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97627
파사석탑은 정말 가야시대의 것일까?
[가야문화권 답사 03] 김해 수로왕비릉 내 파사석탑
09.08.17 11:10l최종 업데이트 09.08.17 11:10l송영대(greenyds)
김해 수로왕비릉에 가면, 수로왕비릉의 앞에 자그마한 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은 그냥 일곱 개의 돌이 차곡차곡 쌓아 놓은 모양일 뿐이지만 의외로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체적으로 붉은 빛을 띠고 있기에 다른 석탑들에 비해 매우 독특하게 다가온다.
이 탑의 이름은 파사석탑이라고 하며, 파도를 진정시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한다. 희한한 이름처럼 그 연원 또한 매우 깊은 탑이다. 이 파사석탑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시조 수로왕의 비인 황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建武) 24년 무신(48)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해 가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은 이 탑을 싣고 가라 했다. 그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
위의 기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으로 대략적인 파사석탑의 연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 위치를 수로왕비릉이 아닌 호계사라고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그 위치가 호계사에 있다고 써 놓고 있다.
파사석탑(婆娑石塔). 호계(虎溪) 가에 있으며 5층이다. 돌 빛이 붉게 아롱졌으며 질은 좋으면서 무르고, 조각한 것이 배우 기이하다. 전설에는, 허왕후가 서역(西域)에서 올 때에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 한다.
이를 통하여 조선 중기까지는 파사석탑이 지금과는 다른 호계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언제 호계사에서 수로왕비릉으로 옮긴 것일까? 바로 1873년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수로왕비릉 근처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허황옥이 들여온 파사석탑, 과연 가야불교의 시초일까?
▲ 수로왕비릉과 파사석탑. 정면의 수로왕비릉의 앞쪽 보호각엔 파사석탑이 있다. ⓒ 오은석
파사석탑의 기이한 생김새를 보고 있다면 여러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문은 과연 이게 가야시대의 석탑인가의 여부이다. 석탑이라는 존재는 불교의 존재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차분한 접근이 필요하다.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은 1백50여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전해오지 않아서 그 지방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가락국 본기>에도 절을 세웠다는 글은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애초에 허황옥과 함께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실 허황옥과 파사석탑을 통하여 남방불교가 가야에 들어온게 아니냐는 의견들이 더러 있었지만, <삼국유사>만 유심히 살펴보아도 이와 불교 전래는 별개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에 이르러 처음으로 그곳에 절을 두었다. 또 왕후사를 세웠는데-아도와 눌지왕의 시대에 해당되니, 법흥왕 전의 일이다-지금까지도 복을 빌고 있으며 아울러 남쪽 왜국을 진압시켰는데 그 사실이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이 또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수로왕보다 후대에 비로소 불교가 전래되었고,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일연의 말 그대로 <삼국유사>에는 허황후의 명복을 빌고자 수로왕과 허황옥이 결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액자(額子)에 왕후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밭 10결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도록 했다고 한다.
▲ 허황옥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이 세웠다는 장유사. 물론 후대에 윤색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 김환대
그러나 이 왕후사는 장유사로 인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왕후사가 생긴지 5백년 뒤에 장유사 측에서는 왕후사를 없애고 장사(莊舍)로 만들어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읽으면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보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훼손시키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문화재들이 외세의 손에 의해서만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금관가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그러한 기록에 의문을 품고 있다. 정작 불교와 관련된 금관가야의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장유사를 세웠다고 하여, 이를 가야불교의 시초로도 보지만 그에 따른 근거는 부족하다.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가 그 근거지만, 가야시대의 것이 아닌 훨씬 후대의 것이기에, 후대의 윤색이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즉 금관가야의 불교를 지금 있는 자료들로서는 확신하긴 힘든 상황이다.
파사석탑, 정말 가야시대의 석탑일까?
▲ 파사석탑.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석탑이라 한다.(경남문화재자료 227호) ⓒ 오은석
그럼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파사석탑은 정말 가야시대의 석탑일까? 이에 대해서는 차분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파사석탑은 훼손이 매우 심하여 그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대략적인 모습은 기록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탑은 사면이 5층으로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며,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므로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 <본초>란 책에 이른 닭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위의 기록 또한 역시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이를 보면 당시에도 그 기묘한 조각이 매우 인상 깊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조각의 흔적을 약간씩만 확인할 수 있고, 그나마 옥개석에서만 볼 수 있다. 기단부나 탑신부의 조각들은 남아있지 않는데, 아마 그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보니 이를 욕심낸 누군가에 의하여 사라진 게 아닌지 추측해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화재에 대한 훼손이 자행됬다면 그만큼 씁쓸한 일도 없으리라.
▲ 파사석탑 세부사진. 하대석 위에 쌓아진 돌들. 붉은 빛이 감도는 독특한 돌들로 세워졌다. ⓒ 오은석
지금의 파사석탑은 앞서 말했듯이 7개의 돌이 쌓아진 모양새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게 정확한 복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파사석탑의 가장 아랫부분은 연꽃이 아래로 펴져있는 모양, 즉 복련(覆蓮)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런 모양은 주로 석등의 하대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의아한 느낌이 든다. 사실 탑이라면 안정적인 기단석이 있어야하지만, 파사석탑에서는 유실된 모양인지 그러한 기단석을 찾기 힘들다. 이곳에 있는 복련의 하대석은 아마 후대에 복원하면서 근처의 석등과 함께 짜 맞추었기에 생긴 오류로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6개의 돌이 쌓아져있다. 기록에서는 5층탑이라고 하였으므로 아마 돌 하나는 우주석이 아닌 탑신석이나 노반(露盤)으로 생각된다. 옥개석으로 추정되는 돌 중에서 아래의 1층과 2층의 돌에만 조각이 남아 있고, 다른 돌들은 훼손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 파사석탑 세부사진. 아랫부분은 석등의 복련형의 하대석을 쓴 것으로 보이며, 그 위의 추정 옥개석은 흡사 다포를 닮았다. ⓒ 오은석
1층과 2층의 추정 옥개석 중 1층의 돌이 더욱더 조각이 섬세하게 남아있다. 앞서 옥개석으로 추정된다고 하였지만 상대갑석(上臺甲石)이나 갑석부연(甲石副椽)일 가능성도 있다. 이 돌의 가장 큰 특징은 섬세한 조각이 남아있다는 점인데,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 꼭 목조건축에서 공포(栱包)를 보는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다포식(多包式)이라는 형식을 연상시킨다.
별거 없는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파사석탑의 성격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생긴다. 조각이 다포식을 표현한 것이고, 그 아래에 우주와 탱주가 놓여 마치 목조건축처럼 생긴 석탑이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면 그 모습은 매우 화려하고, 또한 독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과연 파사석탑이 가야의 것인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생긴다.
일단 다포식을 표현한 것이라 친다면 그 시대는 고려 후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다포식은 중국에서는 요나라 때 발생하여 송나라와 원나라 때 널리 쓰였다. 우리나라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들어왔으며, 이 당시엔 그러한 영향들을 바탕으로 독특한 석탑들이 많이 조영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내에 있는 국보 86호인 경천사십층석탑 등이 이러한 예에 속하며 이는 당시 활발한 교역이 예술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에 속한다.
그럼 파사석탑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기존의 가야시대 석탑이라는 이야기와는 별도로 그보다 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목탑의 양식을 상당수 반영하였고, 이를 표현한 매우 아름다운 조각들이 시대가 혼란해 짐으로 인하여 파괴나 도난이 되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잔해들은 그러한 훼손의 추억을 지닌 쓸쓸한 잔해인 것이다.
파사석탑은 진기한 모양새 때문에 관심을 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단순히 전설 속에만 자리를 꿰차게 하기보다, 그에 대한 역사성을 파악하여 잠에서 깨우는 것도 후손된 도리가 아니나 싶다. <삼국유사>에 적힌 파사석탑에 대한 시로 글을 맺어본다.
탑을 실은 붉은 배의 가벼운 깃발
덕분에 바다 물결 헤쳐왔구나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옥만을 도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침략을 막아왔구나
덧붙이는 글 | 6월 23일에 갔다온 수로왕비릉 중 파사석탑에 대해 자세히 다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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