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15736552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고구려 2대 유리명왕(2) - 광인"에서 위나암성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위나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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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고구려 2대 유리명왕(2) - 광인"에서 위나암성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위나암성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曰 “臣逐豕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麋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21년(AD. 2) 봄 3월에 교제에 쓸 돼지[郊豕]가 도망쳤다. 왕은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찾아내서 국내 지방 사람의 집에 가둬 기르게 하고, 돌아와 왕을 뵙고 아뢰었다. “제가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수도를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 4월에 왕은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9월에 왕은 국내로 가서 지세를 보고 돌아 오다가 사물택(沙勿澤)에 이르러, 한 장부가 진펄 위의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왕에게 말하였다.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왕은 기뻐하면서 허락하고, 사물(沙勿)이라는 이름과 위(位)씨 성을 내려 주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하여튼 돼지 덕분에 할일이 꽤 많다. 왕이 병에 걸리지를 않나, 이제는 수도까지 옮기지 않나.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돼지 때문에 정해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가는 바람에 그 돼지를 쫓아서 도착한 국내성이 너무 살기 좋아서, 그곳을 수도로 정하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고 전쟁 걱정도 면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신하 설지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 왕은 수도를 옮긴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22년(AD. 3)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드디어 국내성 천도가 이루어졌다. 지세를 돌아보고 온지 겨우 13개월만에, 추모성왕 이래의 수도에서 떠나 유류왕은 국내성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삼국사》 지리지에서 말한 바, 동명성왕 추모가 흘승골성에 도읍한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국내성의 다른 이름은 위나암성(尉那巖城) 혹은 불이성(不而城)이었다. 《삼국사》 지리지에서는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按漢書, 樂浪郡屬縣有『不而』 又緫章二年, 英國公李勣奉勅, 以高句麗諸城, 置都督府及州縣, 目錄云 『鴨淥以北, 已降城十一, 其一國內城, 從平壤至此十七驛.』 則此城亦在北朝境內, 但不知其何所耳.]
《한서(漢書)》를 살펴보건대 낙랑군(樂浪郡)의 속현에 불이(不而)가 있다. 또한 총장(緫章) 2년(669)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을 받들어 고구려의 여러 성(城)에 도독부(都督府)와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는데, 그 목록에 이르기를 『압록(鴨淥) 이북의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요, 그 중의 하나가 국내성인데, 평양에서부터 이 곳까지 17역(驛)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성도 북조(北朝)의 경역 안에 있었던 것이나, 다만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 권제37, 지리지6, 고구려
안정복 영감이 빠질 수야 있나. 참으로 친절하게도(?)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그럴듯한 주장을 해놓으신 것이 《동사강목》에 실려 있다.
유리왕 22년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상고하건대, 《여지승람》에, “이산군(理山郡) 북쪽 2백 70리에 우라산성[兀剌山城]이 있다. 압록ㆍ파저(婆猪) 두 강 사이의 큰 들 가운데 있는데 사면이 벽처럼 높이 솟았다.” 하고, 《고려사》공민왕(恭愍王) 19년 조에, “동녕부동지(東寧府同知) 이오르티무르(李兀吾帖木兒)가 우라산성에 의거하였다.” 하고 유계(兪棨)는, “이것이 옛날의 위나암성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중국어[漢音]로 ‘兀剌’과 ‘尉那’가 음이 같으니 그 말이 가깝고 비슷하다. 《삼국사기》에 보인 이적의 주문(奏文)에, “압록 이북의 항복한 성 가운데 국내성(國內城)이 그 하나인데, 평양성에서 여기까지는 17역입니다.” 하고, 《통전》에도, “압록강은 국내성 남쪽을 지나고 또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쳐진 다음에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 두 설에 의하면, 그것이 압록강 북쪽에 있어 우라성(兀剌城)으로 전하였음이 분명하다.<염난수는 곧 파저강이니, 비류고(沸流考)에 보인다.> 국내라고 한 것은 아마 졸본 기내(畿內)의 땅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리라. 교제 지낼 돼지[郊豕]를 놓쳐 달아난 까닭에 이것을 얻었으니, 돼지가 아무리 달려서 도망쳤다고 해도 쉽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천 리나 백 리 되는 먼 거리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국내 위나암성이 졸본과 서로 가까웠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인주(獜州)를 국내라 한 것은 아마 나중에 따로 둔 것이리라. 《삼국사기》에 “《괄지지(括地志)》에 국내를 불내성(不耐城)이라 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의 낙랑 동부(樂浪東部)에 있는 불이현(不而縣)은 딴 이름이니, 이것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 中 '국내위나암성고(國內尉那巖城考)'
《동사강목》에서 안정복 영감은 김부식이 국내성의 위치를 말하면서 들먹인 '불이'라는 이름은 국내성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혼동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안정복 영감이 국내성의 위치로 비정한 곳은 우라산성ㅡ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하추를 무찌르고 여진을 토벌하기 위해서 올랐던 곳으로 지금의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 바로 그곳이다.(우리가 지금 졸본이라고 알고 있는 그곳) 안정복 영감이 지금의 시라무렌 강에 해당하는 염난수를 파저강으로 혼동한 것은 실수이긴 한데, 주장을 들어보면 우라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한 것에 대해서는 안정복 영감도 나름 근거가 있다.
옛날에는 '나라=수도'라는 등식이 으레 성립하곤 했다. '신라'라는 나라를 말한다고 신라가 차지한 전 국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라가 도읍하고 있는 '수도' 경주 한 곳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안정복 영감은 흥경(심양) 동남쪽에서 졸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졸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발음상으로도 가장 그럴듯한 곳, 돼지가 도망칠 수 있는 거리 안에서 국내성의 위치를 찾았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오녀산성이었다. 맞는지 아닌지는 내가 모르지만, 요양이나 심양을 홀승골성으로 잡더라도 환인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결코 아닐텐데, 참 멀리도 갔다. 고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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