선체가 가늘고 빠르지만, 문제는 선체가 판옥선에 비해 낮다는 것. 이러한 높이의 차이는 조선군에게 위에서 아래의 적을 공격하게 하는 이점을 제공하는 동시에 일본수군이 도선해서 백병전을 펴기 어렵게 만드는 방패이기도 했다.[3]
세키부네(關船). 임진왜란 당시 일본수군의 주력전함이었다. 선체가 가늘어서 속도는 빨랐지만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작았고, 이는 조선군과의 전력차이를 불렀다. 승선인원은 40명의 노꾼과 20여명의 조총수를 포함해서 70~100명 정도였다. (사진 출처: 『New Vanguard. Fighting Ships of The Far East(2)-Japan And Korea[AD 612-1639]』. Stephen Turnbull. Osprey Publishing. 2003)
배가 큰 조선군이 하나의 성과 같은 판옥선을 중심으로 명량의 물목을 지키고 있으면 일본군은 이를 쉽게 통과할 수 없다. 더욱이 밑에 물살이 빠른 속도로 흐르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배를 붙여서 백병전을 펴기도 힘들다. 따라서 조선군이 물살이 역류일 때와 잠시 멈출 때 '판옥선이라는 요새'에 의거해 버티고, 순류가 흐를 때 친다면 조선군에게 승산이 있었다. 이순신이 9월 13일 일기에 '꿈이 이상했다. 임진년에 크게 승리할 때의 꿈과 거의 같았다'(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3일)고 한 것을 보면 자신의 계략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꿈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러는 중에도 일본군은 다가오고 있었다.
14일. 맑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전선 200여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포로 들어왔습니다"고 하였다. 또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중걸(仲乞)의 말을 전하길 "이달 초 6일 해남 달마산에서 왜적에게 붙잡혀 묶인 채로 왜선에 실렸는데, 이름을 알 수 없는 김해 사람이 왜적 대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그가 중걸의 귀에 대고 몰래 말하기를 '왜놈들이 하는 말이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혹은 사살하고 혹은 불태웠으니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배를 불러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조리 죽인 뒤 경강(京江. 여기서는 한강을 말한다)으로 올라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말을 다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 피난민들을 즉시 육지로 올려보내도록 일렀다.
- 이충무공전서 8권. 난중일기 4. 정유년(1597년) 9월 14일 -
포로로 잡혀있던 중걸의 정보에 대해 '다 믿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정황상으로 볼 때 부왜(附倭. 일본군에게 협력한 사람)로 보이는 김해사람이 전해준 정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적의 선발대가 이미 어란포로 들어온 상황이어서 중걸이 전해준 정보는 신빙성이 있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전령을 보내 만약을 대비, 피난민들을 육지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5일,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그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 훈시를 한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 이충무공전서 8권. 난중일기 4. 정유년(1597년) 9월 15일 -
위에서 인용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말은 『오자병법(吳子兵法)』 치병(治兵)편에 있는 구절이다. 본래의 원문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요행을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라는 구절인데, 이순신은 여기서 '요행을 바라면(幸)'을 '반드시(必)'로 고치면서 목숨을 건 전의(戰意)를 다졌다. [4]
이 대목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군인의 정신력이 전장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며 인용하고 미화한다. 그러나 정신력은 승리의 요소에 있어서 하나일 뿐이다. 이순신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가장 합리적인 전략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이를 어기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을 부하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9월 15일 일기에 '그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싸우면 이기고 이렇게 싸우면 진다고 알려주었다'(이충무공전서 8권. 난중일기 4. 정유년(1597년) 9월 15일)고 했다.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꿈에서 무슨 내용이 얘기되었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꿈은 인간의 생각이 발현되는 하나의 형태라는 것을 감안해 보면 이순신은 꿈에서 자신이 구상한 전략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편에 계속
주석
[1] 이는 실제 역사적 사례로도 보인다. 1270년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든 삼별초는 명량을 끼고 있는 진도에 거점을 잡는다. 그리고 명량해협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조운선을 나포하거나 여몽연합군을 공격해 고려 조정을 압박했다.
[2]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의 주력전함이 아다케부네(安宅船)였다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황신이 통신사로 일본에 돌아갔다 온 뒤 올린 서계를 보면 '......조신은 또 역관 이언서(李彦瑞)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수군이 차츰 수전(水戰)을 익히고 선박도 견고하니 피차가 맞서서 서로 버티며 진퇴하면서 싸운다면 반드시 이기기가 어렵다. 만약 어두운 밤에 몰래 나가서 습격하되 조선의 큰 배 한 척에 으레 일본은 작은 배 5∼6척 내지 7∼8척으로 대적하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일시에 붙어 싸운다면 수군도 격파할 수 있다......'(선조실록 83권. 선조 29년 (1596년) 12월 21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일본군은 선체가 큰 아다케부네 대신 선체가 작고 가벼운 배들을 중심으로 조선수군을 격파할 전술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배가 커지면 과녁이 되기 쉽고, 선체가 느려지는 반면 배가 작으면 가볍고 빠르게 이동하면서 화포나 궁시류의 명중률을 낮출 수 있다. 배가 작아지면 승선 인원에서 상대가 안되기도 하겠지만, 이는 배를 여러 대 편성해서 싸우게 하면 된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판옥선 1척에 일본 군선 5척에서 8척까지 상대하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3] 해전에서 뱃전의 높이가 어떤 이점을 가져다 주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서양에도 있다.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 당시, 프랑스 전함 르두터블(Redoutable)은 영국 전함 빅토리(Victory)에 수류탄 투척과 장루의 머스켓 소총 사격으로 상갑판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3층 전열함이던 빅토리에 비해 2층 전열함이었던 르두터블의 갑판이 낮아 프랑스 군은 쉽게 도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공격이 지체되는 동안 빅토리와 동급인 영국의 3층 전열함 테메레르(Temeraire)가 달려왔다. 르두터블의 프랑스 군이 도선하려는 시점에 테메레르 호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빅토리와 테메레르의 협공을 받은 르두터블의 루카스(Jean Lucas) 함장은 승무원의 81%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채 항복해야 했다.
[4]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도 『오자병법』에 있다. 여사(勵士)편에 있는 구절로 본래는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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