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523180.html
땅이름/ 국내성 ⓛ
최범영 2006-06-27 16:45:34
옛날에 교제(郊祭)라는 제사가 있었다. 동지에는 남쪽 성밖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하지에는 북쪽 성밖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다. 서기 1년에 유리왕의 태자 도절이 죽었다. 서기 2년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 사람을 시켜 찾게 했는데, 국내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서야 찾아냈다. 이때 돼지를 좇아간 장생과 설지는 유리왕에게 “국내성 위나암이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은 기름져 오곡을 키우기 알맞고 여러 동물들이 많이 나는 것을 보았다”며 서울을 옮길 것을 주청하였다. 서기 3년 겨울 10월에 유리왕은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국내’(國內)는 불이성·불내(不而城·不耐)라고도 하였다. 옛말로 나라(國)라는 말은 ‘불’이었다. 나머지 글자 內·而·耐(내·이·내) 가운데 內와 而는 비슷한 글자로 본다면 셋의 소릿값은 ‘노/나이’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불이(不而)를 함흥의 옛 땅이름으로 보았으며, 〈삼국사기〉가 중국의 사서를 추종하는 데 머물렀다고도 하였다. 고구려의 서울 국내성의 본디 이름은 ‘불노/불나이/부노/부나이’ 중 하나다. 평양(平壤)은 요즘의 ‘벌’(平)과 고구려말 ‘노’(壤)로 보면 ‘벌노/버노’로 볼 수 있는데, 국내성과 평양은 위치는 다르나 같은 소리인 ‘불노/부노’였을 것으로 보인다. ‘불노/부노’는 단지 ‘서울’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였다. ‘골본/졸본’(忽本/卒本)의 ‘본’도 아마 서울과 관련된 말인 듯하다.
압록강 건너 길림성 집안현 위나암성은 전란에 대비한 국내성 북쪽에 있는 산성이다. 삼국사기에서 위나암성이란 말은 서기 28년까지만 나타나고 환도성은 142년 뒤부터 나타난다. 2세기에 위나암성을 환도성으로 바꾼 듯하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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