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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김구·이승만... 정도전은 누굴 선택했을까
[조선왕조 오백년 참모열전: 정도전 2부]
13.10.30 09:02 l 최종 업데이트 13.10.30 09:02 l 김종성(qqqkim2000)
우리 시대는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러움은 과도기의 증상입니다. 과도기에는 현재 시대를 정리하고 다음 시대를 기획할 인재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참모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참모도 있지만, 해악을 끼치는 참모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존재하는 참모들과 앞으로 출현하게 될 참모들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옥석을 가리는 지혜를 역사 속에서 얻어 보자는 것이 이 시리즈의 취지입니다.- 기자말
몽골제국의 간접 지배를 받던 14세기 고려에서 태어나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운 정도전. 만약 그가 똑같은 성격적 특성을 보유한 채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38도선 이남에서 1945년 8·15를 맞이했다면, 그는 과연 어떤 지도자를 선택했을까?
정도전은 누구를 선택했을까
참모형 인물은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는 군대·자금·조직·명성 등을 가진 사람에 주목한다. 8·15 이후의 남한에서 이런 요소 중 하나 이상을 갖춘 인물은 미군 제24군단장 존 하지, 김구, 여운형, 이승만 등이었다.
미국의 대리인인 존 하지는 38도선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거느린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와는 협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도전은 자주성이라는 명분을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친(親)명나라 사대주의를 표방했다. 하지만 그의 사대주의는 굴종적인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었다. 조선의 이익에 부합하는 선에서만 명나라의 패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명나라와 무역분쟁을 일으키고 요동(만주) 정벌을 추진한 사실은 그의 사대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는 절대로 외세에 굴종하지 않았다.
▲ 존 하지 장군. ⓒ 위키피디아백과사전
1945년에 들어온 주한미군은 그 전까지 있었던 주한'일'군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주한미군은 한국인들에게 굴종적 사대주의를 강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은 주한미군을 이용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주한미군에 빌붙은 한민당 계열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미국 앞에서 신조를 꺾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공민왕이 죽은 이후의 행적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공민왕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인 우왕을 옹립한 이인임 정권은 선왕의 반몽골(반원) 정책을 폐기하고 친몽골로 돌아섰다.
그러자 이에 맞서 반몽골의 기치를 내건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이때 그는 서른네 살이었다. 조정이 이미 친몽골로 돌아선 상황에서 별다른 힘도 없는 그는 용감하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명분을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정권에 반기를 든 정도전은 전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유배를 떠나기 직전, 정권 핵심부에서는 그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하면서 그의 반응을 떠보았다. 유능한 청년 관료를 어떻게든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것에 아랑곳없이 서둘러 유배지로 떠났다. 그때 함께 귀양을 떠난 동료들은 2년 만에 조정에 복귀했지만, 그는 유배가 해제된 뒤에도 복귀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재야를 떠돌았다. 유배를 떠날 때의 행동으로 인해 정권 핵심부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는 삼각산에서 삼봉재란 사설학원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정도전은 불이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한 강자'에 맞서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최강 미국과도 협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한미군을 등에 업고 동족을 굴종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면서까지 자기 꿈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은 자주성이라는 명분을 중시했기 때문에, 김구나 여운형 같은 지도자들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여운형은 해방 직후의 전국 조직인 건국준비위원회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주한미군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김구는 혼란한 시대를 평정할 만한 확실한 그 무언가를 보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20세기 정도전은 두 지도자를 마음속으로 존경하되 그들에게 의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멀리서나마 두 지도자가 잘되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그럼, 정도전의 눈에 비친 이승만은 어땠을까? 이승만은 강력한 조직은 없었지만, 오랜 미국 활동 덕분에 국제적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의 실체와 관계없이 8·15 이후의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그를 선택할 수 없는 이유가 최소 다섯 개는 있었다.
첫째, 이승만은 한민족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주한미군과 손을 잡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승만은 정도전이 볼 때 '아웃'이었다.
둘째, 이승만은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얻은 대통령 직함을 갖고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면서도, 그는 직함에 따른 책임을 거의 이행하지 않았다. 또 그는 구한말에 자기의 석방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대신해 아버지를 봉양해준 조강지처 박승선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이승만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셋째, 이승만은 일관성이 없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에 이승만은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으로 독립을 획득하자'고 주장하면서 어느 정도는 일본의 지배를 긍정했다.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그는 "(강점 이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며 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유행하자, 이승만은 종전의 태도를 바꿔 "한국을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놓아달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렇게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그가 해방 직후에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의 원칙은 별다른 명분도 없이 상황에 따라 수시로 뒤바뀌었다.
일관된 신념 없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이승만에게 정도전이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뚝심 있게 자기 길을 가는 무인 이성계에게 매력을 느낀 데서 나타나듯이, 정도전은 이승만 같은 인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넷째, 이승만에게는 사람들이 잘 따르지 않았다. 상해 임정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승만은 직책에 수반되는 권한은 향유하면서도 거기에 따르는 책임은 잘 이행하지 않았다. 또 그는 공금에 대해서도 투명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국제무대에서 자신을 어필하는 데는 열성이었지만, 진심과 성실성으로 자기만의 대중조직을 구축하는 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승만의 명성에 비해 조직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정도전은 '저런 인물을 모시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승만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
▲ 이승만.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정도전이 이승만을 따를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 중에서 어쩌면 다섯 번째가 가장 결정적일지도 모른다. 다섯째 이유는 이승만도 정도전 못지않은 수재 혹은 천재였다는 점에 있다. 스물두 살 때인 1897년에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영어 연설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1899~1904년의 감옥 생활 중에도 많은 책을 집필한 점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승만은 지적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좀 이상한 구석이 많기는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 유학 5년 만에 학사·석사·박사학위를 획득한 능력자였다. 지적 능력만 놓고 본다면, 그는 '이 박사'란 칭호에 잘 맞는 인물이었다. 많은 경우에 참모형 인물은 이렇게 머리 좋은 인물을 주군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정도전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정도전은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아쉬운 대로 아무데라도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정도전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그의 삶에서 확신할 수 있다.
정도전은 공민왕 때부터 유능한 관료로 인정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허리를 굽혔다면 우왕 시대에도 얼마든지 출세가도를 달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우왕을 옹립한 이인임 정권이 기회를 주려고 하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비운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그는 결코 서둘지 않았다. 성급하게 아무 자리나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참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만약 이성계라는 인물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는 삼봉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정도전이 20세기에 다시 태어났다면, 그는 해방 정국에서는 자기가 선택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고 판단햇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서울 노량진 같은 곳에 '삼봉재 고시학원'을 차려놓고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14세기와 20세기는 세계적 격변기라는 점에서 똑같다. 그런데 14세기에는 세계적 격변기에 대처할 만한 군사력이 고려 내부에 있었다. 정도전이 제휴한 이성계 군단은 고려왕조의 비주류 지역인 여진족 구역의 병사들로 구성되었지만, 이 역시 고려왕조의 일원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에 비해 20세기에는 세계적 격변기에 대처할 만한 군사력이 남한 내부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남한을 이끄는 정치지도자나 참모들은 주한미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민족적 자주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정도전 같은 인물의 입장에서 볼 때, 14세기는 활동 가능한 시대이지만 20세기는 그렇지 못한 시대였다. 정도전이 20세기가 아닌 14세기에 태어난 것은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볼 수 있다.
* 3편에서는 정도전과 중국 역대 참모들을 비교하는 내용이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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