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95391
아유타국에서 온 신비의 공주님을 찾아서!
[가야문화권 답사 02] 김해 수로왕비릉
09.08.13 10:29l최종 업데이트 09.08.13 10:29l송영대(greenyds)
6월 23일. 드디어 답사 첫날이다. 계획으로만 짜 놓았던 답사를 실제로 한다는 점에서 다들 흥분해 있었다. 우리는 일단 두 팀으로 나눠 김해 진영역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나와 정동귀군은 기차로, 김사현군과 오은석군은 렌트카를 가지고 진영역으로 오기로 한 것이다. 오전 11시 정도가 되어 우리는 진영역에서 내리고, 김사현군과 오은석군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움의 인사를 마친 후, 우리는 서로의 짐을 렌트카의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오늘 일정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미리 메신저를 통하여 대강의 일정을 잡아 놓았는데 점심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일단 박물관은 시간을 많이 체류하니깐, 유적지를 우선으로 가자. 수로왕비릉을 먼저 가는게 어떨까?"
운전대를 잡은 김사현군의 제안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비게이션으로 수로왕비릉을 입력하고 그에 맞춰 이동하였다.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다. 김해는 개인적으로는 4번째 방문이라 크게 낯설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2번 왔었고, 대학생이 되어 답사 차원으로 한번 왔었다. 그리고 오늘은 5박 6일의 일정을 시작하는 출발지로서 김해로 오게 되었다.
수로왕비릉 주차장, 그 곳의 비밀을 아시나요?
▲ 수로왕비릉 앞 주차장. 평범한 주차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곳은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마을유적이 있던 곳이다. ⓒ 오은석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분 정도 만에 도착하여 수로왕비릉 앞의 주차장에 차를 대놓았다. 마침 우리가 차를 댄 곳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주로 마을과 관련된 유적으로 보이는데, 환호, 도랑, 주혈 등이 나왔다고 한다. 환호란 마을 주위를 판 도랑을 일컬으며, 주혈은 기둥구멍을 말한다. 즉 이를 통하여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잇는데, 그 규모를 보아 청동기시대 당시에는 제법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즉 이곳엔 큰 마을 혹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된 마을이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 이러한 추정과 함께 수로왕비릉을 보아야 할까? 사실 수로왕비릉의 근처에는 구지봉이 있다. 구지봉은 가야의 건국신화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서, 이곳에 구간이 올라가 구지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럼 그 구간이라고 하는 이 지역의 지도자들이 거처하던 마을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 그 흔적을 쉽게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누구도 쉽게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학문이 바로 고고학이 아니었던가!
홍살문을 지나 수로왕비릉의 입구에 섰다. 책으로만 보던 수로왕비릉의 모습은 어떨까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로왕비릉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는데, 여름철이라 한참 자라나는 잔디를 깎고 있는 분들이 더러 보였다. 입구에서 정면에 수로왕비가 묻혀 있다고 하는 큰 무덤이 있으며, 이보다 앞에서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있다. 그보다 좀 더 앞쪽에는 관리사 대문이 있는데, 이를 넘어 들어가 보면 고직사와 돈종문, 그리고 숭보재가 자리 잡고 있다.
국제결혼 수로왕 커플, 알고 보면 연상연하?
▲ 허황후 영정. 수로왕의 부인인 보주태후 허황옥의 영정. 현재 수로왕릉 숭선전에 모셔져있다. ⓒ 선현의 표준영정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기록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 유리왕이 중국인인 치희와 결혼한 게 조금 더 앞선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를 대략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에 따르면 구간 등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좋은 배필을 얻어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자, 수로왕은 하늘의 명령으로 짝이 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신하를 시켜 망산도(望山島)와 승점(乘岾)에서 기다리게 하니, 정말 서남쪽에서 붉은 기를 휘날리는 배가 오고 있었다. 이를 들은 구간 등이 그들에게 찾아가 모시려고 하나, 배 안에 있던 허황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가겠느냐?"
그러자 수로왕은 이를 옳게 여겨,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 장막을 쳐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왕후 또한 나루터에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자신이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그리고 둘은 만나게 되며 왕은 허황옥과 함께 온 사람들에게 여러 선물들을 준다. 수로왕과 허황옥은 침전으로 가고, 허황옥은 수로왕에게 자신의 이름과 이곳으로 온 사연을 말하였다.
허황옥은 본디 아유타국의 공주로 열여섯 살이라고 한다. 본국에 있을 때가 올 5월로 부왕과 모후가 하늘의 상제가 가락국의 수로와 결혼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상제의 말에 따라 허왕옥을 보내 가야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수로왕은 자기 또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서 둘은 혼인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허황옥은 보주태후(普州太后)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 허왕옥을 맞이하는 수로왕의 태도가 자연스럽고, 또한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수로왕의 나이를 말하면 누구나 놀란다. 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의 나이는 7살. 16살이던 허황옥과는 무려 9살의 차이가 나는 연상연하 커플이다. 물론 신화적인 이야기고, 허황옥이 158세, 수로왕이 159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들어보면 그대로 신용하긴 어려워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조선시대의 문헌인 허목의 <미수기언>이나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는 천축국, 즉 지금의 인도라고 나온다. 그러나 인도에서 가야까지 오기엔 현실적으로 무리가 많다는 점,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허황옥이 아유타국을 출발한 때는 5월이며, 가야에 도착한 때는 7월이기에 이 기간 만에 인도에서 가야로 오기는 힘들다는 점 등을 생각한다면 다른 쪽에서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주로 그 위치를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찾고 있다.
수로왕비릉, 과연 허황옥의 무덤이 맞을까?
▲ 수로왕비릉 가야를 세운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사적 제 74호) ⓒ 김사현
수로왕비릉이 과연 허황옥의 무덤이 맞을까? 이 대답에 확실한 대답을 하는 이는 없지만, 사실은 아니라고 보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수로왕의 무덤과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주위에 구산동 고분군이 있고 입지 조건이 일부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겉보기에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 즉 둥글게 흙을 쌓아 다진 무덤으로 보는데, 내부는 토광묘(土壙墓)나 석실묘(石室墓)로 보기도 한다.
수로왕비릉에서 불과 100m정도 떨어진 구산동 백운대 고분 또한 석실묘이고 신라시대의 분묘이기 때문에 수로왕비릉도 비슷하게 추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야의 건국신화가 얽힌 구지봉과 인접해 있다는 점, 그리고 기록대로 수로왕릉과 1리 정도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허황옥이 묻힌 곳이 맞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를 확실히 확인하기가 힘들다. 이미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게 수로왕릉과 함께 도굴 당했으며, 내력이 얽힌 무덤이기에 쉽게 발굴하기가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 수로왕비릉이라는 이름으로 그 미스터리를 간직해야 하는 신세다.
수로왕비릉은 조선시대 세종 28년인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인조 25년인 1647년에 영남관찰사인 허적(許積)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원형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장대석을 사용하여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 새겨져 있다.
허황옥을 외국인이라고 보는 견해는 거의 수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하여 김해의 수로왕과 해양의 허황옥 세력이 결합하여 번성하던 무역국가인 금관가야, 즉 가락국의 시대를 열었다고 본다. 국제결혼에 대해서도 아직 사람들의 시각이 온순하지만 않은 지금, 이 둘의 결혼은 선진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우리의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 6월 23일 수로왕비릉을 갔다온 것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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