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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정도전, 왜 의외의 일격에 죽었나
[조선왕조 오백년 참모열전: 정도전 3부]
13.11.05 17:55 l 최종 업데이트 13.11.05 17:55 l 김종성(qqqkim2000)
▲ 충북 단양에 있는 정도전 동상의 상단을 스케치한 그림. ⓒ 김종성
정도전은 한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참모였다. 그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창업했을 뿐만 아니라, 새 왕조의 건국이념·대외관계·경제체제·정치체제·사회체제·종교철학·도시구조 등을 거의 혼자 힘으로 설계했다.
정도전은 중국의 전설적 참모들인 주공단·장량(장자방)·주은래(저우언라이) 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어쩌면 이들보다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정도전처럼 국가의 구도를 전면적으로 설계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더 나은 게 있다면, 이들의 나라가 정도전의 나라보다 땅덩어리가 훨씬 더 컸다는 점뿐일지 모른다.
정도전에게는 이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내면적 특성이 있었다.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정도전은 이들보다 훨씬 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정도전은 이들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내면적 특성은 바로 그의 야심이다. 그것은 참모로서의 야심을 분명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군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주군을 이용해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자기를 헌신해서 주군의 의지를 성취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참모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만 품었을 뿐, 이성계의 뜻을 세상에 펼치겠다는 목표는 품지 않았다.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조선 건국 직전에 정도전이 술자리에서 자주 하던 말이 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장량을 기용한 게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 유방을 기용한 것이다."이성계가 자기의 머리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성계의 군대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결코 참모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모치고는 아주 '불순'한 참모였다.
기원전 11세기에 활약한 주공단은 친형인 주나라 무왕을 보좌할 때나 조카인 성왕을 보좌할 때에 혹시라도 자신이 야심적인 인물로 비치지 않을까 항상 고심했다.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에 따르면, 그는 무왕과 성왕을 염려하는 글을 써서 상자에 넣은 뒤 "이런 사실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이 문서는 훗날 세상이 주공단을 의심할 때 그를 구하는 수단이 됐다. 세상은 그가 혹시라도 조카인 성왕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하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 시점에서 세상에 공개되어 주공단을 구한 것이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문서였다. 어쩌면 그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문서를 미리 작성해두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례는 주공단이 2인자의 철학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준다.
기원전 3세기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량(장자방)은 자기 역할이 끝나자마자 스스로 초야로 돌아갔다. "내 주량은 딱 여기까지야"라며 소주 두 잔만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그는 자기의 역할을 건국의 도우미에 명확히 한정했다. 덕분에 그는 다른 참모들처럼 토사구팽을 당하는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2인자의 미학을 잘 실천한 인물이었다.
모택동(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주은래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모택동보다 상급자였다. 하지만 대장정 중인 1935년 1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제1차 확대회의에서 모택동과의 지위가 역전된 뒤로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모택동을 충실히 보좌했다. 그는 수십 년간 모택동과 함께하면서도 항상 모택동을 어려운 사람처럼 대했다.
이들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성공한 뒤부터 2인자의 길에서 사실상 벗어났다. 그는 신생국 조선의 거의 모든 것을 직접 다 설계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불씨잡변>이란 책을 써서 불교 비판과 유교 확립에 나서고, <조선경국전> 등을 비롯한 법률까지 직접 만들고,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국사>까지 편찬했을 정도다. 그의 활약상은 분명히 임금인 이성계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형식적인 주상은 이성계이고 실질적인 주상은 정도전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뿐 아니라 정도전은 한양의 사대문과 각 동네의 지명까지 직접 만들었다. 군사훈련의 매뉴얼을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그것으로 훈련한 군대를 갖고 요동(만주) 정벌을 단행하려 했다. 1392년~1398년 기간의 조선은 분명히 정도전의 뜻대로 움직이는 나라였다. 주공단·장량·주은래 등이 옆에서 지켜봤다면, "이성계는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라며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자신이 평생 이룩한 결실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주군의 아들인 이방원에게 의외의 일격을 받고 건국 6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요동을 지배하는 나라, 조선', '재상 중심의 나라, 조선'처럼 그가 세운 청사진은 그의 죽음과 함께 흙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실, 정도전의 실패는 그가 참모 역할을 버리고 실질적 주상이 되는 그 순간에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도전은 조직력과 자금력이 약해서 자기 조직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우수하고 이성계의 신임이 두텁다 해도 그가 자기 뜻대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질적으로 지도자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이에 더해,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을 잘 다루지 못한 것도 정도전을 무너뜨린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방원을 포함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요동 정벌이란 기치 아래 온 나라를 단결시킨 정도전은 '고작' 왕자 이방원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이유와 관련하여 좀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단순히 이성계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방원에 대한 견제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도 마음대로 다룬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성계의 아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으니,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의 국가정보원 옆에 있다. ⓒ 김종성
정도전의 학교 선배인 정몽주가 이성계는 물론 정도전까지 제거하려 했을 때, 선죽교 테러를 통해 이성계와 정도전을 모두 살린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정도전이 이방원을 봐준 것은 아니다. 이것만으로는 정도전이 이방원을 공략하지 못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정도전은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인륜을 과감히 저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은사님'인 스승 이색도 정치적으로 제거한 인물이다. 이색은 1388년에 쿠데타(위화도 회군)로 성립한 이성계-조민수 정권에 동참한 뒤 조준과 손잡고 이성계를 견제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같은 이색의 제자인 정몽주과 함께 이색을 실각시키고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처럼 정도전은 경우에 따라서는 군사부일체의 윤리도 저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스승도 제거한 인물이 주군의 아들을 제거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한고조가 장량을 기용한 게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기용했다'는 말처럼 주군을 수족처럼 활용한 사람이었으니, 주군의 아들이 자기 앞길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이 섰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럼, 정도전이 이방원을 사전에 제거하지 못하고 기습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도전이 죽은 이후에 역사 기록의 주도권을 잡은 쪽은 이방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원 쪽이 만든 기록 속에서는 이방원의 위상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 계열이 만든 <태종실록> 등을 보면,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이전에 이미 정도전-이방원 라이벌 구도가 형성돼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갖기가 쉽다.
하지만, 그런 라이벌 구도가 일찍부터 형성돼 있었다면, 정도전이 이방원에 대해 그처럼 방심했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왕자의 난 이전에 있었던 사병해체 작업 때, 정도전은 이방원의 병력을 철저하게 해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원 측은 무기와 병력을 숨겨둘 수 있었다.
왕자의 난 당일에도 정도전은 광화문광장 동북쪽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과 트윈트리타워 사이에서 한가롭게 술을 마시다가 기습을 당했다. 만약 정도전-이방원 라이벌 구도가 일찍부터 형성돼 있었다면, 정도전이 이처럼 여유를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어준 일 때문에 정도전과 이방원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명확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구도가 일찍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말하는 이방원 측의 설명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피살된 장소. 이 사진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왼쪽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의 간판과 나무 사이 혹은 이 부근에서 정도전이 피살됐다. ⓒ 김종성
이방원 측의 설명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만 놓고 보면, 정도전의 라이벌은 국내가 아닌 국외에 있었다. 바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그의 라이벌이었다. 주원장은 이성계보다 정도전을 더 경계했다. 그는 조선이 보낸 문서인 표전문에 자기를 모욕하는 표현이 있었다면서,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해달라"고 거듭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문서에 적힌 표현을 빌미로 트집을 잡는 것은 주원장의 주 특기였다. 젊은 시절에 머리를 깎고 탁발승 생활을 한 적이 있는 그는 신하들의 문서에서 빛 광(光)자나 대머리 독(禿)자만 나와도 "이거 누구 보라고 쓴 거냐?"며 정치 탄압을 가하곤 했다. 주원장이 조선이 보낸 문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문서에도 별 내용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저 정도전을 죽일 명분을 찾고자 그런 쇼를 벌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주원장이 정도전을 경계한 것은 정도전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야심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무역흑자를 늘리고자 명나라와 무역분쟁을 일으키고 고구려 고토를 수복하고자 요동정벌까지 추진했다.
표전문 사건이 있기 전에 주원장을 방문한 뒤 귀국길에 오른 정도전은 북경 동북쪽에 있는 산해관(만리장성의 관문)을 지나면서 "잘되면 좋지만, 안 되면 한바탕 붙어야겠어"라는 말을 흘렸다.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이다.
이 발언은 옆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주원장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이런 이유로 주원장은 정도전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국제적인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서기 14세기 후반에 아프로유라시아대륙(아프리카+유럽+아시아) 정치의 3대 중심지는 중동, 유럽 동남부, 동아시아였다. 당시 중동은 유럽 동남부에 대해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이 두 지역과 동아시아 사이에서는 직접적인 군사 대결이 발생하지 않았다.
저명한 경제사 학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무역통계 등을 바탕으로 정리한 <리오리엔트>란 책에 따르면, 당시 동아시아는 경제·무역 측면에서 두 지역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동아시아와 두 지역 간에 군사 대결이 없는 상태에서 동아시아가 경제·무역 측면에서 두 지역을 능가했으므로, 14세기 후반의 세계 최강은 동아시아를 지배한 명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최강인 명나라를 지배하는 주원장이 정도전을 가장 무서워했다면, 당시 세계 최고의 라이벌은 정도전과 주원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정도전-주원장 라이벌 구도가 국제정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정도전-이방원 구도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방원 측은 자신들의 라이벌이 정도전 측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도전이 이방원의 위험성을 간과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전은 이방원이 자기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를 대적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허무하게 기습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주특기인 참모 역할을 버리고 실질적 주상의 길을 걸은 점. 주원장과의 대결에 집중하느라 이방원의 야심을 확실히 견제하지 못한 점. 이런 점들이 정도전이 건국 6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지도록 만든 핵심 요인들이었다.
(다음 편은 태종 이방원의 참모인 하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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