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0855
구지가가 들려주는 가락국 건국 이야기
[가야문화권 답사 04] 김해 구지봉
09.08.21 13:42 l 최종 업데이트 09.08.21 13:42 l 송영대(greenyds)
▲ 구지봉과 수로왕비릉 왼쪽의 언덕이 구지봉, 오른쪽의 무덤이 수로왕비릉이다. 둘은 서로 인접해 있다. ⓒ 다음 스카이뷰
▲ 영대왕가비 구지가의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구지봉에 있다. ⓒ 송영대
거북아 거북아 龜何龜何
머리를 내놓아라 首其現也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若不現也
구워서 먹으리 燔灼而喫也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구지가>는 가야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수로왕의 설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이 <구지가> 이야기이며, 이 <구지가>가 불려진 장소가 바로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수로왕비릉과 인접해 있으며 도로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가면 바로 구지봉으로 어렵잖게 갈 수 있다.
구지봉은 구수봉(龜首峰), 구봉(龜峰)이라고도 부르는 작은 언덕이다. 구지봉은 그 중에서도 거북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인식되었다. 지금은 아래의 도로 때문에 마치 거북의 머리가 잘린 듯 한 모양새이기에 왠지 모르게 안타깝지만, 당시로는 높지 않으면서도 원만한 구릉지에 김해 시내가 잘 보이기 때문에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신화 속에 나오는 구지봉은, 막상 가보면 그렇게 크게 특별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장소가 갖는 역사성은 상당하다. 구지봉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에 앞서, 구지가에 얽힌 가야의 건국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다.
구지가가 들려주는 가락국의 건국이야기
▲ 구지봉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탄강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사적 제 429호) ⓒ 송영대
<삼국유사>에서는 구지가와 관련된 수로왕의 이야기와 건국 이야기가 실려있다. 본래 김해에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고 하며 본디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사는 곳 북쪽의 구지(龜旨)라는 곳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과 마을 사람 2,3백 명이 거기에 모이자 다시 그 수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 누구 있느냐?"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구간들이 답하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하늘이 명령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하였다면서 산꼭대기를 파고 흙을 집으면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라고 하였다. 그러면 곧 대왕이 내려올 것이라는 말에, 구간들과 마을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윽고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드리워져 땅에 닿는데, 그 끝에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싸여 있었다고 한다.
▲ 구지봉으로 들어가는 입구. 구지봉으로 가는 길은 이곳 외에도 여러 곳이 있다. ⓒ 오은석
그 속에는 바로 6개의 황금색 알이 있었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사람들은 다시 보자기로 싸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2일이 지난 그 다음날 마을사람들이 금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모두 어린이로 변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십 수 일이 지나자 이들의 키가 9척에 이르게 되었고, 이 중에서 수로(首露)가 그 달 보름달에 왕위에 올라 가락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5명의 아이도 각자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한 화답으로, 구간들과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구지가였다. 이러한 구지가를 통해 당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제례의식의 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노래하며 춤을 춘다는 것은 당시 제례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행위였는데, 구지봉에서 하였다는 것은 애초에 이 장소가 제례 의식이 주로 일어났던 장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화에서 나오는 신이적인 의미를 걷어 내더라도 구지봉이 당시 가야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국가운영에 제례의 중요성이 어떠하였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하겠다.
구지봉에서 한석봉의 글씨를 만나다
▲ 구지봉의 선돌. 선돌은 고대인의 신앙체계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 송영대
앞서 말했듯이 구지봉은 작은 언덕이라 올라가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보면 가야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고, 널찍한 장소가 당시 여러 의식들을 행하기에 적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첫눈에 들어오는 구지봉은 말로만 듣던 것에 비하여 약간 허무한 감은 감출 수 없다.
소나무 숲 사이에 공터가 있고, 그 가운데에는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한쪽에는 넙적한 바위 하나가 보이고 김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하나, 그리고 표지판 정도가 전부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구지봉에 대해 약간 실망 할 수도 있지만, 이게 오히려 구지봉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구지봉 가운데에 있는 바위를 선돌이라고 부른다. 단순한 바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겠지만, 선돌이란 고대 사람들의 신앙이 들어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바위를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인위적으로 그 위치를 옮겨 세워놓으며 이곳에서 여러 의식을 행함으로써, 바위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이 선돌의 모습을 보아 남근석으로 보기도 한다.
▲ 구지봉의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제단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 송영대
또한 구지봉에는 바둑판식 고인돌 1기가 있다. 흔히들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굳이 고인돌의 모습을 가지고 북방과 남방을 가르기엔 힘든 점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근래 들어서는 남방식 고인돌이나 북방식 고인돌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대신 바둑판식고인돌이나 탁자식고인돌로 부른다.
구지봉의 고인돌은 1기만 있는 게 특이하다. 게다가 김해 시내를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당시 이쪽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던 지배자가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인돌은 종종 무덤이 아닌 제단의 의미로서도 갖는데, 그렇게 되면 선돌과 함께 제례적으로 연관되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한석봉의 글씨 구지봉의 고인돌에 새겨져 있으며 한호의 글씨라 전한다. ⓒ 송영대
이 고인돌에는 특이하게도 글씨가 새겨져있다. 구지봉에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구지봉석(龜旨峯石)이 그것인데, 글씨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더라도 시원시원하게 잘 쓰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호(韓濩)가 썼다고 전한다.
구지봉은 예로부터 신성하게 여겨지던 장소이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도 남산이 성스럽게 여겨지고, 백제의 부여에서 또한 삼산이라고 하여 일산(日山:금성산), 오산(吳山:오석산), 부산(浮山)이라는 산들이 신성하게 여겨졌다. 고대엔 이런 성소들이 여럿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신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로왕이 구지봉으로 온 것을 외부세력의 유입으로 보며, 구간은 토착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본다면 수로왕 세력의 유입 후 구간과 큰 마찰 없이 융합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라를 세우고 이끌어 나가는 데에 있어서 구지봉은 여러 중요한 장소로서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로왕의 탄강설화(誕降說話)가 이곳에 더해져서 성스러운 장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 구지봉에서 조망한 김해시내 구지봉은 이처럼 주위를 둘러보기 좋은 구릉으로 예로부터 제례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 김사현
이러한 가락국 신화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정조가 쓴 시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가야시조가락국왕릉치제문(伽倻始祖駕洛國王陵致祭文)'의 몇 구절을 통하여 그러한 후대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기운이 구지봉 언덕에 모이고 氣鍾龜嶽
땅은 계림과 경계 졌으니 地分雞林
빛나는 신인이 燁如神人
하늘로부터 엄연히 임하였네 自天儼臨
이에 영부를 받았으니 乃受靈符
금함에 자색(紫色)의 끈을 매었는데 金盒紫纓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군장이 되니 君乎牧乎
은택이 남쪽 바닷가에 흘러넘쳤네 澤流南瀛
밭에는 서로 두둑을 양보하는 사람이 있고 田有讓耦
집들은 모두 표창할 만한 덕행이 있어서 屋有比封
백성들이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여기니 于于皞皞
혁서의 선통이었네 赫胥禪通
덧붙이는 글 | 수로왕의 탄강설화가 깃들어 있는 김해 구지봉에 갔다온걸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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