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histoire.egloos.com/2448453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 2 - 전쟁사
hyjoon 2010/04/23 17:39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 1 : 명량해전의 배경  http://tadream.tistory.com/7083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 2 - 전쟁사 : 명량해전의 전개  http://tadream.tistory.com/7169 

명량해전의 전개

9월 16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그와 동시에 결전이 다가왔다.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지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내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별망군은 적선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不知其數)'고 했는데, 이 때 나타난 일본군의 규모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난중일기』 초고에는 130여척, 『이충무공전서』본 난중일기에는 333척,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는 200여척, 『난중잡록』에는 수백척[1],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와 『연려실기술』, 이항복이 쓴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백사집(白沙集)』 4권에 수록-에는 500~600척 등으로 기록이 말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이 차이를 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이분(李芬. 이순신의 조카)이 쓴 《행록(行錄)》에 있다.
 
그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 이충무공전서 9권. 부록 1. 행장(정랑 이분李芬이 지음) -

이 기록과 일본군이 명량해협의 물살을 보고 아다케 대신 세키부네를 통과시켜 전투를 치뤘다고 증언한 것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파악한 130여척은 해상에서 조선수군이 파악한 선봉부대, 여기에 본대까지 포함하면 300척 이상의 대함대라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일본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을 보면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가토 요시야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 등 쟁쟁한 장수들이 모두 나선 점과 해전 이틀 전 김중걸이 전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일본군은 조선수군을 제거하고 서해안으로 북진, 수륙병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남해안의 일본군 대부분을 동원했고, 그 규모는 300여척-500~600척은 수송용 비전투선도 포함된 숫자로 보인다. 일본군에게는 그 둘의 구분이 모호했지만-이었고 그 가운데 선봉 130여척이 명량해협 안으로 진입해 조선수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는 판옥선 13척-수군폐지를 반대하는 장계를 올린 뒤 1척이 더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과 초탐선(哨探船. 정찰용 소형 선박) 32척, 그리고 군세를 과장하기 위해 동원한 피난선 100여척(명량해협 북서쪽인 양도와 진도 사이의 바다에 포진한 것으로 추정) 정도였다. 그러나 피난선은 군세 과장용에 불과하고 초탐선은 작아서 전투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전력은 판옥선 13척이었다. 
양측의 참전 장수들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군 감찰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간 미치나가(管達長)
가토 요시야키(加藤嘉明)
이케다 히데오(池田秀雄)-진도 부근에서 병사(病死)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하타 노부토키(波多信時)

조선군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충청수사 권준(權俊)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金應諴)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
가리포첨사 겸 조방장 이영남(李英男)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
거제현령 안위(安衛)
흥양현감 최희량(崔希亮)
강진현감 이극신(李克新)
순천감목관 김탁(金卓)

이순신은 별망군의 보고를 받은 뒤 장수들에게 행동 방침을 정해주었다. 그리고 함대를 정비해서 바다로 나갔다. 조선수군이 전장으로 나가자 일본군이 진입하여 조선수군을 포위하면서 명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언제인지 좀 애매하긴 한데 대략 진시(辰時. 오전 7~9시)경으로 추측된다. [2]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명량해전을 논할 때 쟁점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장이 어디냐는 것이다. 현재로써는 명량해협에서 제일 좁은 곳이라고 하지만 이곳의 물살은 밀물과 썰물 때 유속이 9노트가 넘어가서-최대 11노트까지도 흐른다-판옥선같이 사람이 노를 저어야 하는 무동력선의 경우 배를 운신하기 힘들다. 때문에 이곳이 전장이 아니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임진왜란 해전사』(이민웅. 청어람미디어. 2004)에서는 『난중일기』에서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전선을 에워쌌다'(난중일기 초고. 정유년. 9월 16일)고 한 기록에 근거해 우수영 앞바다로, 『이순신 파워인맥』(제장명. 행복한 나무. 2008)에서는 유속을 근거로 양도와 진도 사이의 바다로 추정하고 있다. 

명량 해협 부근의 유속과 그에 따른 기존의 전장 비정에 대한 반론 (위성사진 제공: Daum 지도)

그러나 『임진왜란 해전사』의 주장대로라면 일본군은 조선군을 묶어놓은 채 양도를 지나가 우회해 북상해 버리면 된다. 또한 『난중일기』를 봐도 '나가자 마자 적이 곧 우리를 에워쌌다'는 인상은 별로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순신과 임진왜란』(이순신역사연구회. 비봉출판사. 2006)의 반론대로 물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해전의 경과를 설명하기도 힘들다. 『이순신 파워인맥』에서 주장하는 전장은 전라우수영에서 발진한 이순신의 함대가 일본군을 맞아 싸운 곳이라고 하기에는 진로가 어색하다. 

이런 오류를 줄이려면 기록을 뒤져야 하는데, 기록을 뒤져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옛날 기록들은 사건의 스크린에 중점을 두고 서술을 하다 보니 전장에 대해서는 배경으로 살짝 언급하거나 두루뭉술하게 서술해 설명이 애매하기 일쑤이다. 그래도 일단 기록들을 한번 보자. 

근래 또 배신 겸 삼도 수군 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金億秋)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海南縣)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水使) 김억추,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후략)..........
- 선조실록 94권. 선조 30년. 명 만력 25년 (1597년) 11월 10일 -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중략)......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후략)........"
-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명 만력 26년 (1598년) 2월 11일 -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왜장 마다시(麻多時)를 죽였다........(중략)......적장 마다시는 수전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인데,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범하려고 하여, 벽파정 아래에서 접전하게 되었다......(후략).....
-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 명 만력 25년 (1597년) 9월 1일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후략).......
- 난중잡록 3. 정유년 9월 -

9월에 적의 괴수 뇌도수(耒島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여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 연려실기술 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일월록(日月錄)』 인용 부분 -

......나아가 명량 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이 이르자 적군의 망루(望樓)와 노(櫓)가 바다를 덮는 듯 하였다. 공은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뱃머리를 나란히하여 닻을 내리고 중류(中流)를 막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0권. 부록(附錄)2.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

통제사 이순신이 벽파정 아래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마다시의 목을 베었다.....(중략)....마다시는 해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은데, 200여척의 배를 이끌고 서해를 범하려 하니 (이순신이) 이를 벽파정 아래에서 맞아 싸웠다.......(후략).....
- 징비록 2권 -

이런 기록들은 전장에 대해 애매하고 두루뭉술하게 서술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 기록에 의거해서 지도에 표시하는 것은 애처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기록들은 넓은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는데, 여기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부분이 있다. 기록들이 모두 기존의 전장 비정과 큰 차이는 없지만, 『선조실록』이 이순신의 장계를 인용한 부분, 『선조수정실록』, 그리고 『징비록』이 말하는 전장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벽파정 아래에는 벽파진이 있다. 이곳은 명량해협 앞쪽에 위치한 곳으로, 물살이 비교적 느린 데다가 해남과 진도를 잇는 최단코스에 자리하여 항구로 이용되는 곳이다.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할 당시 김방경과 흔도가 지휘하는 중군(中軍)이 상륙한 곳이며, 명량해전 전에 이순신 함대가 정박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측 기록도 조선군이 이곳에 정박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측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에 따라 전투의 시작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 수군은 명량해협의 전라우수영에 있는 조선 수군의 병선 13척을 습격하려고 했다. 
2. 조선의 병선은 조류가 심한 명량해협에서 물살이 느린 곳-즉 명량 해협의 진도 쪽 벽파진에 정박하고 있었다.[3]
3. 명량해협의 조류를 본 일본 수군은 대형선 아다케부네(安宅船)로 돌입하는 것을 피하고 중형선인 세키부네(關船)를 정렬시켜 돌입하려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기타지마 만지 지음. 김유성·이민웅 번역. 경인문화사. 2008) 211쪽에서 재인용-

이 기록에서도 조선수군이 벽파진에 정박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에 수영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난중일기』에는 이유까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15일 계묘(癸卯). 맑음. 적은 수의 전선을 가지고 명량을 등지고 싸울 수 없기 때문에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후략)...... 
- 이충무공전서 제8권. 난중일기 4. 정유년 (1597년) 9월 15일 -

벽파정, 그리고 벽파진이 명량해협 부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명이기에 기록에서 벽파정, 벽파진이라고 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지만 이런 단편적이고 포괄적인 기록 몇줄만 가지고는 해결이 힘들기 때문에 지도를 참고해야 한다. 이순신의 유명한 전적 가운데 하나인 명량해전에 대해서는 고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표시하는 자리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서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현재 개간이 이루어진 부분이 있지만 지형의 큰 틀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옛 지도를 참고해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광여도』의 전라우수영 부분. 밑에 '충무공이 큰 승리를 거둔 곳. 물살(의 빠름)이 화살과 같아 명양(鳴洋)이라 한다(忠武公大捷處. 水疾如箭故謂之鳴洋)'는 글이 보인다. 『여지도』와 『해동지도』도 이와 같은 지형으로 그려졌고 같은 표시가 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진도부 부분. 우수영과 녹진 사이에 '충무공이 왜적을 격파한 곳(忠武公破倭處)'이라고 부기한 것이 보인다.


『청구요람』의 명량해협 부근을 그린 부분. 명량해협 사이에 '이곳에서 이순신이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李舜臣大破倭船於此)'고 부기한 것이 보인다.


고지도에 표기된 명량해전지를 현대 위성사진에 대입해 추정한 해전지 (위성사진 제공: Daum 지도)

『광여도』를 비롯한 지도에 표시된 전장은 기존의 전장 비정과 비슷하지만 『청구요람』에 표시된 전장은 기존의 전장비정과 비교하면 해협의 앞쪽에 있다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런 일련의 정보들은 서로 맞지 않지만 단편적이어서 해전의 경과와 종합해서 정리하면 답이 나온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선은 해전이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민서가 지은 《명량대첩비》는 명량해전의 시작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아가 명량 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이 이르자 적군의 망루(望樓)와 노(櫓)가 바다를 덮는 듯 하였다. 공은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뱃머리를 나란히하여 닻을 내리고 중류(中流)를 막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려누르는 듯하였다......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0권. 부록(附錄)2.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

여기서는 중류(中流)에서 닻을 내리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여기서 말하는 중류를 지금의 진도대교가 서 있는 곳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이다. 글쎄, 시간을 따지면 오전 6~7시 무렵에는 물살이 느려지기 때문에 명량해협으로 조선함대가 진입하는 것은 가능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곳은 물살이 빨라서 닻을 내린다 해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10노트의 내외의 유속이면 배를 정박하고 있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도대교가 서 있는 곳에 집착하기 보다는 중류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다시 일본측의 기록을 보면, 조선수군이 명량해협에서도 비교적 물살이 느린 곳에 정박하고 있었다고 했다. 명량해협 앞쪽에 있는 진도쪽 벽파진이라고 했지만 이곳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므로 그냥 '진도에 가까운, 해협에서 물살이 비교적 느린 곳'에 단서가 있다고 보인다. 다른 기록을 좀 더 보면, 전투가 한창이던 도중에 대해 '이때 아침 조수가 물러가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時早潮方退, 港口湍悍).....(재조번방지 4)'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토대로 기록들이 말하는 정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량해협의 중류 부근
-진도쪽에 가까운, 해협에서 비교적 물살이 느린 곳
-멀지 않은 곳에 항구가 있음

이를 단서로 지도를 보자. 고지도를 보면 녹진(鹿津. 綠津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현재 진도대교가 서있는 곳에서 약간 뒤쪽에 있는 항구이다. 명량해협에서 비교적 물살이 느린 곳에 위치해 있지만 물살이 거세긴 이곳도 마찬가지여서 해협의 앞에 위치해 있는 벽파정에 비하면 비중이 낮은 곳이다. 이곳은 진도쪽에 붙어있는데다가 《명량대첩비》가 말하는 명량해협 중류와도 거의 일치하는 장소이다. 고지도의 전장 비정도 이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처음 전투가 벌어졌을 때의 전장은 녹진 앞바다로 추정된다. 

녹진 앞바다와 기록과 고지도를 통해 추정되는 전장. (위성사진 제공: Daum 지도) 현재 전장으로 비정된 곳과 큰 차이가 없는 장소이다.

조선수군이 전장에 나가고 나서 얼마 뒤, 일본군이 해협으로 진입해서 조선수군을 포위했다. 형세를 놓고 보면 조선수군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이 상황이 명량같은 물목이 아닌 대해에서 벌어졌다면 조선수군은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포위공격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숫자가 많은 적이 공격하기 때문이 아니다. 적이 포위공격을 할 경우, 숫자가 1:10이건 1:100이건 전투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번에 상대하는 적은 제한되지만, 숫자가 적은 아군에 비해 적은 예비대를 편성해서 번갈아가면서 공격하여 아군을 지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량처럼 공간이 좁고 물살이 빠른 곳에서는 이렇게 번갈아가며 교대로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본군의 수는 조선군의 20배를 웃돌았지만, 명량의 지형과 물살은 숫적 우위의 이점을 크게 줄여놓았다. 실제로 조선수군이 한번에 상대할 적의 숫적 비율이 1:3 이하로 떨어져버린 것이었다.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우수한 선박과 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선수군에게 오히려 유리한 상황이었다. 관건은 조선수군이 적의 숫자에 동요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이순신역사연구회. 비봉출판사. 2006)에서 주장하는 명량해전도. 조선수군이 '날개를 접은 학익진'의 진형을 구사하면서 일본군과 맞섰다고 하는데, 조선수군이 일본군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조선수군이 가진 장점-하나의 요새와 같은 전선과 우수한 화력-을 구사하면서 협동할 수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명량해전 당시 조선군이 구사한 진형으로 첨자진이나 일자진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실 조선수군의 가장 큰 약점 두 가지는 숫적열세와 그에 따른 병사와 장수들의 심리불안이었다. 이를 염려했던 이순신은 전투 전날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영화라면 병사들이 감동하고 전투에서 영웅적 활약을 보이겠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눈앞에서 바다를 뒤덮는 적군의 수적우세에 질린 다른 장수들이 소극적으로 적을 막을 뿐 전진하려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대장선을 몰아 직접 선두에 섰다. 모든 군대에서 우수한 장비와 정예 군사는 지휘부를 중심으로 편제된다. 더욱이 조선수군은 숫자가 적었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정규적 편제와 무기를 갖춘 '해군'이었다. 이순신은 대장선이 직접 선봉이 되고, 사기가 떨어진 다른 부대들이 대장선을 지원하도록 전략을 바꾼 것이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와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마치 바람과 천둥처럼 맹렬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형세가 장차 어찌될 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로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고 하였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이 대목에서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엇갈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서 이순신의 대장선 한 척이 아니라 이순신이 이끄는 선봉부대 여러척이 분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의 앞뒤를 따져보면 중군장으로서 대장을 호위하여 임무를 수행해야 할 김응하도 뒤로 물러나 있던 것을 보아 이순신의 대장선 혼자 분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대장선 하나가 오랜 시간동안 버틸 수 있냐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당시 판옥선이 일본수군의 세키부네보다 크다는 것-더욱이 대장선은 다른 배들보다 크게 만든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능한 일이다.[4]
 
비록 판옥선이 적에게 포위되었지만,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은데다가 조선군의 강한 화력으로 인해 일본군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우리 배로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들 다해 쏘아라'는 말은 단순한 독전의 말이 아니었다. 일본군과 조선군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한 이순신이 아군의 이점을 믿고, 동요하지 말고 싸울 것을 당부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선과 화력이 우수하다 해도 대장선 홀로 적에게 포위된 상황이 좋을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휘하의 장수들을 바라보는 이순신은 속이 탔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바다에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하니 적들이 물러간 것을 틈타 더 대어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대장선이 긴 시간 버티고 있었지만 그대로 계속 갈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싸우다간 병사들이 지치고, 수적 열세에 밀려 대장선이 당하고 나면 남은 아군은 각개격파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물살이 느려질 시점이 되고 있었다.[5] 물살이 느려지면 일본군이 배를 운신하면서 도선하기는 더욱 쉬워진다. 대장선이 포위된 상태로 계속 싸우다가는 사방에서 도선을 시도하는 일본군 앞에 무너질 터였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렇다고 대장선이 뒤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도를 보면 이것이 이해가 된다. 조선수군이 지키고 있는 물목에서 뒤쪽인 양도 앞바다에서는 바다가 급격히 넓어져서 물살의 영향이 미미해진다. 이런 곳에서는 해류가 주는 이점을 이용한다는 전략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만약 이순신의 기함이 뒤로 물러서면 다른 배들도 뒤로 물러설 것이고, 일본군이 이 틈을 타서 명량해협 뒤쪽까지 밀고 들어오면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수군은 끝없이 달려드는 일본수군 앞에 전멸당하고 말 터였다. 
 
이에 이순신은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와 초요기(招搖旗. 사령관이 부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깃발)를 세웠다.[6] 장수들을 불러내기 위해서였다. 이에 안위가 먼저 달려오고, 중군장(中軍將) 김응함의 배도 이어서 달려왔다. 이순신은 달려온 장수들을 질책했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서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7] 또 김응함을 불러서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말하였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이순신의 질책을 받은 김응하와 안위는 공세에 나섰다. 이때 왜장(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지휘아래 왜선 2척이 안위의 배에 붙는데 성공했다.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게 지령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하였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수마석(물로 다듬은 돌) 덩어리로 마구 쳐서 막았다. 배 위의 군사들은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여 적을 쏘아 죽이니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안위의 판옥선에 배를 붙이는 데 성공한 왜군은 도선을 시도했다. 여기서 병사들이 몽둥이나 창, 수마석으로 막았다는 것에서 판옥선과 세키부네 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어떤 모습이 벌어지는지 잘 서술되어 있다. 판옥선의 선체가 높기 때문에 조선수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몽둥이나 돌로 내리치고, 긴 창을 잡는 등 성벽을 수비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있었다. 높이가 판옥선과 비슷한 아다케부네에서 도선하려들 때 이렇게 싸우다간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비록 판옥선의 선체가 높았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공격에 안위의 배에 탄 병사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안위의 배에 승선해 있던 격군 7~8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있었다'(난중일기 초고. 정유년. 9월 16일)고 한 것을 보면 일본군이 조금만 더 힘을 기울여 공격할 경우 일본군의 도선이 성공할 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8] 이 때 이순신의 기함이 달려와서 협공을 가해 안위의 배에 붙은 왜선을 격침시켰고,[9] 이를 보고 승세를 읽은 다른 장수들이 달려오면서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 때, 이순신의 기함에 타고 있던 항왜(降倭) 준사(俊沙)의 눈에 왜장이 들어왔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상 김돌손은 시켜 갈고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좋아 날뛰며 ‘정말,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시체를 토막내어 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사실, 이 부분은 이순신이 그간 해전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이순신은 해전에서 수하들에게 시체를 건져서 수급을 베는 것을 엄금하고 대신 적을 사살하는데 힘쓸 것을 당부했다. 전투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순신은 이 철칙을 깼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적장의 수급은 적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높여 전황을 유리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이순신은 적장의 시체를 건져 토막내어 내걸었다. 적장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로 추정된다)의 시체가 내걸리면서 이순신이 원하는 효과가 나왔다. 수적으로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수군의 공격에 아군 선봉대장의 목이 걸린 것을 본 일본군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주춤하던 해류가 동쪽으로 흐르면서 일본수군에게 역류(逆流)로 변했다. 일본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군에게는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 왔던 일본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걸 보고 있을 조선수군이 아니었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 난중일기 초고.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들어가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드디어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달아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 난중일기 초고. 속(續) 정유년(1597년). 9월 16일 -

이때에 아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갈 때여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람이 빨라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바로 적의 앞을 충돌하니, 적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였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든 배를 독려하여 잇달아 진격하여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순신이 돛대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니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므로.....(후략).....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4 -

순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안위의 뒤를 잇대어서 먼저 적선 삼십 일 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순신은 돛대를 치며 군사를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였다. 적은 죽도록 대들었으나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사를 다 몰아서 도망쳤다.
- 연려실기술 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일월록(日月錄)』 인용부분 -

적이 사면에서 안위를 포위하므로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突戰)하였고, 공은 제군을 독책하여 그를 후원하게 해서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약간 퇴각하였다. 그러자 공이 노를 치면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승승장구하여 진격하니, 적들이 죽기로써 소리만 외칠 뿐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치므로.....(후략)......
- 백사집(白沙集) 4권. 유사(遺事)편.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 -

사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간략하다. 기껏해야 '적이 우리에게 다시는 침범하지 못했다' 정도. 조선군에게 역류가 흐르고 물살이 주춤하던 시점을 마지막으로 해서 그 뒤로는 조선수군에게 전투가 수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순신이 느낀 안도가 아닐까 싶다. 12~1시를 기점으로 조선수군에게 순류로 흐르는 해류가 다시 역류로 바뀌는 시점은 유시(酉時. 오후 5~7시)무렵인데, 조선 수군은 이 시간이 될 때까지 흐르는 유속을 타고 최대한 일본 수군을 가격했다. 여러 기록에서 말하는 전투의 전개를 고려해 볼 때 『청구요람』에 표시된 명량해협 앞쪽으로 전장이 이동한 것이 이 시점으로 보인다.[10] 정작 이 부분에 대해 기록이 간략하지만 이때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이순신이 10여 척 병선으로 백만 정예를 쳐 쫓아, 적장이 혹은 패해 죽고 혹은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기는 면했으나 움츠리고 물러가 감히 꼼짝도 못했습니다. 
- 해상록 1권. 왜국(倭國)으로부터 부산(釜山)에 돌아와 닿은 날에 봉상한 소장(疏章) -

여러 왜장이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전라도우수영(全羅道右水營)에 당도하였는데, 이순신이 과선(戈船) 십여 척을 이끌고 힘껏 싸워 물리쳤습니다. 왜장 내도수(來島守)가 패전하여 죽고, 민부 대부(民部大夫)는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그 나머지 작은 장수도 죽은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습니다.
- 간양록. 적중 봉소(賊中封疏) -

이 때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도 부상을 당했다. 이는 일본측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선수의 배들은 적선에 노 젓는 사공(遭手)이 너무 많다. 그 중에 구루지마(來島出雲殿) 장군도 앉은 채로 전사해 있다. 그밖에 선수(船手)와 가로(家老)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모리(毛利民部) 장군은 세키부네(關船)에서 경비선(番船)으로 옮겨 탔다. (적은) 경비선(番船)에 열십자의 낫을 걸고 활과 철포를 마구 쏘아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 위험한 상황에 두 명의 도도장군(藤堂孫八郞. 藤堂勘解由)이 이끄는 배로 적선을 쫓아내고 목숨을 구했다......(중략)......도도(藤堂和泉守高虎) 장군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

장병겸(長柄鎌)과 사조구(四爪鉤). 조선수군이 근접전을 벌일 때 유용하게 쓰였던 무기들이다. (『이충무공전서』 권수(卷首) 도설(圖說)편에 실린 그림) 일본측이 '열십자의 낫'이라고 하는 무기는 이 그림의 사조구로 보인다. 

이 기록에는 일본 수뇌부가 입은 피해도 나와있지만 조선군이 일본군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세가 오른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의 배를 고정하고 사격-화살과 화포를 이용한 공격-하면서 일본수군을 몰아붙였다.(이런 사격전은 조선수군이 쓰던 전술의 기본형이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기록을 보면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사격 뿐 아니라 화공(火攻)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공은 조건만 따라준다면 적에게 짧은 시간 안에 물리적, 심리적으로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다. 더구나 당시 좁은 해협에 많은 수가 몰려들었던 일본수군은 역류 때문에 전열이 어지럽게 엉겼을 테고, 명량해전 무렵 그 지역의 기후조건을 고려해 보면 풍향이 일본군 쪽으로 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11] 혼잡하게 얽힌 전열과 적을 향해 부는 풍향은 화공에 있어서 최적의 조건이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 난중잡록 3. 정유년 9월 -

이러한 조선수군의 다각도적인 공격에 일본수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사령관이 부상을 당할 정도면 일본수군의 본대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7시)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했다. 

......아침 5시부터 저녁 6시경[유시(酉時)]까지의 전투였다. 바람도 잘 불어 해협을 빠져나가 선착장(진津)에 올리고 달렸다. 
-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

유시(酉時. 오후 5~7시)무렵, 전투는 끝났다. 조선수군의 대승이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면서 '미진한 신(微臣)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고 한 이순신의 장담이 허언(虛言)이 아닌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기창 화백이 1975년에 그린 명량해전 기록화. 독립기념관 소장




주석
 
[1] 수(數)라는 숫자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200~300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2] 명량의 물살은 오전 7시를 전후해서 1시간 가량 물살이 잠시 느려진 뒤, 다시 1시까지 북서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이를 감안해서 『임진왜란 해전사』(이민웅. 청어람미디어. 2004)에서는 오전 7시경 일본군이 어란진을 출발, 9~10시경 조선군이 전장으로 나와 진형을 갖추고 적을 기다린 것으로, 11시경 일본군이 진입해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측했다.(p.226~227) 그러나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 교수는 일본측 사료에 의거해 해전 시간을 오전 8시에서 오후 6시까지(진시(辰時. 오전 7~9시)에서 유시(酉時오후 5~7시)까지)로 정리했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기타지마 만지 저. 김유성, 이민웅 공역. 경인문화사. 2008) p.213)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이 전투 시작 시간을 아침 5시라고 한 것과 별망군이 이른 아침 일본군이 오고 있다고 한 것을 감안하면 5시는 일본군이 어란진을 출발한 시간, 8시는 전투가 시작된 시간으로 보인다. 두가지 가능성 모두 시간의 경과에 따른 물살의 변화에 부합하는 설명인데, 여기서는 시간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일본측 사료를 따랐다. 
 
[3] 조선 수군이 '정박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명량대첩비》를 보면 조선 수군이 닻을 내리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조선 수군이 닻을 내리고 일본군을 기다렸기 때문에 정박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4]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저판(底板. 배 밑바닥)의 길이가 10~11파(把)(약 15~16.5m)이고, 대형선의 경우 이 저판의 길이가 14파(약 21m)까지 길었다고 한다. 대게 대장선으로 쓰이는 배가 크게 만들어지고, 큰 배에는 더 많은 인원과 무기가 탑재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1척이 오랜 시간 버틴 것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5] 이순신의 질책 이후 안위와 김응함이 달려오면서 전투가 더욱 치열해지는데, 이때 일본군이 안위의 배에 도선을 시도하고, 조선군은 이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대게 백병전이 벌어지면 이를 담당하는 것은 격군들이다. 따라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그 전함은 기동력을 상실하는데,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다에서 적장의 시체를 건져서 내거는데, 물살이 일본군 쪽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원하는 시체를 건져내는 일은 매우 힘들다. 따라서 안위가 합세한 시점은 물살이 느려질 무렵으로, 물살이 다시 빠르게 남동쪽으로 흘러가는 시점은 구루지마의 시체가 내걸린 이후의 일로 보인다.
 
[6] 이분의 《행록》(이충무공전서 9권. 부록 1)은 이 때 이순신이 머뭇거리는 장수를 베었다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없어서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의문이다. 

[7] 많은 글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안위를 비루하고 비겁한 인물로 묘사하는데, 안위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안위에게는 배경적 결함이 있었다. 그는 정여립의 5촌 조카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장형에 처해진 뒤 유배된 적이 있었다. (선조실록 139권. 선조 34년 (1601년) 7월 30일) 이런 배경을 가지고 공직자-특히 군인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나중에 승진까지 한 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능력과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비록 명량해전 때 수적열세에 질려 뒤로 물러나있기는 했지만,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을 불렀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분전했다. 그는 이 공로로 전라우수사로 승진했고, 이항복도 《꿈을 기록하다(記夢)》-『백사집』 별집 4권 잡기(雜記)편에 수록-는 글에서 안위에 대해 크게 칭송했다. 

[8] 일본군이 휘둘러대는 일본도와 그에 따른 백병전 능력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일본군(왜구)이 도선에 성공하는 순간 배 위의 조선군 전원이 배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늘 그런 건 아니지만) 이때 격군들이 바다로 뛰어든 이유도 일본군의 도선이 거의 성공할 뻔했던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9] 이 부분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빅토리(Victory)와 테레메르(Temeraire), 프랑스의 르두터블(Redoutable)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연상하게 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 포스팅 <명량해전(명량대첩)에 대한 고찰-1>의 [2] 참고. 
 
[10] 일본측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경비선에 열십자의 낫을 걸고 활과 철포를 마구 쏘아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고산공실록』)고 하고 있다. 조선군이 일본군을 먼 바다로 몰아붙였다는 기록을 비롯해 『청구요람』에 표시된 전장, 전투의 전개 등을 고려해 볼 때 전장이 이동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인다. 

[11] 가을철 오후 시간대의 명량해협에는 서풍이 분다. 전투 상황을 놓고 보면 조선군→일본군 방향으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이때 부는 바람에 대해 장유(張維 1587~1638)는 '저녁 나절 급해지는 창합풍 소리 / 엎치락 뒤치락 바다 물결 벽파정에 부서지네(閶闔風聲晚來急 / 浪花翻倒碧波亭)'(『계곡집』 33권. 칠언절구편. 《진도 벽파정(珍島 碧波亭)》 중에서)라고 읊었다. 여기서 창합풍이란 태괘(兌卦)의 바람, 즉 정서풍(正西風)으로 가을바람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율서(律書)편 참고)
 
------------------------------------------------------------------------------------------------------

이런 저런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다음 것을 올릴 때 까지 시간이 늦어졌습니다.(ㅠㅠ) 그런데 정리하다보니 이순신이 전략을 짜면서 해류 뿐만이 아니라 풍향까지도 고려해서 전략을 구상한 것으로 보이네요. 
이걸 보니 문득 시구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통달했고/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본래는 612년 고구려-수나라 전쟁 당시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조롱하면서 쓴 시구인데, 이것이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보여준 전술은 위의 시구가 '실제로' 해당되는 경우로 보입니다......ㅎㄷㄷ
 
다음 것도 정리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조선수군의 전체적 개괄에 대해 정리하고 있는 시리즈도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명량해전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2261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