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mahan.wonkwang.ac.kr/nonmun/2008non/1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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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조각과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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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원광대 http://tadream.tistory.com/7738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3. 발해의 문화" 중 "2) 조각과 공예"을 가져오고 내용에 맞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3. 발해의 문화" 중 "2) 조각과 공예"을 가져오고 내용에 맞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발해의 조각과 공예
불교는 고구려 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그 전통을 이어 받은 발해에도 역시 불교가 계승되었지만 다른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발해의 왕자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절에 가서 예물하기를 원했다는 기록47)이 있고, 814년에 사신을 통하여 당에 금불상과 은불상을 바쳤던 일48)도 있다. 이러한 근거들로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건국 초부터 왕실에서 불교를 신봉했으며, 불상 제작도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3대 문왕 대흠무가 말년에 사용하던 존호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인 것을 보면 그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대흥’과 ‘보력’은 당시 사용되던 연호들이고, ‘효감’은 유교적 덕행과 관련된 것들이며, ‘금륜’과 ‘성법’은 불교 용어이다. 금륜은 금륜왕의 약칭으로서 부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통일시킨다는 전륜성왕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법이란 올바른 진리 또는 부처가 설법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특히 대흠무의 불교 숭배 사상은 정효공주묘 위에 건축되었던 묘탑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무덤 위에 탑을 세우는 묘탑장(墓塔葬)은 발해 사람들의 전통적인 장례 습관이 아니었고, 불교의 성행과 함께 묘탑장이 성행했던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49)
현재까지 알려진 발해의 불교 유적으로는 상경성에서 발견된 10여 곳의 절터와 그 밖에 중경과 동경이 있었던 지역,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함경북도 명천군 등에서 발견된 절터등이 있다. 발해의 절터들이서는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불상의 재로도 석불(石佛), 철불(鐵佛), 금동불(金銅佛) 또는 동불(銅佛), 전불(塼佛), 소조불(塑造佛), 건칠불(乾漆佛) 등 아주 다양하게 사용되었다.50)
발해의 금속 공예는 금 · 은 · 동 · 철 등의 금속을 사용하여 만든 사리장엄구와 각종 장신구, 그릇, 무기 등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헤이룽장 성 영안현 상경성유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함경북도 화대군 정문리 창덕 3호분에서 출토된 태환식 귀고리, 육정산 고분에서 나온 팔찌, 창춘 박물관 소장의 금동허리띠장식 등을 들 수 있다.
발해의 불교가 융성했던 나라였던 만큼 부처님 사리를 봉안했던 사리장엄구 또한 제작되었다. 최근 발굴을 통해서 알려진 발해의 사리장엄구는 대체로 당대 후기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현존하는 발해 사리장엄구 중에서 가장 완전한 세트는 1975년 헤이룽장 성 영안현 토태자사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사리장엄구는 2중 석함 · 철함 · 동함 · 칠갑(漆甲) · 은함 · 은병 · 유리병 등 모두 8중 용기로 구성되어 있다. 2중 석함은 사리장엄구르 사용했던 것은 중국에서는 수(隋) 대부터 보이는 형식으로, 발해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발해에서 발견된 또 다른 사리장엄구는 헤이룽장 성 상경서유지에서 출토되었다. 여기에서는 또껑 모서리를 모죽임51)한 장방형의 녹정형(盝頂形) 사리석 함안에 같은 형태의 동함, 금동함, 은함, 금함과 유리병이 차례로 매납되어 있었으며, 사리가 함께 발견 되었다. 석함과 동함 사이에 칠기 파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7중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장엄구의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 문양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출토된 발해의 사리장엄구는 완형을 갖춘 경우에는 대체로 6,7중에 이르는 다중용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 형식은 녹정형 뚜껑을 가진 방형 함이 주류를 이룬다. 재질은 석 · 동 · 은 · 금 등이 기본적인 구성이지만, 2중 석함의 예나 금동함, 칠기 등이 함께 사용되었다. 이러한 장엄(莊嚴) 방식은 9세기 후반의 당 대 불사리(佛舍利)52) 장엄 방식을 따른 것으로서 주목된다.53)
창덕 3호분에서 나온 태환식 귀고리는, 발해의 귀고리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그 귀고리는 순금 판을 둥글게 말아서 만든 큰 고리, 금동의 중간 고리, 순금 판으로 만들어진 표주박 모양의 끝 장식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태환식 귀고리는 고구려, 신라, 가야에서도 유행하였다. 특히 표주박 모양의 끝 장식은 가야의 귀고리들 중에서도 종종 확인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54)
한편 발해의 관복 허리에는 대(帶)를 둘렀다. 발해의 남자들이 사용했던 대는 과대(銙帶), 혁대(革帶) 두 종류가 있었다. 과대는 직물이나 가죽으로 된 대의 겉면과 과판(銙板)을 붙여 만든 금속제 띠로, 대의 끝에는 버클 형태의 대구(帶鉤)를 걸어 띠를 고정시켜 착용하였다. 중국의 지린성, 레이룽장성 등지, 러시아 연해주, 북한의 함경도 등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당시 발해 지역에서 출토된 과대는 거의가 가죽에 금동 · 청동 · 철 등의 과편을 붙여 제작한 것이다.55)
발해에서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전통적인 토기와 유약을 바른 자기들이 비교적 다양하게 제작되고 사용되었다. 발해 전반기의 토기는 크게 보아 입이 밖으로 벌어지고 배가 불룩한 고구려계와 입술이 두 겹이고 몸이 긴 형태의 말갈계로 나누어진다. 그 토기들은 대부분 손으로 빚고 물레로 다듬어진 것이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토기의 색깔은 회색과 회갈색을 띤다. 발해의 토기와 자기의 형태는 잔, 접시, 사발, 주발, 바리때, 동이, 소반, 목 긴 병, 세발 달린 그릇, 시루, 두레박 등 다양하다. 또한 문양은 줄무늬, 새끼줄무늬, 그물무늬, 마름모꼴무늬, 물결무늬, 인동문, 보상화문(寶相華紋)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발해의 토기와 자기는 시대가 흐르면서 중국 당대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하게 되었다. 유약을 바른 백자, 청자, 녹유청자, 삼채(三彩) 도기 등이 등장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발해의 토기와 자기는 고구려계, 말갈계, 당나라계 등 크게 세 가지 계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깨져서 거칠게 복원된 것들이어서 형태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하나 미술적 가치는 떨어진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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