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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돌궐을 둘러싼 외교전
고구려 외교술에 수나라 이간질 전문가 `무릎'
2011. 01. 12   00:00 입력 | 2013. 01. 05   06:17 수정

612년 수나라의 황제 양광은 고구려를 `악의 축'으로 몰고 선전포고를 했다. “고구려는 일찍이 나의 관대함을 무시하고 오히려 `악'을 쌓았다.”고구려로 향하는 수나라 군대는 거대했다. 삼국사기는 당시 수나라 병력에 대해 “모두 113만3800명이었는데 200만 명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가 (전투 병력보다) 두 배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양제도 고구려를 침공하는 데 이렇게 많은 군대 동원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명석한 사람이었고, 수적 우위라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값비싼 전력 승수에 목을 매고 싶지 않았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6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나라 초대 황제인 문제의 초상.필자 제공


고구려를 침략한 장본인인 수나라 양제의 초상. 필자 제공

607년 8월 초원에 가을이 왔다. 수 양제는 선물을 갖고 돌궐 계민칸의 천막 궁정으로 찾아갔다. 그건 답방이었다. 그해 초 수 양제는 유림(楡林)에서 변경전략가 배구가 포섭한 동돌궐의 계민칸으로부터 충성의 서약을 받았다. 

첫 만남에 계민칸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야기는 양제의 시(詩)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도 나온다. “장성의 병사에게 물으니 계민칸이 들어왔다고 한다. 탁한 기는 천산에 가라앉고 새벽의 빛은 오르도스(내몽고 자치구)를 비춘다.” 계민칸이 온다는 소식은 탁한 공기를 대번에 맑게 하고 새벽빛이 땅을 비추게 한다. 북변이 안정되니 이제야 안심할 수 있다. 

수 양제가 그해 가을 계민칸의 궁정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험악해졌다. 적국 고구려 사신이 거기에 먼저 도착해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양제는 자신의 후궁을 침범한 사내를 보듯 고구려 사자를 노려보았다. 평양에서 1500㎞ 떨어진 이곳에 자신보다 먼저 와서 계민칸과 사사로이 통하려 했다. 

전부터 수나라의 영토를 유린했고, 북방초원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고구려는 양제에게 치욕감을 주는 존재였다. 수제국을 능멸하고도 무사한 나라는 고구려밖에 없었다. 9년 전인 598년 아버지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치려다 턱없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심사는 더욱 불편했다. 

과거 돌궐은 수왕조의 목을 쥐고 있던 무서운 존재였다. 수왕조의 모체였던 북주가 북제(550∼577)를 통합하기 이전부터 그러했다. 초원을 통일한 돌궐은 북주의 북제 공격을 지원하기도 했다. 돌궐 목간 칸(재위 553~572) 치세에 북주는 매년 10만 필의 비단을 상납했다. 북제도 역시 그러했다. 양국은 돌궐이 상대 국가를 지원할까 항상 두려워했다. 돌궐의 칸은 두 나라로부터 갈취한 비단을 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나의 남쪽 두 아들이 효순(孝順)하니 어찌 빈곤함을 걱정하겠는가!” 

582년 사발략(沙鉢略)칸을 비롯한 5명의 칸이 이끄는 40만의 돌궐 기병이 수나라를 침공했다. 그해 10월에 가서 수문제의 황태자 양용이 함양(咸陽)에 군대를 주둔해 대비할 정도로 전황은 불리해졌다. 12월 홍화에서 방어하던 수나라의 부장 달계장유가 패하고 난주도 함락돼 그 지역이 심한 약탈을 당했다. 수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수도권까지 위협받았다. 

하지만 교활한 양제의 아버지 문제가 돌궐에 분열 공작을 획책했다. 내분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 그들을 끊임없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수나라 양제의 아버지 문제에게는 초원전문가 장손성(長孫晟)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유목민들의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는 공작을 수행했다. 583년 돌궐이 수를 침공하다가 역전패를 당한 상황에서 천재지변이 나 경제적으로 너무나 곤궁해졌다. 돌궐의 여러 칸들은 극도로 이기적으로 변해 있었다. 돌궐 칸 아래는 제후들이 할거했고, 각기 독립적인 기병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익이 되는 약탈전쟁에는 서로 화합했지만 언제나 서로를 시기했다. 

서돌궐의 타르두가 동돌궐의 칸과 결별을 하고 스스로 칸을 칭했다. 장손성은 돌궐 상층부를 붕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583년 수는 서돌궐의 타르두칸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이로써 돌궐이 동서로 분열됐고 향후 둘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나아가 장손성은 동돌궐 내부의 분열을 부추겼다. 동돌궐의 사발략칸은 사촌인 엄라·대라편(大邏便)과 몽골고원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사발략이 승리했다. 하지만 장손성은 그들 둘러싼 칸들에게 공작을 했다. 그러자 동돌궐의 사발략은 서쪽에서 서돌궐의 타루두와 동쪽에서 거란의 협공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손성은 사발략이 급격히 약해지는 것은 수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조언했다. 수 문제는 585년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서돌궐에 대항해 힘겹게 싸우던 사발략을 지원했다. 

사발략을 계승한 동생 막하(莫何)가 죽고 그를 이은 도람(都藍)에게 계민칸이 반란을 일으켰다. 도람은 599년에 계민칸을 몰아냈지만 수나라는 그를 환대하고 오르도스 지역에 땅을 주어 번병으로 삼았다. 602년 서돌궐의 타르두가 중국의 보호를 받던 계민칸을 공격하자, 수나라는 준가리아에 있는 돌궐계 유목민인 철륵에 공작을 했다. 

철륵의 수많은 부족들이 타르두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도주하다 화병으로 죽었다. 수는 분열을 끊임없이 조장해 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을 떨게 했고 수나라의 수도를 위협할 만큼 강력한 돌궐을 끊임없이 약화시켰다. 

양제가 초원에 행차한 시기는 계민칸이 수나라의 원조를 받아 그의 동포들을 제압하고 초원을 어느 정도 장악한 상태였을 때였다. 그런데 고구려 사신이 찾아와 수가 힘들게 복속시킨 칸에게 이간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수나라의 변경정책전문가였던 배구는 수양제의 말을 고구려 측에 전했다. “돌아가거든 너희 고구려왕에게 직접 수 조정에 와서 신하의 예의를 표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돌궐기병을 동원해 고구려를 징벌하겠다.”

견문이 넓었던 배구는 초원의 긴장과 분쟁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고구려는 장막에 철저히 가려진 나라였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분열공작을 획책하는 것은 물론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609년 계민칸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갔다가 낙양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시필(始畢) 칸이 즉위했다. 수나라의 침공이 확실해진 시기에 고구려에 기회가 왔다. 수나라가 돌궐 기병을 대거 동원한다면 치명적이다. 고구려는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고구려의 산성들은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서로 지원하며 유지된다. 방어력이 뛰어나지만 돌궐 기병이 산성과 산성의 평지에서 고구려 지원군을 단절하면 성은 각기 고립된다. 산성전 이전에 치열한 기병전이 펼쳐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성이란 외부의 지원을 전제로 전개된다. 하지만 완전히 고립된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가 아닌가. 고구려는 사절을 젊은 시필칸에게 보냈고, 과거 수나라가 자행한 돌궐 분열정책에 대해 충분히 상기시켜 주었다. 

고구려 사신은 시필칸에게 결정적인 충고도 했다. “수나라가 당신의 동생을 또 다른 칸으로 세워 경쟁시키려고 합니다.” 적의를 갖게 된 시필칸은 곧바로 수나라와 의례적 관계를 청산했다. 

수 양제는 빠르고 기동성이 있으며, 보급을 자급자족하는 동돌궐의 유목민 기병을 고구려 침공에 동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작으로 무산됐다. 고구려에 대한 징벌은 오직 수나라 혼자만이 걸머지는 운명이 돼 갔다. 이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수는 엄청난 보급품을 소비하는 농경민 출신 전사들을 동원해야 했다. 100만 이상에 달하는 군대를 먹이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엄청난 사람과 짐승들이 동원됐고, 짐꾼들과 말과 소도 식량을 소비했다. 보급이 보급을 낳는 악순환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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