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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중 앞부분인 "(1) 한국독립군의 한종연합작전"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2)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1) 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작전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3. 한중연합군의 항일전과 독립군의 수난 > 2)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야기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만주군과 합동하여 우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하였다. 이때 만주방면에는 반만항일의 기치를 든 수많은 중국군부대가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군에 항전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전의 장쉐량/장학량(张学良/張學良)군 일부와 보위단(保衛團) 또는 마적의 일부도 참가한 오합지중(烏合之衆)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부대로서 둔화/돈화(敦化)지방에 왕더린/왕덕림(王德林)·펑잔하이/풍점해(冯占海/馮占海)부대가, 흑룡강지방에는 마잔산/마점산(马占山/馬占山) 부대가, 하르빈〔哈爾賓(합이빈)〕에는 중국 호로군(護路軍) 사령관 딩차오/정초(丁超)가 인솔하는 부대와 호로군 여단장 카오펑린/고봉림(考凤林/考鳳林) 부대가 있어 일만군(日滿軍)과 싸우고 있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이들 중국군의 활동을 우리 독립운동자가 볼 때 한중연합군의 성립이 박두하였음을 직감케 하는 것이었다.
 
1931 년 11월 2일 한국독립당은 긴급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일제의 만주점령에 대처하여 새로운 활동목표를 설정하였다. 동 회의에서 독립당은 모든 역량을 항일전에 집중키로 하고 다음과 같은 삼개항을 결의하였다.註 007
 
1.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하달하고 정개적(整個的)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 정개적(整個的)  전체의
2. 당내의 일체 공작은 군사활동에 집중한다.
3. 길림성 항일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한다.
 
이상과 같이 결의한 후 한국독립당은 동월 10일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소집과 징모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2일에 당·군대표 신숙과 남대관 등을 중국의 길림자위군·호로군연합군총부에 파견하여 동 군사령관 정초 및 제이·제삼군장 양원훼이/양문휘(杨文挥/楊文揮)·카오펑린/고봉림 등과 한중연합작전을 협의케 하였다. 이 결과 동년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과 최악·오광선·심만호(沈萬浩)·김청농(金靑儂)·최관용(崔寬用)·최종원(崔種元) 등 간부가 중국군당국과 협의하여 다음과 같은 구체안을 마련하여 상호 협정을 체결하였다.註 008
 
1. 한중 양군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상호 장기항전을 맹서한다.
2. 중동철도(中東鐵道)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한군이 담당한다.
    * 중동철도(中東鐵道) = 중동로 = 중동선=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3. 한·중연합전시 후방교련은 한군장교가 담당하고 한군에 수요되는 일체 물자는 중군이 공급한다.
 
이로써 만주에서의 한중연합군에 의한 항일전이 전개되게 되었다.
 
한국독립군은 앞서 발령된 총동원령에 의하여 소집된 병사의 훈련과 부대편성을 서두르던 중인 1932년 2월 12일에 일만군의 대공격을 받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아직 부대를 재정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장비도 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일만군은 2월 5일 하르빈방면에서 중국군을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중동연선(中東沿線)을 따라 진공하고 있었다.
 
한중연합군은 웨이샤허/위사하(苇沙河/葦沙河)·이몐보/일면파(一面波)·우지닝/오길영(乌吉宁/烏吉寗)·미펑잔/밀봉참(密蜂站)·통빈/동빈(同宾/同賓)·팡정/방정·이란/의란) 등지에서 일만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참패를 당하고 사산되고 말았다.
 
즉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은 참모장 신숙과 일지대군(一支隊軍)을 친솔하여 이란/의란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세불리(勢不利)하여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으로 퇴각하여 부대를 수습하였다.
 
한편 별동부대장 안종선(安鍾宣)은 중국 제3호로군 카오펑린/고봉림부대와 공동작전으로 3월 3일 아성(阿城)을 일시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오래 수성(守城)하지 못하였고, 차철(車澈)·지상기(也相奇)·전북빈(全北賓)이 인솔하는 제3·제4·제5 대대는 중국 호로군 제3·제4여장 유지광(劉志光)·궁영무(宮英武) 등의 부대와 연합하여 한 달 남짓 고전하다가 일면피 이북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註 009
* 차철(車澈) = 신철(申澈) ? 
* 야상기(也相奇) = 지상기(池相奇) ? 
 
첫번째 한·중연합작전이 이와 같이 패전으로 끝난 뒤 잠시 동안 상호연락이 두절되었었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은 쐉청/쌍성현(双城县/雙城縣) 마오얼/모아산(帽兒山)에서 비상회의를 개최하고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한편 중국군 카오펑린/고봉림 부대에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통고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독립당의 수습책은 성공하여 1개월 미만에 독립군이 재집결하였으며 김창환(金昌焕)을 총사령 대리로 임명 부대를 재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전력을 재정비한 한중연합군은 1932년 8월 본격적인 연합작전을 개시하였다.
 
 
ㄱ. 쌍성보전투註 010
 
즉 독립군 3천 명과 중국군 2만 5천 명으로 편성된 한중연합군은 쐉청바오/쌍성보(双城堡/雙城堡)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쌍성보는 하창/합장선(哈长线/哈長線) 철도의 요지이며 북만주 중요 물산의 집산지이므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었다.
* 하창/합장선(哈长线/哈長線) : 하얼빈-창춘 간 철도
 
9월 3일 총사령 이청천 장군이 흑룡강지방에서 부대를 인솔하고 오자 독립군을 다시 편성하고 김창환이 부사령이 되어 19일 쌍성보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진군 도중 만주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3일 동안에 2백여 리를 진격하여 쌍성보 남쪽 5리 지점에 있는 샤오청즈/소성자(小城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중국군 카오펑린/고봉림부대와 합세하여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군은 동문과 남문을 공격하고 독립군은 서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성내에는 만주군 3개여단이 완강히 저항을 하였으나 우리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퇴로로 남겨두었던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문 밖에는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매복시켜둔 연합군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 격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3만의 병력이 3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한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나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을 것을 고려하여 연합군의 주력 부대를 쌍성보 5리 밖에 있는 뉴자툰/우가둔(牛家屯)으로 옮기게 하고 쌍성에는 소수의 부대를 잔류시켰다. 잠시 후 예상하였던 대로 일본군 대부대가 쌍성보를 공격하여 왔다. 연합군은 이를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불행히도 우군인 중국군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 쌍성보를 일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쌍성보의 격전으로 일시 흩어졌던 연합군은 다시 부대를 재정비한 후 11월 7일 재차 쌍성보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과 중국군은 부대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쌍성보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독립군은 200명을 단위로 부대를 15개로 편성한 후 선봉에 서서 진격하였으며 중국군은 탄환과 식량을 담당하였다. 오후 6시 총공격을 개시하여 1개 부대는 정면으로, 1개 부대는 왼쪽으로, 1개 부대는 뒤편으로, 기관총대는 중앙으로 각각 돌격하였다. 적은 수류탄과 박격포로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수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성안으로 돌입한 독립군은 적진을 교란시켰으며 쌍성보 뒷산을 점령한 독립군 포병대가 시가의 주요 건물에 포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전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감을 본 만주군들이 전원 항복을 하였으며 성문을 열어 연합군을 환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전멸하였으며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두번째로 쌍성보를 탈환한 연합군은 입성 즉시 전리품을 정리하고 전장을 정돈한 후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적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11월 20일 일본군은 어김없이 보복전을 전개하였다. 하얼빈/하르빈과 창춘/장춘(长春/長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와 만주군의 대병력이 비행기의 엄호를 받으며 반격하여 온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전병력을 7대로 나누어 각 요충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반격을 맞았다. 1주야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피아에 사상자가 속출하여 성 내외에는 피바다를 이루었고 사체가 누적되었다. 21일 밤 일본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용전분투하던 우군의 방어선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적의 비행기 공격과 대포로 인하여 마침내 방어선이 적에게 돌파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독립군은 22일 새벽까지 무너져가는 전선을 독려하며 온갖 방법으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중국군의 사기가 점차 떨어짐으로써 부득이 성을 적에게 내주고 500여 리를 후퇴하여 오상현 총허/충하진(冲河真/冲河鎭)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의 피해도 막대하였을 뿐 아니라 패전에 낙담한 카오펑린/고봉림부대가 적군과 단독으로 휴전회담을 개최하였다. 이에 독립군이 이를 극력 만류하였으나 본래 신념이 약하고 형세에 끌리기 쉬운 중국인 집단인지라 카오펑린/고봉림부대는 이익을 좇아 이념과 의리를 버리고 휴전협의를 계속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동월 27일 패전의 상처와 동지에게 배반당한 쓰라림과 분노를 되씹으며 결연히 중국군과 갈라져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1월 29일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활동방침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註 011
 
1. 군사활동 지점을 개정하여 동만주(옌지/延吉·왕칭/汪清·동닝/东宁/東寧·훈춘/珲春/琿春·닝안현宁安县/寧安縣)에 한정하고 먼저 구국군(救國軍) 수뇌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함.
2. 각 군구에 수훈장정(受訓壯丁)을 다시 징집할 것.
3. 황학수(黃學秀)를 부사령관으로 선정한다.
 
이와 같은 결정에 의하여 독립당은 3명의 대표를 중국구국군 총사령 왕더린/왕덕림에게 파견하였으며 또한 난징/남경(南京)에도 대표를 보내어 중국정부와 한중연합작전을 협의하였다.
 
12월 25일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징보/경박호(镜泊/鏡泊湖)에서 만주군 유격대 2천 명과 격전을 벌여 이를 섬멸시켰다. 이날 전투는 연합군을 추격하여 오는 만주군을 경박호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만주군이 호수입구에 들어서는 것을 기회로 양쪽에서 협공을 하여 섬멸시켰던 것이다.
 
 
ㄴ. 사도하자전투註 012
 
1933년 3월까지 독립군은 스다허즈/사도하자(四道河子)에 주둔하여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날로 증강되어 갔는데 이와 같은 정보를 접수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만주군과 연합하여 공격을 취하였다. 4월 14일 일만군 대부대가 공격하여 온다는 것을 안 독립군은 중국군과 같이 적을 포위 섬멸하기로 하고 전부대를 4개로 나누어 제1로군은 소부대로 적을 유인케 하고 제2·제3로군은 산다오허/삼도하(三道河) 뒤에 있는 분수령과 사도하의 좌우 계곡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으며 제4로군은 얼다오허/이도하(二道河) 입구에 매복하였다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적의 수송차량을 빼앗도록 하였다.
 
15일 새벽 적은 약 1개사단의 병력으로 황지아툰/황가둔(黃家屯)에서 이도하 방면을 거쳐 사도하자에 진격하여 왔다. 이것은 적이 아군의 작전에 빠져들어 온 것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아군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급습하니 적군은 미처 응전하지도 못한 채 쓰러져 갔다. 순식간에 적군 과반수가 쓰러졌으며 혼란에 빠진 적의 패잔병들은 어둠을 뚫고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은 극히 미약했으며 연도에는 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이 부지기수였다.
 
16일 저녁 아군은 부대를 정돈하는 동시에 전리품을 수습하여 당당히 본대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5월 2일에 아군은 유격대를 각지에 파견하여 일만군을 기습공격하였는데 대소 20여 전투에서 적을 섬멸시켰다.
 
 
ㄷ. 동경성전투註 013
 
한중연합군은 승세를 몰아 이번에는 닝안/영안성(宁安/寧安城)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먼저 동징/동경성(东京/東京城)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부대를 3개대로 편성하여 시행되었는데 제1로군은 기병대로 편성하고 동무단쟝/동목단강(东牧丹江/東牧丹江) 연안의 골짜기에 진출케 하여 적의 후원부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제2로군은 1개 여단의 병력으로 영안성과 동경성의 중간지점에 배치하여 먼저 교량과 전선을 끊어서 적의 후원병을 저지케 하였으며 제3로군은 좌우익으로 나누어 직접 동경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6월 3일 밤 작전계획대로 동경성을 공격하였다. 3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북문으로 도주하다가 우군의 복병에게 전멸되었으며 만주군은 여단장 훠스차이/곽세재(霍世才)만이 호위병 몇 명을 데리고 도주하였을 뿐 전부대가 항복하였다. 이때 영안성에 있던 일본군은 두려워 감히 구원병을 보내지 못하고 공포를 쏘아낼 뿐이었다. 승전한 한중연합군은 성내로 들어가 주민들을 선무하여 안심시키는 한편 전리품을 수습하였는데 스다오허즈/사도하자 전투 때 보다 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영안성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동경성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렇다고 일군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영안성을 당장 공격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부득이 주력부대를 왕칭/왕청(旺淸)과 동닝/동녕 사이의 산간지대로 이동하여 주둔시켰다.
 
이와 같이 한중연합군은 전투에 이기고도 점령지를 오랫동안 확보할 실력이 없어 곤란한 경우에 놓여져 있었다.
 
 
ㄹ. 대전자령전투註 014
 
동년 6월 28일 한중연합군 전부대는 라오송링/노송령(老松岭/老松嶺)을 거쳐 진군하였는데 이때 다뎬즈/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연합군을 공격하려고 연합군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행동은 연합군에게 즉각 탐지되었다. 연합군은 곧 일본군을 맞아 섬멸시키기로 하고 대전자에서 5리 지점에 있는 라오무주허/노모제하(老母诸河/老母諸河)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7월 3일 대전자령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2일 오후 6시까지 대전자령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 완료하였다.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2자로 된 험준한 고개인데 길이가 약 20리나 되는 골짜기가 있으며 그 양편에는 높이가 수백 미터가 되는 절벽이 솟아있는 심산의 밀림지대이다.
 
이곳에 배치된 우군 병력은 독립군이 2천 5백 명 중국군이 6천 명인데 독립군 전원과 중국군 2천이 전위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공격의 주동은 역시 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연합군이 매복하여 있는 지점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죽음이 눈앞에 닥쳐 온 것도 모르는 채 자연을 즐기며 소풍이라도 온 것 같이 꽃을 꺾어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적의 자동차에도 마차에도 한아름의 꽃뭉치였다. 어떤 병정들은 전투모를 벗어 없애고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고개를 올라오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 넘어 행렬의 끝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미처 응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지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쓰러져 갔다. 4시간의 격전으로 일본군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 대전자 전투에서의 승리는 한국독립군의 전무한 승리였으며 항일전투사상 특기할 만한 대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註 015
 
군복 3천 벌
담요 3백 장
군량 문서 군용품 2백여 마차
박격포 10문
소총 1천 5백 정
대포 3문
 
이와 같은 많은 전리품은 독립군과 중국군이 분배하였는데 이 분배과정에서 양군사이에 감정을 해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약 2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 보강한 독립군은 9월 1일 동닝/동녕현에 있는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원래 중국군이 곧 후속부대를 파견하여 주기로 약속한 전투였다. 약 3일에 걸쳐 독립군이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후속부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립군의 피해는 심하여 갔으며 끝내는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구국군이 후속부대를 보내 주지 않은 이유는 첫째 중국구국군 제1사장 우이청/오의성(吴义成/吳義成)이 부대내에 공산주의자를 침투시켜 한중연합군을 이간시켰으며 둘째는 전투에서 적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과정에서 양군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동빈현 전투 이후 한중 양군의 불화는 더욱 심각하여졌으며 끝내는 독립군의 총사령 이하 수십 명의 간부를 중국군이 체포 구금하였으며 독립군의 무기를 압수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후에 양군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구속간부가 석방되었으나 한중연합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註 007  한국광복군총사령부 편(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광복(光復)』제2권 제1기(第2卷 第1期)(충칭/重庆/重慶 : 대한민국 24년1월20일/大韓民國 24年 1月 20日), p.53.
 
註 008 주 7)과 같음.
註 009 한국광복군총사령부 편(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앞 책, pp.53~54.
註 010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172~1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5~629.
註 011 한국광복군총사령부 편(韓國光復軍總令部編), 앞 책, P.55.
註 012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175~1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9~630.
註 013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176~177.
註 014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177~17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1~632.
註 015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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