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rc.khu.ac.kr/kor/bbs/bbs_download.php?idx=1914&file_no=1 (문서파일)
"동해의 거친 풍랑을 무릅쓴 발해와 일본의 교류 - 구난희"에서 문화관련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와의 교류로 일본 문화 폭 확대
 
양국의 교류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과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교류를 통해 상호 교감과 우호를 증진시키고 문화의 폭을 확대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발해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경우 으레 연회가 이루어졌다. 연회에서는 음악과 향연이 이루어졌다. 연회는 대개 음악연주로 시작되었는데 발해사신단에 악사들이 포함되어 파견될 경우는 직접 발해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740년 이진몽(已珍蒙)의 경우 직접 발해악을 연주하여 일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의 우치오(內雄)가 발해로 와 발해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1171년 편집된 일본쟁(箏)악보집인 『인지요록(仁智要錄)』고려악편에는 3수의 발해악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입수된 발해음악이 일본 내 궁정악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연회에선 여악이라 불리우는 여성 무용단의 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759년 양승경의귀국에는일본무희 11인이 동행하였고(이들 무희들을 후에 당으로 보내진다.) 883년 배정(裵璆)의 파견 때 이루어진 연회에서는 148명의 여악이 출연한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연회에 매우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았던 것 같다. 883년 기록에 보면 2월에 발해 사신에게 음악을 관람하도록 하기 위해 린유(林邑) 악인 107인을 다이안지(大安寺)에서 음악을 익히도록 하고 그 식량을 아마토국(大和國)의 세금으로 지급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함께 양국 문인들간의 한시 교류는 문화 교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발해측에서는 양태사(楊泰師), 왕효렴(王孝廉), 배정과 같은 당대의 문호들이 사절단에 포함되었다. 일본측에서도 당대의 최대 문사라 할 수 있는 스가와라미치자네, 오에아사쓰네(大江朝網), 시마다타다오미(嶋田忠臣)등이 참여했다. 이들에 의해 교환된 시문은 현재 관가문장(菅家文章) ,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 고야잡필집(高野雜筆集) 등 일본의 고대 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발해 문학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시마다타다오미는 배정의 시에 크게 감탄하여 칠보지재(七步之才) 즉 일곱 걸음을 걸으면 훌륭한 시를 짓는 천재라고 칭송하였다. 
 
그 밖에도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친 발해 교류의 산물은 바로 선명력(宣明曆)이다. 선명력이란 대음태양력(大陰太陽曆)으로서 1년을 365.2446으로 계산한 역법의 하나였는데 859년 발해대사 오효신(烏孝愼)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발해가 이를 수입한 것은 822년 당으로부터였으며 이후 발해에서는 71년간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발해를 통해 수입한 선명력을 1684년 정향력(貞享曆)이 채용되기 전까지 사용하였으니 무려 82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사용하였다.  그 밖에도 일본에 있어서 발해와의 교류는 당과의 간접적 접촉과 견당 인사들의 연계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절실했다. 발해 사신의 귀환 시 견당 유학생과의 연락이나 동행, 표류한 견당사의 무사 귀환 등 당과의 연결을 중개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부탁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일본사신을 동행하는 사례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894년 공식적으로 견당사가 폐지되면서 대륙과의 연계는 거의 발해에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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