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v.daum.net/v/20210722165101973
나라가 망했을 때, 그 나라 주민들이 겪어야 할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고구려사 명장면 128
고구려 부흥전쟁 (1)
임기환 2021. 7. 22. 16:51
역사에서 수많은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끊임없이 묻게 된다. 여기서 나라가 망했다는 경우는 한 사회 내부의 왕조 교체가 아니라, 외부 세력에 의해 정복 내지 점령되었을 경우를 말한다. 아마도 나라가 망할 때 외적과 결탁하여 나라를 팔아넘기거나 혹은 자진해서 항복하고 적극 협력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수 지배층을 포함하여 대부분 주민들이 평상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그런 고난이라는 게 겪어보지 않으면 도대체 알 수도 없고 실감할 수도 없다. 눈앞에 닥쳐야 비로소 깨닫고 후회하게 되는 그런 대목들이다. 그러기에 그 많은 나라가 멸망하고 또 멸망하는 길을 반복해왔던 것이 아닐까? 그나마 오늘 우리가 심정적으로 다소 짐작되는 바가 우리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주민들이 겪었던 고초다.
이 땅과 이 사회에 새겨졌던 그때의 고난이 지금은 대부분 희석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개인에게 아로새겨진 깊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분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제강점기 그 고통스러웠을 시간에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열사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나라가 망했다는 게 공동체와 개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두고두고 환기하기 위해서다.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두 나라 유민들은 이제 새로운 생존 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욱 그것이 전쟁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의해 초래되었으므로, 두 나라 유민들의 생존 역시 그만큼 절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사실상 그들 누구도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들의 삶은 강제되고 규정되어 갔다.
물론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했을 때, 그 주민들의 상황도 피정복민이라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백제 유민들과 고구려 유민들의 생존 방식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나타났다. 그 차이는 유민들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복자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백제를 차지한 자는 신라였고, 고구려를 차지한 자는 당이었다. 정복자로서 신라와 당의 차이는 정복지와 주민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서 비롯했다.
신라는 비록 백제 왕실에 대해 적대심이 가득했고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해 갔지만, 백제 땅을 두고 당과 충돌하는 과정에서는 백제인의 민심을 얻으려고 노력했고, 백제 땅을 다 차지한 뒤에는 신라 땅에서와 동일한 지배체제를 적용했다.
고구려 땅을 차지한 당은 달랐다. 당은 고구려 중심지 평양 땅을 텅 비우는 가혹한 이주 정책을 시행했다. 고구려에 대해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당 지배층이 고구려 부흥을 철저히 차단하는 방식을 단행한 것이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에게 신라와 당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 점이 한반도 주민들의 동질성이 한 단계 진전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수 양제부터 당 태종, 당 고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고구려를 정벌하며 내세운 명분은 폭정에 시달리는 고구려 백성들을 구원하고 황제의 은덕을 베풀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하지만 명분은 단지 명분일 뿐, 역사상 착한 정복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 정부는 처음에 고구려 영역에도 기미지배체제를 적용하였는데, 기미(羈縻)란 굴레와 고삐라는 말로 곧 기미로 말과 소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기미지배란 당에 귀부한 이민족이나 정복지에서 기존 토착 수령들의 통치를 그대로 인정하여 당의 지방제도를 적용한 기미 부주(府州)를 설치하되, 그 장관에는 토착 수령을 임명하고 그 직을 세습하게 하며, 공부(貢賦)와 호적 등을 당의 호부에 올리지 않는 간접지배 방식이다.
당 정부는 고구려 영역에 9개 도독부(都督府), 42개 주(州), 100현(縣)을 설치하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고구려 전 영역을 통할하도록 설계했다. 그런데 당은 멸망 직후 기존 고구려 영역을 5부, 176성에 주민이 69만7000호라고 파악했다. 5부는 수도의 편제를 뜻하고, 176성은 지방 통치의 거점을 가리킨다. 고구려 당시 지방의 176성은 규모나 중요도에 따라 3~4등급으로 나뉘었는데, 당은 이러한 고구려의 기존 지방 통치 단위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여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편제한 것이다. 이를 합하면 151개가 되는데, 176성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가장 상위의 지방성 욕살(褥薩)이라고 불리는 지방관이 다스렸다. 고구려와 당 전쟁 시에 중요한 거점성들인 요동성, 신성, 건안성, 오골성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다음 등급은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지방관이 다스리는 성으로서 안시성, 비사성, 개모성, 백암성, 현도성 등이 이에 해당한다. 아마 욕살이 다스리는 성을 9개 도독부로 편제하고, 처려근지가 다스리던 성을 42개 주로 편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기미지배체제에 따라 고구려 본래의 성주나 수장들을 도독, 자사, 현령에 임명하고, 대신에 당나라 관리들을 각 지배 단위의 차관급으로 파견하여 고구려인들을 견제하면서 실질적으로 통치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물론 적극적으로 당에 저항하는 인물들은 배제하였겠지만, 대체로 대부분 고구려 성주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방식의 유화책을 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고구려 멸망 과정을 살펴보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군의 무력으로 굴복시킨 대상은 신성이나 부여성 등 얼마 되지 않고, 요동 지역에 광범위하게 산재하고 있는 많은 성들을 굴복시킨 기록이 없음에도 평양성 함락 직후 요동 지역에서 뚜렷한 항거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양성 함락 후 요동의 성주들과 당 정부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요동만이 아니라 고구려 멸망 직전에 당군의 영향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러하였을 것이다.
평양성 함락 후 이세적 등이 보장왕 등을 이끌고 당으로 귀국한 뒤 최종적으로는 평양의 안동도호부에는 설인귀를 안동도호로 삼고 2만의 병력만을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2만 군사 이외의 당군이 언제 완전히 철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669년 전반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당시 당군의 지휘부가 고구려 내부 정세에서 다소 낙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만큼 고구려 지방 세력들의 저항이 그리 우려할 상황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당의 온건한 기미지배 정책은 곧 바뀌었다. 평양성을 중심으로 고구려 주요 주민들을 대거 당의 내지와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기습적으로 시도하였다. 669년 4월에 기획하여 5월에 곧바로 시행하여 모두 3만여 호에 가까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자치통감>에는 당시 고구려 주민 가운데 이반(離反)자가 많아서 이주시켰다고 했는데, 이반자란 곧 당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뜻한다. 그리고 유력자들을 강제 이주한 결과 안동도호부에는 빈약자만 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 국가를 운영해본 경험을 갖고 있는 주요 지배세력을 대거 이주시켜 다시는 고구려 땅에서 더 이상의 국가 건설이 불가능하게 하려는 극단의 조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료상으로는 669년 2월에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安勝)이 신라에 투항한 상황 외에는 특별하게 평양과 요동 일대에서 눈에 띄는 저항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669년 4~5월에 가혹한 대규모 이주정책을 시행한 것은 당 정권이 고구려 평양 지역을 아예 공백으로 만들려고 한 계획이 상당히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고구려 주민들의 이주 경로를 보면, 한반도 평양 일대 주민은 바닷길로 수송하여 산동반도의 래주(萊州)를 거쳐 양자강과 회하 남쪽으로 이주시켰고, 압록강 이북 요동 일대의 주민들은 요서 영주(營州)를 거쳐 산남(山南)과 병주(幷州), 량주(涼州) 등 당의 서쪽 변경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고구려로부터 최대한 멀리, 그리고 고구려 주민들이 세를 이루지 못하게 뿔뿔이 분산 이주시켰던 것이다. 고구려 부흥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던 당 정부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남단덕 묘지(南單德墓誌)
물론 고구려 지배층이 모두 이주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적극적인 협력자들은 제외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 유민 묘지명 중 하나인 <남단덕묘지(南單德墓誌)>에 보인다. 그 문장 중에 "요동(고구려) 자제들은 나누어서 당의 군현에 분산 거주시켰다. (남단덕 가문은) 고구려 자제 중 으뜸이어서 안동도호부에 배치 거주했고, 조부인 남적(南狄)은 당의 마미주(磨米州) 도독을 역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미주, 즉 마미성은 고구려 요동 지역에 있던 성으로서 남단덕 가문은 아마도 마미성의 성주였을 것이다. 이들 가문은 고구려 멸망 후 당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이주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3만여 호, 15만명에 가까운 고구려 이주민들은 유력자란 기록대로 지배귀족들이었을 것이다. 자기 땅에서는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머나먼 이국 땅으로 쫓겨나듯이 이주를 강요당했을 때 그들의 삶과 심사는 어떠하였을까?
필자는 이들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을 생각할 때,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만주 땅으로 연해주로 이주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을 함께 생각한다. 그 누구보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려인들의 지난한 삶을 떠올린다. 그래도 약간이나마 복원되고 있는 이분들의 고난을 환기하는 것이 먼 과거 고구려 유민들의 고난과 겹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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